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경의 검열에 늘 시달려야 했던 포석 조명희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민촌 이기영은 포석의 첫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에서 수십편에 달하는 가장 우수한 시편들이 일제 경찰의 무참한 검열로 시집에서 제외됐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한설야도 일제에 문학으로 저항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포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 아직 작품으로는 도저히 부르죠아 작가들과 대항할 실력이 없었다. 첫째 작품을 써대야 발표를 할 곳이 없었다. 우리들의 기관지는 왜경의 원고 검열에서 대부분이 먹혀 버려서 많은 작품을 실을 수 없었고 잡지도 압수되는 일이 많아서 그것만 가지고는 도저히 우리들의 작품을 소화할 수 없었다.

그 당시 부르죠아 작가들은 이른바 동인 잡지라는 것을 발간하여 자기 동료들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었지만 나 같은 신출내기 문학 청년에게 결코 지면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

그러나 그것은 독자들의 절대한 지지를 받아서 나오자 매진되는 형편이었으나 그것이 왜경에게는 아주 비상 같이 싫어서 압수 또는 폐간으로써 보복하려고 들었다.

이러한 박해와 아울러 우리들의 생활상의 고난도 결코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들의 기관지 또는 의무적으로 쓰는 글에는 원고료라는 것이 없었다. 부르죠아 출판물들이 약간의 원고료를 지불한댔자 생쥐 불가심할 정도의 것 밖에 더 되지 않았다.

이때 우리들 중에서 생활상의 위협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아마도 조명희 선생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남달리 많은 가족이 있었고 그 부양 능력은 오로지 조명희 선생 한 사람에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또 엎친데 덮치기로 언제나 일제 경찰과 또는 그들로 하여 빚어지는 갖갖은 박해와 파란이 멎을 날이 없이 앞뒤로 조여들었다.

조명희 선생은 언제나 이런 고달픈 수난 속에서 자기의 창작 사업을 꾸준히 계속하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후배를 키우며 고무하는 선배로서의 지도 사업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

이때 조명희 선생은 주로 시와 또는 산문으로 그야말로 좌우 양수에 예리한 무기를 들고 우리들의 선두에서 싸웠다. 나는 항상 그에게 고무되면서 보다 더 보람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나의 실력을 키우는데 노력하였다. 우리 계급 앞에 맞서는 모든 것과 싸우기 위하여 언제나 나 자신에 매를 내리면서 나 딴에는 정력적으로 썼다.

단편 소설, 수필, 문학 평론을 비롯하여 사회 평론, 국제정세 정치 경제 논평까지 썼다. 물론 이 글들의 많은 부분이 불가살이처럼 집어 삼킬줄만 아는 왜경에 의하여 잡아먹히었지만, 그러나 놈들에게 결손을 보고 말 수는 없었다. 나도 조명희 선생도 또 다른 동지들도 놈들이 먹으면 또 쓰고, 먹으면 또 쓰고 하였다.

특히 나는 나 자신이 재능에 은혜 받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보다 몇의 배 노력으로써 빈 곳을 메꾸려 하였다.

더욱 일제 경찰들이 눈깔을 까뒤집고 언제나 양을 노리는 승냥이처럼 우리들의 작품을 노리고 있는 판이라 놈들의 눈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독자들의 요구에 대답하는 작품을 쓰기 위하여 항상 세심한 용의를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 한설야, ‘정열의 시인 조명희’, 1957년 8월, ‘포석 조명희 선집’ 수록.

 

포석이 자신의 조선 최초 창작 시집 ‘봄 잔디밭 위에’의 머릿말에서 서술하고, 이기영과 한설야 등 그의 지인들이 언술한 바를 보면 그가 조선 문단에 시라는 장르에 새로운 꽃이 활짝 피어나기를 얼마나 염원했는지, 그러면서도 일제의 검열과 탄압에 또 얼마나 시달렸는지 잘 알 수 있다.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한 1924년 6월 15일에 5일 앞서 그의 장남 중락(重洛)이 태어났다. 입식구가 셋으로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쥐꼬리만한 원고료 몇 푼으로는 입성 먹성을 제대로 챙겨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가정 형편은 곤궁해질대로 곤궁해졌다.

1928년 동아일보에 투고한 수필 ‘서푼짜리 원고상 폐업’에서 고백하고 있듯, 포석은 출판사에 원고를 내주어도 고료는 들어오지 않고 출판 또한 이런저런 핑계로 차일피일 미뤄지고, 해서 “인제는 아주 서푼짜리 원고상 폐업이다”라고 선언 하고, 또 “선언하면서 이렇듯 글을 쓴다”고 자조하고 있다.

그러나,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현실에서도 포석이 지향하는 것은 소시민적 삶이 아니었다. 가족에 연연해하는 것-기실 이것이야 말로 가족을 살려나갈수 있는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의무였지만, 그것을 뒤로 두고 그가 늘 애정어린 시선을 두고 있던 것은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하층민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24년부터 서울에 올라가 있었다. 도시 근로 인민의 비참한 생활의 비하층에서 생활의 진실을 직접 체험하고 관찰하면서 날로 앙양되어 가는 근로 인민의 투쟁과 접촉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기 시의 원천을 현실생활의 기본 모순과 그에서 빚어진 인민들의 투쟁에서 찾아내게 되었다.

