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 김주희(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첫눈이 내렸다. 수북수북 쌓였다. 난분분 어지러이 흩어지는 것도 아니고 차리하게 사라락 사라락 내려쌓였다. 어째서일까, 첫눈이 기대나 기쁨이나 놀라움이나 만남같은 설레임 범주의 정서를 동반하는 것은. 서정주 시인은 눈 내리는 모습에서 위로를 읽어냈다. 눈이 ‘괜찮다’며 내린다고. 괜찮다니, 눈이 내려 높고 낮은 것도 두루뭉술해지는 세상에서 용서의 관대를, 관대의 이해를, 이해의 위로를 보아내다니, 그럴 수 있다니 멋지지 않은가, 시를 쓰는 일은, 더구나 이런 시를 써서 남루 너머로 위안해 내는 일은.
 어린 어느 무렵부터인지, 노래 말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원시적 분석이었을까, 노래말에 공감을 넘어 갑갑해 하거나 안타까워하거나 했는데 그 중에 토끼노래가 있었다. “ 토끼야 토끼야 산 속의 토끼야 겨울이 되며는 무얼 먹고 사느냐 흰 눈이 내리면 무얼 먹고 사느냐” 하는 노래. 아주 어렸을 때 같기도 한데 노래 말이 어린 애가 부르기에는 암담했다. 무얼 먹고 살아야 하는지, 묻는 노래 말은 난감할 만도 했겠다. 흰 눈이 쌓이면 아무 것도 먹을 게 보이지 않을 텐데 어쩌나. 거기다가 어른들은 눈 쌓인 날이면 토끼 몰이를 놀이삼아 하기도 했다. 무료한 겨울에 촌에서 할 만한 동네 운동 겸 놀이 겸이었겠지만 그러면 토끼는 어떻게 하나.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아도 그 때 그 노래말은 갑갑한 것이 사실이다. 얼마나 위기 의식을 조장하는지, 원. 뭘 먹고 살 것이냐고, 겨울이 되고 흰 눈이 내린다고, 밖에 나가도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갔다가는 죽기 십상이라고 그 위기 제시에 숨이 갑갑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노래는 그렇게 촌의 소녀를 갑갑하게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노래 말 다음 절은 염려하지 말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어도 걱정이 없단다 엄마가 아빠가 여름동안 모아논 맛있는 먹이가 얼마든지 있단다”라고. 엄마 아빠인 부모들은 토끼같은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게 모아놓는 존재들일 것이다. 얼마든지 까지가 아니라면 적어도 얼마정도라도 내놓고 보살펴 주는 그런. 토끼같은 아이들은 그 부모의 그늘에서 먹고 자고 안도하고 뒹굴며 자라나게 될 것이다. 모아놓았다니, 엄마 아빠가. 토끼에게 먹이를 모아논 엄마와 아빠가 있는게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더구나 그 먹이가 얼마든지 있다니, 어릴 때 첫 절의 갑갑함은 다음 절에서 극적으로 해소되고는 했다. 그래서 일절을 부르면서도 이절의 안도를 염두에 두면서 불렀던지.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이야기 책을 읽은 것은 또 몇 학년때을까. 토끼노래의 위기의식과는 다른 갑갑함이 또 그 이야기는 그득했다. 아이는 아버지가 없고, 엄마는 멀리 돈을 벌러갔단다. 왜 그렇게 이야기들에서 아버지들은 늘 집에 없는지. 온갖 외로움과 어려움을 견디며 기다려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아이가 마침내 찾아 나선다.  그래서 멀고 먼 거리를 지칭하는 문학적 장치일 삼 만리를 지친 몸으로 헤매 엄마 있는 곳에 당도했더니 정작 엄마는 병원도 못갈만치 궁핍한 채 앓아누워 있다. 이 대목에서 그 때 나는 갑갑함을 넘어 이야기 자체에 화를 냈던가. 그 애는 어떡해야 하나, 할 수 있는 것도 없을텐데. 아이가 먼 곳에서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이들이 엄마를 병원에 보내 병을 고치게 해주고 아이와 함께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그런 내용으로 이야기가 끝난 것으로 기억한다. 다행이다, 한숨 쉬면서 그래도 나는 다시는 이런 이야기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에. 어른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보면 또 달리 보게 되기도 할 것이다. 토끼같은 아이들, 엄마를 찾아 삼만리를 가야하는 이 사회의 아이들이 덜 절박하고 더 처참하도록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하는 어른이기 때문이다. 첫 눈조차 기쁨이 아니라 근심일만한 이들에게 괜찮다고 맛있는 먹이가 얼마든지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안도할 만한 사회인가 어떤가. 모든 집 안마다 가족들 고물고물 모여 맛난 것들 먹으며 잘 지낼만하도록 함께 애쓰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나는. 사회와 이웃 안전망을 염두에 두고 그런 이야기들을 보게 되기도 하는 독법을 익혔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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