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보통사람들과 피가 달라야 합니다"

72년 8.19 단양수해 때 고립된 수해 현장 이틀 걸어 들어가 생생한 보도

79년 ‘청주보육원 집단암매장사건’특종보도… 전국 보육원 개겫단초

아버지 교장 재직 학교 화재 단독보도 ‘불효막심한 놈’ 주변 질타 받기도


기자로 살아온 지 40년. 불혹(不惑)이다.
청년 시절, 신념과 소망에 천착한 패기 하나만 믿고 겁 없이 펜을 잡았다.
숙명. 그가 기자로 살아가는 이유다. 40년 세월, 취재현장 일선에서 역사를 목도하며 기록해 온 사관(史官)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다. 후배들은 그가 헌신하며 개척해 온 미답의 길을 따라 걸으면서도, 그 길에 배인 고뇌와 열정과 사명을 기억하지 못한다. 안타깝고 부끄러운 일이다.
동양일보가 ‘동양초대석’에 ‘조철호 회장’이 아닌, ‘조철호 기자’를 초대한 당위(當爲)가 여기에 있다.
천생 기자다. 사명과 인간의 도리 앞에서 기꺼이 사명을 택한다.
그는 누구보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받드는 효자다. 아들로서. 그러나 기자에게 부여된 사명과 책무는 천륜을 앞선다. 대의멸친(大義滅親)까지는 아닐지언정, 기자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소명이다.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에서 불이 났을 때, 천륜이라면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일.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곤 기사를 써냈다. 삼십대 피가 뜨거운 사건기자 시절의 그 ‘사건(?)’으로 ‘불효막심한 놈’이라는 세상의 비난과 지탄은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기자이기에. 그렇다. 고향에서 기자로 사는 길은 결코 녹록지 않은 법이다. 때론 사익을 버려야 하고, 인륜을 삭여야 한다. 이성적 분노마저 인내해야 한다. 모름지기 ‘기자 40년’이 돼서야 세상의 이치와 순리를 깨닫는다고 했다. 중용의 시각에서 세상을 조망하며, 정돈된 사고와 가치로 판단하게 된다. 물질과 권력의 미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언론이, 언론인이 지녀야 할 최우선 덕목이기도 하다.
영(榮)과 욕(辱)의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의 현장을 지켜 온 기자 조철호(67).
“이제야 기자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기자 40년, 인생 70을 바라보는 이쯤에서야.
누구보다 앞서 왔다. 누구보다 기자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피’가 다른 사람이다.
단어 하나를 택하기 위해 고민하고, 문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책을 수십 권, 수백 권 읽는다. 그래서 ‘기자’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고, 어색하지 않다. 잘 어울리고 자랑스럽다.
누군가 후배로서 그의 40년 기자 생활을 반추하고 기억해야 한다. 후배의 도리요, 후배의 책무다. 뿌리없는 언론으로 인식되는 세태에 맞서, 언론인들 사이의 질서와 선후(先後)가 있음을 천명해야 한다. 외부의 편견과 평가절하를 감내하더라도, 동양일보 스스로 ‘조철호 기자’의 40년을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했다.
동양일보 회장으로 만나지 않았다.
충북, 나아가 한국 언론사에 또 다른 획을 그은 ‘40년 현역기자’를 만났다.
언제나 허리춤에 카메라를 차고, 목에 펜을 걸고, 안주머니에 낡은 취재수첩을 품은….
그에게 기자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신문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별칭을 붙이고 싶은 마음에, 신문 기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부터 물었다.

 

기자란

 글을 잘 쓴다거나, 인맥이 두터워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거나,
 
 사회생활을 성실하고 열심히 한다거나 하는 것만으론 부족.

 기자는 보통사람들하곤 분명히 다른 판단가치와 신념, 가치관 필요.

 기사는 만들어져서도, 미화돼서도, 왜곡돼서도, 객관성을 상실한

 주관적 판단이어서도 안돼.

 때론 모험을 해야 하고, 철저한 자기희생, 저항과 투쟁해야.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라는 소명의식 지녀야.

 


조철호趙哲鎬 동양일보 회장은… △1945년 6월 10일 충북 청주 출생 △청주고(1964)-청주대 국문학과 졸(1968) △충청일보 기자(1971) △합동통신 기자(1975) △월간문학 신인상 시 당선 등단(1978) △충북문인협회 회장(1980-1985) △연합통신 기자(1981) △연합통신 충북취재반장(1985-1987) △충북예총 회장(1987-1990) △충청북도문화상(예술부문) 수상(1987) △연합통신 충북지국장(1988-1991) △시집 ‘살아있음만으로’(문학세계사) 출간(1889) △동양일보 창간(1991) △동양일보 사장(1991-2004) △여행 에세이집 ‘중국대륙 동서횡단 2만5000리’(푸른나라) 출간(2005) △중국장백산문학상(해외부문) 수상(2006) △동양일보 회장(2004-현재) △(사)한국시낭송전문가협회 회장(2007-현재)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사천동 하우스토리 101동 1204호(우)360-794 △☏043-218-5225.

