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1804년 나폴레옹(Napoleon)은 유럽 전체의 지도자를 자칭하며 황제(Emperor)에 등극했다. 그는 교육개혁이 국가경쟁력 확보를 위한 핵심과제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고등사범학교인 에꼴 노르말(Ecole normale superieure)과 최초의 이공계(理工係) 대학인 에꼴 폴리테크닉(Ecole polytechnique)의 국가기관화를 통해 프랑스 교육을 관제화(官制化)한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왕정복고와 혁명의 혼란기에 프랑스가 빠져들자 신성로마제국의 멸망으로 황제권을 잃은 독일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독일은 통일과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의 황제옹립이란 두 가지 염원을 보불전쟁을 통해 이룬다. 비스마르크는 통일독일의 후발적 산업혁명을 위한 인적요소(人的要素) 구성을 위해 나폴레옹의 관제교육개혁을 참조한다. 이를 통해 독일이 후발산업혁명의 대표주자가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같은 추축국(樞軸國, Axis Powers) 진영이었던 일본이 이 제도에 흥미를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를 통해 산업화를 성공시킨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를 꿈꿀 정도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는 일제시대(日帝時代)를 통해 이 교육시스템을 전수받았다. 이것을 국가산업화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것이 전후(戰後) 한국의 군사정권들이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정치경제학은 분명히 양적팽창(量的膨脹)을 주제로 하고 있다. 양적팽창은 물질적 개념이고 질적팽창(質的膨脹)은 정신적 개념이다. 따라서 산업혁명과 이를 위한 교육제도는 당연히 양적팽창을 위한 도구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이 교육제도를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함은 양적팽창을 효과적으로 했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나라 교육발전의 역사를 파악함에 있어서 여기까지의 논리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사람들이 여기에서 크게 염두에 놓지 않는 논리가 하나 있다. 정치적 중세(中世)를 문화적 암흑시대로 분류하고 근대를 암흑에서부터의 새로운 탄생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현대문명은 물질적 발전이 이끌었으며 양적팽창이 질적팽창을 견인(牽引)한다. 현대인들이 물질적 풍요에 집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정신을 기초로 하고 육체와 같은 물질적 형상이 그 위에 설 때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근대의 물질적 성장은 그 이전의 철학적 성장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산업혁명의 공과(功過)를 따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이전까지 인류역사가 이룬 정신적 발전을 전제조건으로 설정해야하는 것이다.
결국 정신적 깨달음은 물질화 과정을 거쳐 산업발전에 기여하게 되어 있고 물질적 성장은 교육방법의 접근성확보를 통해 철학과 생각의 역사에 기여하게 되어 있다.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파악해야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대별적(對別的) 사건을 하나의 역사발전법칙으로 변증화(辨證化)하고 시대에 맞는 교육시스템에 관해 끊임없이 통합과정(統合過程)적으로 토론하고 구체적 방법을 향해 생각을 모으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놀랄 발전을 이루었음에도 교육 후진국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이유는 다만 정신적 가치를 기초로 물질적 가치가 빛을 발휘할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구조에 역행하여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이끌 수 있다는 생각을 함으로서 온다. 우리나라는 산업발전에 있어서 전 세계의 모델이다. 동시에 사회통합지수에 있어서는 전 세계의 누구도 닮고 싶어 하지 않는 모델이다. 실업률과 고용율, 노령자 비율, 도로사망률, 자살률에서 보이는 지수들은 참담할 정도다.
충북지역 입시생들의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국내대학 진학률이 1년 사이에 10% 정도 떨어졌다고 한다. 반면 기초학력미달자(基礎學力未達者) 비율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이런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출처를 파악함에 있어서 교육의 수장(首長)인 교육감이 먼저 관심을 끄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그 논거를 초등학교의 중간고사폐지라든지 기말고사의 수행평가 대체 등의 물리적 수단에 두는 것이 걱정스럽다. 이를 이유로 학교교육의 퇴행을 논하고 이에 따른 학력저하를 우려하여 학부모들이 학원을 찾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적 우를 범하기 쉽다. 학부모들이 진학문제에 있어 정규학교보다 학원교육을 더 신뢰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교육감이 학생들을 학원교육으로 내 몰았다는 논리는 그로인해 ‘충북지역의 대학 합격율이 더욱 높아졌다.’ 라는 사실과 상통해야 논리적이다.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의 근본적 문제는 교육의 기초개념을 정립하는 것에서 이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 결과로서 양적팽창의 성공과 질적팽창의 실패라는 극단적 양면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교육 담당자들 까지도 ‘공부를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의 민 낯은 여기에 있다. 공부는 성공하기 위해 수행해야할 과제가 아니다. 밥 먹고 숨 쉬는 것과 같은 생활이다. 그 인식의 정도가 한 사회의 문화적, 정신적 성숙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교육문제는 그래야만 해결된다. 면학(勉學)의 목표가 좋은 대학입학이고 좋은 대학을 파악함에 있어서 정신적 가치를 배제하는 일은 애초부터 교육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교육에 관한 인식을 새롭게 하여서 충북지역이 교육선진기지(敎育先進基地)로 거듭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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