 

 

- 먼저 회장님의 기자생활 40년을 축하드립니다. 한국언론사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사례로 꼽히는데, 기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부터 알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교장이셨는데, 형제들이 많다보니 서울대 아니면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은 못 보낸다는 가정의 룰이 있었지요. 어쩔 수없이 고향에 있는 청주대 국문과를 들어갔지요. 1학년 때 학보사 기자에 뽑혔지요. 그게 기자를 하게 된 계기가 된 셈이죠.”

-학보사 기자 생활은 어땠나요.

“학보사 기자라는 게 의외로 바빠요. 원고 청탁에 들어온 글 수정하랴, 그렇게 하다보니까 강의를 빼먹고 학보 만드는데 미친 거예요. 2학년 때 편집국장이 됐어요. ‘청대학보’를 ‘청대신문’으로 제호를 고치고, 월간이었던 것을 격주 간으로 돌리고, 대학신문의 일대 변혁을 가져왔어요. 그때부터 내 손으로 일간신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정식 기자가 된 것은 언제인가요.

“1971년 11월 1일 충청일보 견습기자 2기로 기자생활을 시작했으니 꼭 40년이 됐네요.”

-입사후 기자생활은 어떠셨는지요.

“제일 먼저 편집부에 배치가 됐어요. 내근기자를 한두 달쯤 했는데 당시 정철모 편집국장이 외근을 겸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문화·체육을 맡았어요. 충북예총과 체육회를 출입했지요.”

-충청일보 기자 시절 기억나는 사건은 있나요.

“1972년 8월 19일 단양에서 수해가 났는데, 단양 읍내가 물에 잠겨서 44시간이나 고립이 됐어요. 단양 주재기자의 생사도 알 수 없어서 편집국장에게 현지에 들어가야겠다고 자진해서 건의했지요. 교통이 다 두절된 상태라 산을 넘어서 천신만고 끝에 들어갔는데, 그곳은 참담, 참혹, 뭐라 표현할 수 없었어요. 남한강이 범람해서 전봇대에 자동차 타이어가 매달려 있고…. 렌즈만 대면 다 특종사진이었지요. 보이는 대로 취재하고 사진을 찍고 해서 기사를 써놓곤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이틀 뒤 헬기가 와서 그 편에 필름과 기사를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단양 소식이 겨우 외부로 전해졌지요.”

-수몰된 단양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겠네요.

“‘단양, 수중도시 44시간’ 그게 단양 수해 관련 첫 보도예요. 1면에 기사랑 사진이랑 대문짝만하게 터져나가기 시작했지요. 적십자 구호차량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교통이 재개되면서 기사 송고를 계속 했지요. 그때는 기사를 차편으로 보낼 때였어요. 충청일보 역사가 20여년 정도였는데 그 기사로 충청일보 1호 특종상을 받았어요.”

-그후 통신사로 옮기셨지요.

“합동통신에서 5년이상 경력기자중 공개채용으로 충북에 특파원을 한 명 뽑았어요. 그때 합격해서 충북의 첫 통신사 기자가 됐습니다. 1980년 언론 통폐합 조치로 합동통신이 연합통신으로 변경된 후 취재반장이 됐지요. 그리고 충북지국장이 됐어요.”

- 통신사에 계실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먼저 1979년 ‘청주보육원 집단 암매장 사건’이죠. 대형 특종이었지요. 당시 중앙지 8개 중 7개 신문이 제 기사를 1면 톱기사로 다룰 정도였어요. 수용자 수대로 나오는 정부보조금을 계속 받으려고 수용 자가 죽으면 사망신고도 안한 채 뒷산에 암매장한 사건이었죠. 보도가 나간 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정종택 충북지사에게 직통전화를 해서 정부가 보육시설을 개선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겠냐고 물어봤다고 합디다. 그 뒤로 전국에 있던 아동수용시설 14개인가를 전부 국가에서 개보수를 하게 됐어요. 돼지우리 같던 참혹한 시설들이 현대식으로 깨끗하게 개선됐지요. 그 때 그 사건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군요.

“당시 청주보육원 있던 곳이 청주 신봉동 충북 재활원인데, 그 지역에서 문화재 도굴사건이 자주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취재하려고 갔다가 외딴 집에 물을 얻어 먹으러 들어갔어요. 주인 아주머니가 바가지에 떠 준 물을 마시려는데, 담 밖으로 차가 휙 지나갔어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또 죽으러 들어가는구먼’ 하는 거예요.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어딜 죽으러 가요’했더니 ‘덜 된 애들을 실은 차들이 자주 들어가는 데 나오는 애들은 한번도 못봤어’라고 대답을 하더군요. 정신지체아동 수용소가 거기 있다는 거예요. 산계곡 외딴 곳에 있어서 아무도 몰랐어요. 찾아가 보니 정말 산 속에 돼지우리 같은 건물이 있고, 집 한 채가 있어요. 애들이 몇몇 보이길래 가까이 가려는데 커다란 독일산 세퍼트 한 놈이 지키고 있었어요. 그래서 일단 숨어서 봤어요. 그때가 6월 하순이었는데, 바람이 부니까 인분 썩는 악취가 막 납디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육원 안으로 들어 가보려 했는데 방법이 없었어요.

-점점 더 궁금해지는군요.

“일단 내려온 뒤 나중에 녹음기를 품에 숨긴 채 차를 빌려서 다시 갔어요. 정문을 지키던 사람이 누구냐고 묻길래 “집안에 모자란 조카가 있는데 여기 들어오는데 비용이 얼마나 드냐”고 물었더니 ‘들어오는데 30만원이고 매달 얼마씩 내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원래 수용시설은 국가로부터 보조금을 받으니까 그 돈도 받으면 안되는 것이었죠.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봐야겠다”고 하니까 상태가 심하지 않은 애들 방만 보여주더라고요.”

-자세한 취재는 어려웠겠네요.

“안내하는 방이 아닌 다른 방을 몰래 들어갔어요. 시멘트 바닥에 아이들이 다 발가벗고 있었어요. 한 방에 14~15명, 옆방도 그래요. 돼지 키우는 거랑 똑같았죠. 아이들을 사육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마침 일을 하는 젊은 여자를 만났는데 ‘기자냐’고 묻더니 ‘여기 좀 어떻게 해 주세요’ 하면서 울먹여요. 뭔가 문제가 많구나 하는 생각에 ‘알았다’고 하곤 돌아오자마자 청주시청에 들어가서 수용 인원에서부터 필요한 것을 모두 확인했어요. 등록돼 있는 인원이 170여명이었는데 내가 본 아이들은 40~50명밖에 안됐죠.”

-암매장된 사실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취재를 하던 중 편지가 한 통 왔는데 아마도 보육원에서 만났던 여자였던 것 같아요. ‘얘들이 여럿 죽어서 인근 산에 묻었다’는 내용이었죠. 삽을 들고 현장으로 갔는데 땅을 파고 말 것도 없어요. 겉으로 드러난 비닐을 잡아당기니 부패된 시체가 그대로 나왔어요. 한 마디로 참혹한 현장이었습니다.”

-그 기사 때문에 곤욕도 치르셨다는데.

“시체만 70~80구를 찾아낼 정도로 워낙 큰 사건이다 보니 본사에 지원요청을 했어요. 그때 사진을 전송기로 송고할 때였는데 전송팀과 취재 인력이 왔어요. 속보를 계속 쓰고, 그 기사들이 중앙 언론을 통해 매일같이 보도되면서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죠.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당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 요원이 찾아와 무작정 지프에 태워서 끌고 갔지요.”

-무슨 이유였나요.

“끌려갔더니 녹음테이프를 틀어줘요. 평양 중앙방송에서 보도한 내용이래요. ‘자본주의에서는 정박아를 집단 생매장한다’는 내용이어서 난리가 났다는 거예요. 그런 내용이 세계 각국으로 알려져 우리나라가 곤란하게 됐다는 거죠. 그래서 그 기사가 사실이 아니었다는 내용으로 자술서를 쓰라는 거예요. 사실과 달리 과장하고 왜곡해서 보도했다는 내용으로, 즉 오보였다고. 그렇게 못하겠다며 버티다보니 힘들었지요. 그 사건으로 회사에서 특종상을 받고 동남아 5개국을 40일 동안 여행하는 호강도 했지요.(웃음)”

-또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는지요.

“보육원 집단 암매장 사건이 기자 생활 중 가장 큰 사건이었는데, 정작 가장 힘들었던 사건은 아버지가 교장으로 계시던 증평초등학교에 불이 났는데 기사를 썼던 일이죠. 주말 방과 후에 불이 났는데 교실 3개가 모두 타버렸죠. 그 사건을 아들인 제가 기사를 쓴 거지요. 주위에선 모두들 불효막심한 놈이라며, 아무리 기자라고 해도 그럴 수가 있느냐며 온갖 욕은 다 먹었죠. 지금도 그때 얘기를 하며 놀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웃음)”

-기사를 쓰면서 아버지 걱정은 안됐었나요.

“아버지가 교장으로 계신 학교지만, 공공건물에서 방과 후에 불이나 교실이 몇 개나 다 타버렸는데 기사를 안 쓸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미리 양해를 구했더니 아버지께서도 “네 생각이 맞다”라고 이해해주셨죠.”

-그 기사 때문에 비난이 심했지요.

“완전히 불효자식으로 매도당하고 욕이란 욕은 다 먹었었던 같아요. 하지만 기사를 쓴 것에 대해선 후회는 없어요. 그 학교 교장 아들이 기자면 보도가 안되고, 다른 학교 일이면 보도가 된다면 그게 오히려 문제인거죠. 요즘은 화재 기사가 단신 정도에 불과하지만, 당시로선 대낮에 공공기관인 학교에서 불이 나 교실이 몇 개 타버린 사건은 큰 사건이었죠. 그런 걸 아버지가 계신 학교라는 이유 때문에 감추고 보도하지 않는다는 게 기자의 양심으로 허락되지 않았죠.”

-인간과 기자의 경계에서 심적 고민이 많았을 것 같군요. 회장님 말씀을 들으니 기자는 보통사람하곤 분명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피가 달라야 돼요. 보통사람의 피로는 기자를 해서는 안돼요. 사람에게 A형, B형 하는 생물학적 혈액형이 있다면, 기자 혈액형은 ‘기자형’이어야 돼요. 핏속에 기자정신과 기자혼, 이러한 것들이 들어있어야 하는 거죠. 기자로서 균형감각과 객관성에 바탕을 둔 비판의식, 소명 의식, 사명감, 냉철하고 명민한 판단력,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불의에 맞서 정의를 수호하겠다는 투쟁과 저항 의식 같은 것들이 핏속에 흘러야 합니다.”

-기자에게 필요한 기본은 무엇인가요.

“글을 잘 쓴다거나, 인맥이 두터워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거나, 사회생활을 성실하고 열심히 한다거나 하는 것들만으론 부족하죠. 글만 잘 쓰는 사람은 문학을 하면 되고, 정보가 많은 사람은 정보기관이나 수사기관에서 일하는 게 낫죠. 기사 한 줄이 사회나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 점에서 기자는 보통사람들하곤 분명히 다른 판단가치와 신념, 가치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사는 만들어져서도, 미화돼서도, 왜곡돼서도, 객관성을 상실한 주관적 판단이어서도 안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쓰는 것입니다. 감춰진 사실은 드러내고, 드러난 사실은 확인하고, 예상되는 사실을 분석하는 것이 기자의 사명입니다. 이를 위해선 때론 모험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철저한 자기희생이 필요하며, 저항과 투쟁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이라는 소명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기자로 생활하면서 정립된 언론관이 있다면.

“언론의 형태를 대략 3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봐요. ‘선진국형’ 언론이 있고, ‘개발도상국형’ 언론이 있습니다. 또 사회적 환경이나 이념 등에 억눌려서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유명무실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진국형 기자는 그 존재만으로 사회적 존경과 자긍의 대상입니다. 언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가치가 크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처럼 개발도상국형 언론은 정치와 경제, 이념 등 사회적 명제 사이에 껴서 고민과 갈등과 수난을 감내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신뢰와 불신을 동시에 받는 대상이 되는 것이죠. 북한같은 공산주의 독재체제나 사회주의 체제 하의 언론은 사실에 대한 판단과 비판과 계몽의 역할이 원천적으로 차단돼 있습니다. 언론의 자주성을 박탈당한 채 ‘주문된 사실’만을 보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아에 허덕이거나 경제적으로 빈곤한 나라는 사회적 여건상 언론 자체가 제대로 형성되기 어렵죠.”

-우리나라 신문의 생존환경, 특히 지방신문의 경영 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기자들의 신념과 존재가치도 퇴색돼 가고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우리나라는 과거 군사독재시절, 국가가 언론을 통제하고 감시하고 조종하는 부끄럽고 암울한 시대를 보냈습니다. 이후 민주화 열기 속에서 언론에도 자유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언론 활성화와 언론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파생된 제도적 조치들은 오히려 언론의 가치와 언론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수반하게 된 요인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기자들의 존재가치와 자긍심, 소명의식도 퇴색되고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지요. 돈 몇 억이면 신문사를 차릴 수 있고, 최소한의 자질과 능력 검증도 없이 기자가 될 수도 있는 게 현실 아닙니까. 그런 언론이 부여된 시대적 사명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 낼 리 없으니,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가치는 갈수록 하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죠. 이는 궁극적으로 언론의 경영환경 악화를 초래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신념도, 능력도, 자질도 없는 사람들이 언론을 만들고 언론인을 자처하니 누가 언론의 가치를 인정하겠습니까. 그나마 신념을 갖고 헌신하는 언론조차 동반 가치하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과거 군사독재시절은 언론탄압으로 ‘생각은 있으나 표현할 수 없는 시대’였다면, 언론민주화로 대변되는 요즘은 ‘생각조차 없으니 표현할 수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역할과 책무를 수행하기보다는 생존 그 자체에 만족하는 언론이 적지 않은 현실이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지방신문이 열악한 생존 환경을 딛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요.

“대부분 지방신문이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방신문이 사회적으로 책임과 역할을 다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경영환경의 안정이 필요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안정적인 경영환경을 만들기 위해선 지방신문이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능력과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 기자라는 직업을 수행하고, 존재가치와 사명보다는 존재한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언론 속에서 차별화되고 책무를 다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죠. 척박한 황무지에서 누구 하나 돌보는 이 없다 해도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는 꽃과 나무가 있기 마련입니다.”

-언론의 난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언론은 제대로 된 언론이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언론을 불신하고 언론을 회피하고 언론을 무시하고 언론을 인정하지 않는 세태 속에서 살아남는 언론은 신뢰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고 평가받는 언론이어야 합니다. 앞서 말한 피가 다른 기자들이 있는 언론, 소신과 신념과 가치관과 명민함을 검증받은 기자들이 있는 언론,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 비판과 계몽의 책무를 다하는 언론,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지닌 기자들이 만드는 신문이 돼야 합니다. 군부독재 시절 신뢰받고 인정받던 언론은 바로 사실을 지키고 알리기 위해 투쟁하고 저항한 언론입니다. 사실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언론인들이 지금도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입니다. 언론 민주화가 된 현재는 그런 체제적 요인보다 더 힘들고 강한 적과 싸워야 합니다. 언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또 언론이 처한 엄연한 현실과 싸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선 앞서 말한 것처럼 언론다운, 언론에 부여된 책무를 다하는 언론이 돼야 합니다. 예컨대, 디자인이나 품질이 비슷해 보이는 옷이라 해도 사람들이 잘 사입는 옷이 있는 반면 잘 팔리지 않는 옷이 있기 마련입니다. 잘 팔리는 옷은 그만큼 사람들이 좋아하고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죠. 언론도 같은 이치입니다. 머지않아 자연스럽게 언론환경이 재편되리라 믿습니다. 차별화되고 언론의 책무와 사명을 다하는 신문과 그렇지 못한 신문은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까요. 단, 철저하고 지속적인 자기개혁과 연단이 전제돼야 한다고 봅니다.”

-동양일보를 창간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0년간 단 한 번의 결간도 없이 이끌어오신 동력의 배경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렇습니다. 제가 기자를 시작할 때부터 20년이 지나면 신문사를 창간하는 게 꿈이었어요. 가장 언론다운 언론사, 기자들이 아무런 걱정없이 마음놓고 쓰고 싶은 기사를 쓸 수 있는 신문사, 역사를 이끌어가는 신문사, 지역과 주민을 위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신문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기자생활 20년이 지난 뒤 동양일보를 창간했습니다. 흔히 지방지들은 제호에 지역성을 두기 마련인데, 전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신문을 만들고 싶었죠. 10년 정도 지나 전국지로 성장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호를 ‘동양일보’라 했고, 제자를 훈민정음체로 한 것은 가장 과학적이며 세계 최고의 자랑거리인 우리민족의 자긍인 한글에 담긴 정신과 미래를 반영하기 위해서입니다. 언론이 지향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우리문화의 보존과 육성이라는 사명의식도 담겨 있습니다.”

-기자로 생활할 때하고, 직접 신문사를 경영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고 보는 데요.

“당연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까지도 관리자, 경영자라는 생각보다 기자라는 생각으로 일을 합니다. 아직도 허리춤에 카메라를 차고 다닙니다. 지난 40년 동안 그래 왔습니다. 그런 기자정신 때문에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습니다. 동양일보는 창간 때부터 참신하고 개혁적인 시도를 통해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과 호응을 얻었습니다. 한글전용 가로짜기 편집을 처음으로 시도했고, 모든 제작과정을 컴퓨터로 진행하는 CTS풀페이지네이션 시스템을 한국신문 사상 최초로 도입했습니다. 섹션면 운영 등 지면 구성 과정도 파격적이었죠. 거기에 기자들의 열정과 헌신이 더해져 빠른 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지방지로는 전국 처음으로 ABC에 가입, 9만8000부를 인증받았습니다. 당시로선 ABC에 가입한 신문사가 3곳에 불과할 정도로 신문부수를 공개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낼 시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일이었죠. 독자권역을 대전과 충남지역까지 확대하면서 앞만 보고 달렸죠. 그런데 10년만에 IMF를 맞았습니다. 광고와 신문 판매가 주수입원인 신문사로선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저희도 예외가 아니었죠. 전국지로 성장하겠다는 꿈을 미뤄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추스르고 다져서 새로운 꿈을 꾸자고 스스로 위로하며 견뎌왔습니다. 기자로서 열정과 신념이 앞서 경영자로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한 책임도 있지요.”

-동양일보가 문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많이 두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언론이 고양해야 할 가장 큰 가치는 문화에 대한 창출, 문화에 대한 보존, 기록, 이런 것들이예요. 신문 만드는 행위 자체도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론은 사회에 문화를 전파하고, 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힘이 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모태가 되고, 문화를 집대성하는 역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일입니다. 언론이 해야 할 가장 큰 사명중 하나라고 봐요. 신문 하나하나가 문화유산이어야지요. 그런 자긍심으로 신문을 만들어야죠. 문화에 대한 가치와 유형을 다 설명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문화와 예술은 인간의 심성을 따뜻하게 만들고,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의 이유입니다.”

-문학인들을 재조명하는 일이나, 문화 행사에 중점을 두는 것도 그런 이유이겠네요.

“문화의 중심에 예술이 있어요. 예술의 중심에는 문학이 있어요. 그 문학의 가장 중심에 시가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직접 시인이 되고, 문학가가 되고, 예술가가 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시를 듣고, 책을 읽고, 예술을 즐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죠. 시낭송이라는 새로운 문화코드를 통해 시를 낯설어하는 사람들이 시를 즐기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죠. 또 순회문학제를 통해 문학을 친근하고 가깝게 할 수 있도록, 생활에 문화를 접목할 수 있도록 도와주죠.”

-문학행사를 하면서 중국동포 지식인·문인들을 초청하는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요.

“그들의 고국은 대한민국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점점 중국의 본류인 한족화하거나, 우리말과 글을 잃어가는 게 안타까웠죠. 한국인학교가 점차 없어지면서 중국인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민족혼을 차츰 잃어가는 게 현실입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자체가 무너지고 한족이 반 이상을 차지했잖아요. 우리는 43%인가 밖에 안되잖아요. 심각한 위기입니다. 이걸 누가 지켜요. 속절없이 무너지는 우리말과 글을 누가 지키도록 해야 합니까. 동포들 중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나, 문학을 하는 문학인들이나,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 문화와 말과 글을 심도있게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하는 데 별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우리말과 글로 된 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먼저 알아야 가르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동양일보가 모든 비용을 들여 중국동포 문인들을 해마다 여러 명씩 초청하기 시작한 건데 벌써 100명이 넘었지요. 더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싶은 데 경제적 부담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요.”

-중국에도 자주 가시는 편이시죠.

“중국을 50여 차례 간 것 같네요. 7년전 작심하고 73일 동안 중국 대륙을 동서로 횡단했어요. 그래도 다 안다고는 못해요. 중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과거에도 우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현재, 미래에도 끊임없이 함께 가야할 이웃이에요. 그들을 알려면 중국의 역사든, 풍습이든, 그들의 삶의 양태든, 그런 것들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이해가 어려워요. 왜냐면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그들은 독특한 문화들이 있어요. 책을 쓰게 된 것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단순히 중국여행기 정도가 아닌, 그들의 문화와 습성을 소개한 책이죠. 처음에는 상·하권으로 만들었다가 독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한 권으로 축약하다보니 어쩔 수없이 생략한 것들이 많아서 좀 아쉬워요. 기회가 되면 중국 남북을 횡단해볼까 해요.”

- 참전국인 에티오피아 지원사업도 펼치고 있는데.

“96년 여름에 월드비전 문영길 목사라는 분이찾아와 ‘한국전쟁 참전국 중 하나인 에티오피아 참전 군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묻더군요. 생각도 못했고 알 수도 없는 일이었죠. ‘거의 다 죽고,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도 가난에 찌들어 아주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그들을 돕는 모금활동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해요. 국가에서 도움을 안주느냐고 물으니 전혀 없다고 합디다. 은혜를 모르는 나라라는 사실에 부끄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우선 그들의 현실부터 알아야겠다고 했어요.”

-그 때 동양일보 기자를 에티오피아 현지에 파견했지요.

“그렇습니다. 여기자를 현지에 보냈어요. 그 기자가 갔다 와서 취재한 것들을 보고하는데 말하다 말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군요. 너무 참혹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해요.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정리해 ‘코리아는 우리를 잊어도 우리는 코리아를 잊을 수 없어요’란 제목의 기사가 보도됐어요. 그러곤 간부회의를 소집해 우리라도 나서서 그들을 돕자고 결의했어요. 정부가 하지 않으니, 충북도민의 힘을 모아서라도 은혜를 갚는 일을 우리가 하자고. 그래서 한국월드비전하고 협의해서 모금운동을 시작했지요. 16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16년 동안 지원한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해주시죠.

“처음엔 아디스아바바에 참전용사들이 모여사는 코리아 빌리지에 상하수도 공사부터 시작했어요. 그런데 생활시설보다 중요한 게 교육시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참전용사들의 자녀들이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배워야 부모의 고통을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죠. 초등학교 2곳에 10개의 교실을 짓고, 중학교 한 곳에 8개의 교실을 만들고, 기술전문학교를 건립해 6개의 교실을 지어주었습니다. 기술전문학교 2차 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올 연말이나 내년 초면 더 늘어날 것입니다.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직업기술학교를 집중 지원해서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전사한 참전용사들의 묘역조차 없다던 데 사실인가요.

“한국전 참전 용사가 6050명쯤 되는데, 그 중 122명이 전사했어요. 현지를 방문해 그들을 추모할 생각에 전사자 묘역을 알려달라고 하니 처음엔 말들을 안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유해를 담은 관이 한 교회 지하창고에 방치돼 있었습니다. 그들을 묻을 땅이 없어서 수십년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듣곤 가슴이 막막했어요. 그들의 묘역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생각에 2만달러인가 3만달러를 모아 묘역조성비를 마련했죠. 그런데 우리 마음대로 묘역을 만들 수가 없어서 현지 한국 대사를 만나 참전용사 묘역을 만들 수 있도록 에티오피아와 협의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죠. 에티오피아가 남한과 북한 모두 수교한 국가이다보니 외교적 문제 때문에 조심스러운 사안이겠지만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 아닌가요.”

-참전용사들 중 생존자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데, 그들 후손을 위한 사업을 계속 할 생각인가요.

“당연하죠. 참전용사들에게 못다 갚은 은혜를 그 후손들에게라도 꼭 갚아야죠. 후손들이 코리아빌리지를 중심으로 모여 살고 있으니까 계속해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입니다.”

-화제를 바꿔보겠습니다. 청소년 교육사업에도 중점을 두고 있는데, 만물박사나 우리말글겨루기 대회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학과공부만 가지고는 인성교육에 있어서 부족한 게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무엇으로 채워줄 수 있느냐 하는 고민을 하게 됐죠. 넓은 안목을 갖거나 시사적 감각을 갖거나,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게 하는 일을 촉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죠. 만물박사 선발은 도내 4개 지역에서 매년 3000명 정도가 시험에 응시하지요. 일부 학교들은 응시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자체적으로 예비시험을 통해 선발해서 내보내는 학교도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만물박사 선발대회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훌륭하게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기도 하면서 많은 보람을 느낍니다. 그들이 결국 충북을 이끌고, 대한민국의 발전을 선도하는 인재가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만물박사 선발대회를 하는 궁극적 목적이고 성과입니다. 올해로 19년을 해 왔습니다.”

-시낭송 등 문학행사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요.

“안그래도 본격적으로 할 생각입니다. 그동안 시낭송 대회를 열어왔어요. 주로 성인들이 참여하는 행사입니다. 이를 통해 해마다 10명 가까운 시낭송 전문가를 배출해 왔습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모이다보니 정작 충북지역의 시낭송 전문가 양성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올해부터 충북인들만 참여할 수 있는 ‘충청북도시낭송경연대회’를 따로 만들었어요. 어느 정도 전문가들 수가 늘어나면 이들을 활용해 학생교육을 할 생각이죠. 각급 학교에 시낭송 전문가들을 파견해 교육을 하면 청소년들의 정서 함양과 문화수준 향상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지식과 함께 감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인성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회장님 기자생활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40년간 수많은 사람을 만나셨는데,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눈을 감고 있으면 참 많은 사람들, 내가 만났던 사람들, 취재했던 사람들, 또 어떤 사건과 연결됐던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늘 기억하고 감동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정말 평범하면서 빛나던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진실하고 진솔함이 있어요. 동양일보가 ‘평범한 사람들의 빛남을 위하여’를 제작정신으로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청원군 가덕에서 보신탕집을 운영하던 한 아주머니의 말이 기억납니다. 가난을 떨쳐보려고 장사를 시작했대요. 그래서 예전엔 손님들이 반말을 하거나 욕을 해도 팔아주는 것만으로 고마워 아무렇지도 않았대요. 그런데 요즘엔 듣기가 거북하고 기분이 나쁘다고 합디다. 아주머니는 ‘이제 돈 좀 벌은 것 같아서 그런가 봐요’라고 말해요. 얼마나 진솔하고 가식없는 말인가요. 또 청원군 부용면을 지나다보니 많은 학생들이 벼이삭을 줍고 있는 거예요. 왜 줍냐고 하니까 ‘우리 학교에 꼽추가 돼 가는 권선옥이란 친구를 도와주려고 전교생이 나와서 추수하고 남은 논의 벼 이삭을 줍는 것’이라고 말합디다. 얼마나 갸륵해요. 그 감동적인 장면을 보고서 아이 병을 고쳐줘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래서 기사를 썼어요. 기사를 접한 충주 김풍식 박사가 무료로 치료해줘 병을 고쳤어요. 앞서 말했던, ‘청주보육원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하던 젊은 여성, 그 사람 덕에 가려진 진실이 드러날 수 있었던 거죠. 그런 사람들이 잊혀지지 않아요. 또 남한강에서 일생동안 뗏목을 몰던 뱃사공은 뗏목을 미는 나무를 하도 가슴에 대다 보니 마치 호떡을 가슴에 붙인 듯 굳은살이 생겼어요. 그런 사람들, 묵묵하게 자기 길에서 어떤 숙명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 선량한 사람들이 눈에 선하지요.”

- 회장님 말씀 들으니 동양일보 제작정신이 왜 ‘평범한 사람들의 빛남을 위하여’인지 이해 가 됩니다. 40년 기자생활 하면서 후회나 아쉬움은 없나요.

“후회나 아쉬움은 참 많아요. 내가 만약에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더 좋은 기사들을 발굴하고 보도할 수 있었을 거예요.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다보니 그러지 못해서 아쉬움이 많죠. 그래서 아직도 현역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무언가 하나라도 더 취재하고 보도하고 싶은 욕심에. 개인적으로는 가정에 소홀하고 남편으로서 애비로서 제대로 역할을 못하는 것도 늘 미안한 일이죠. 기자라는 이유로, 가족의 희생과 이해를 강요한 면도 없지 않아요. 그래서 늘 고마운 일이죠. 가슴 속엔 새기고 산답니다.”

-가족 얘기가 나왔는데 한국 민족 민중문학의 선구자인 포석 조명희 선생이 작은 할아버지로 알고 있습니다. 가족사를 여쭤봐도 될까요?

“일제강점기, 일경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 선생은 넷째 할아버지이고, 경성제대를 나와 건설출판사를 운영하다 월북, 평양문과대학장을 지낸 조벽암(본명 중흡) 시인은 큰아버지입니다. 이젠 드러난 가족사지만, 한땐 이분들 때문에 망명작가, 월북작가 집안이라는 연좌제로 이런저런 피해가 있었지요.”

-만약 기자가 안됐으면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요.

“기자요. 다른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주변에선 교수가 되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신념적으로 확고해진 일이기 때문에 고민해 볼 생각이 없었어요. 다만 기자생활을 하되 시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은 버리지 못해서 등단을 했습니다. 하지만 일에, 가정생활에 쫓겨 시도 못쓰고… 그게 좀 아쉽지요. 일선 기자생활 어지간히 마감하고 나면 그때서야 마음에 드는 시 좀 쓰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지요.”

-기자로 살아가는 데 신념으로 삼는 좌우명 같은 것이 있다면.

“중학교 때부터 써서 책상에 붙였던 게 있어요. ‘생활은 서민을 담고 이상은 귀족을 닮아라.’ 어린 시절 철도 없을 때부터 써 붙였던 것이죠. 어디서 연유하고 깊은 뜻도 모르고 써놓은 것인데, 살아오면서 깨닫게 되더군요. 가장 소탈하고 그런 생활에서 삶의 맛을 찾고, 그러나 이상 만큼은 어떤 천하의 귀족도 생각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고 모든 사람을 위하는 것을 생각하는, 그런 꿈은 아직도 갖고 있어요.”

-책을 많이 읽기로 유명하신데.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잡식’으로 많이 읽는 편이죠. 학생 때는 교과서외의 책을 달고 살았죠.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책을 살 돈이 없는 거예요. 문득 헌책 장사를 하면 좋은 책을 얻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에 ‘조절구 서점’이라는 책가게를 시작했죠. 근데 내가 원하는 책은 들어오지 않고 맨 참고서나 교과서 팔러 오는 경우가 많아요. 더 큰 문제는 내가 아끼는 책을 사가는 거예요. 잘못하다간 책을 얻기는커녕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책들만 날리겠다 싶어 접었지요. 지금도 일주일에 2권쯤은 보는데, 나이가 들수록 책을 고르게 되더군요. 시간이 좀 아깝고 볼 책을 골라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베스트셀러보다는 많이 팔리지 않아도 좋은 책이 나오는 게 있어요.”

-기자이면서도 문인협회장 충북예총회장 등 사회활동을 많이 하셨지요.

“네. 예총 회장을 하면서 충북예총이 실질적으로 예술인들의 모임이 되도록 주력했습니다. 특별한 사람 몇몇이 그림 그리고 노래하고 시 쓰고 하는 특별한 집단처럼 돼 있던 것을 탈피, 명예회원제를 만들어서 일반회원을 만들고 예총회지도 발간하기 시작하고, 예총 사랑방을 만들어서 매주 예술인과의 만남을 매주 시행하는 등 저변 확대에 노력했죠.”

-예총 회장을 맡게 된 계기는 무언가요.

“많은 예총회원들이 예총을 활성화시킬 사람이 필요하다며 적극 권유, 선거일 전날 밤 갑자기 선거에 나서게 됐고 당선이 됐어요. 그때 연합통신 지국장 할 때였으니까 얼마나 바빠요. 그래도 회원들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낮에는 기사를 쓰고, 밤에는 예총 일을 보면서 3년을 했어요. 지역주민의 문화 향유를 위해 무심천에서 예술제를 개최하고, 예총에 대한 친근감을 갖게 하기 위해 전화번호도 ‘오소! 예총이오’라는 뜻으로 ‘53-6725’로 정했죠. 예총으로 전화하면 매주 열리는 문화행사를 안내해주는 자동응답서비스도 도입했어요. 그런 일들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당시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충북예총을 전국 최우수 예총으로 선정하기도 했죠.”

-회장님 기자생활 40년 동안의 얘기를 다 들으려면 사흘 밤을 새도 끝이 없겠네요.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약속하면서, 후배 기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기자라는 직업이 대단한 명예를 얻거나, 돈을 벌거나, 권력을 갖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자보다 더 자유롭고, 마음먹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무엇을 위해 일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기자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와 사명을 깊이 가슴에 새겨 완수한 뒤, 비로소 직업이 갖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요즘 젊은 기자들은 사명감보다는 기자라는 직업에 만족하는 경향이 적지 않아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저 보이는 것만 취재하고, 남들 다 아는 것들만 알고 있다면 기자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일이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주고, 가려진 것들을 드러내주고,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일이 기자가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보이고 들춰낼 수 있는 법입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글공부도 많이 해야 합니다. 야구선수가 안타 하나를 치기 위해 밤새워 수천번, 수만번의 배팅 연습을 하듯, 좋은 기사 하나 쓰기 위해 단어 하나하나에 부여된 의미를 헤아려 쓰는 정성과 노력과 고민과 연구가 필요합니다. 기자는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닌, 숙명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 피가 달라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언론환경이 열악하고 고되지만, 그 속에서 사명감을 지닌 많은 기자들이 힘을 모아 좋은기사를 많이 쓴다면 스스로 열악한 환경을 깨뜨리고 기자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그리고 달려가야 합니다. 선배로서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아주 자유로운 상태에서 좋은 기사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고 싶어요. 다른 고민없이 오직 좋은 기사를 쓰는 일에 열정을 다 쏟아붓고 싶은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선 기자로 뛸 생각입니다.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말하지 못한 것들을 정리해 연재하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아직 살아계신 분들이 많아서 고민이네요(웃음). 내 삶의 마지막 소망은 기자로 현장에서 일하다 내가 만든 동양일보로 덮은 관 속에 눕는 것이죠. 기자로서 가장 멋있고 아름다운 죽음이 아닐까요.”


- 계속해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좋은 기사들을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대담/ 김홍균 편집국장
▶정리/ 김동진 부국장
▶기록/ 오상우 기자
▶사진/ 임동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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