그러나 모순과 투쟁으로 충만된 복잡한 생활 한 폭을 표현하기에는 자기의 시 형식이 협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전에 쓴 그의 시들이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말미암아 생활을 광범하게, 그리고 사실주의적 생동성 속에서 묘사하는 것을 방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생활로 뛰어들면서 또한 뛰어들기 위하여 지난 시기의 낡은 예술적 관습을 극복하고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조명희의 자서전적 넋의 고백으로 되는 ‘생활기록의 단편’은 그가 어떻게 자기의 종교 윤리적 관념의 세계와 낡은 예술적 관습을 극복하고 참된 사실주의의 길에 들어서기 까지 회의와 동요의 고통스러운 정신적 체험과 탐구의 길에서 방황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에 대한 생생한 기록으로 된다.

- 이기영, ‘포석 조명희에 대하여’, 1957년 1월, ‘포석 조명희 선집’ 수록.

 

포석이 생활난으로 1923년 동경 유학생활을 끝내고 서울에서 정착한 것은 1924년이었다. 이 해에 서울 권농동에서 장남 중락이 태어났고, 첫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발간했다.

하지만 포석에게는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민족주의자 포석이 해야 할 일은 문학을 통한 일제에 대한 저항이었고, 민중주의자 포석이 해야 할 일은 저층민의 삶을 오롯이 이해하고 체득하여 투쟁을 통해 평등한 삶을 구현하는 일이었다.

일제의 수탈로 도시 근로 인민의 비참한 생활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기영의 진술, “도시 근로 인민의 비참한 생활의 비하층에서 생활의 진실을 직접 체험하고 관찰하면서 날로 앙양되어 가는 근로 인민의 투쟁과 접촉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기 시의 원천을 현실생활의 기본 모순과 그에서 빚어진 인민들의 투쟁에서 찾아내게 되었다”는 대목에서 우리는 1924년 포석의 삶의 편린을 찾을 수 있다.

포석은 이미 그때 ‘현장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던 것이다. 포석이 들어간 삶의 현장은 다름아닌 도시 근로 인민의 비참한 생활’이었고, 그는 그곳에서 생활의 진실을 관찰하고, 직접 체험하고, 근로 인민의 투쟁과 접촉하고, 존재론적이고 구원론적이던 자신의 시를 되돌아보며 자신의 시의 원천을 하층민의 비참한 생활과 인민들의 투쟁으로 치환(置換)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포석에게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라는 두 축의 사상적 근간에서 타파되어야 할 대상은 언제나 일본제국주의였음은 두말할 필요없다.

그래서 포석은 하층민의 생활로 뛰어들면서 지난 시기의 낡은 예술적 관습을 극복하고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포석이 그렇듯 민중 속으로의 삶으로 들어가 그들을 향한 작품을 형상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정신적 지주 막심 고리끼(41)가 있었다.

▲ 1931년 붉은광장에서 만난 스탈린과 막심 고리끼(오른쪽). 고리끼의 사망 원인이 스탈린의 유화 제스처에도 고리끼가 냉소적 반응만 보이자 제거했다는 설이 있다. 고리끼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포석 조명희에게는 ‘정신적 스승’이었다.

 

(41) 막심 고리키

 

1868년 3월 28일 출생, 1936년 6월 18일 사망.

본명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시코프.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한 민족 문학가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크게 공헌했다.

그의 작품 ‘어머니’는 소비에트 문학의 기초가 되었고, 주인공 청년 바벨은 소비에트 문학 주인공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3세 때 아버지가 콜레라로 사망하고, 니브로고로드에서 초등교육을 받다가 10세 때 어머니가 죽고 외할아버지가 파산하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 넝마주이, 구둣가게 사환, 성상화 제작 공장 노동자, 야간 경비원, 짐꾼 등 하층 노동자 생활을 했다.

16세 때 대학에서 공부하고자 카잔으로 갔으나 실패하고, 이곳에서 부두 노동자를 거쳐 제빵공 등을 하며 농촌 개혁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인민주의자 청년들을 만나 처음으로 러시아 혁명 사상을 접했다.

24세 때인 1892년 첫 단편소설 ‘마카르추드라’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이때 ‘막심 고리키(Maksim Gor’kii, 가장 고통받는 사람)’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했다.

1896년에는 귀족 출신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볼지나와 결혼했다.

1899년 폐결핵이 악화돼 남부의 휴양 도시 얄타로 가서 요양을 했는데, 이때 체호프와 우정을 나누게 된다. 체호프의 소개로 톨스토이를 만났는데, 체호프, 톨스토이, 고리키 세 사람은 문학적 성향이 달랐지만 서로의 작업과 인격을 존중했으며, 오랫동안 문학적 동지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눈다.

1900년대 초반부터 고리키는 희곡과 중장편소설로 작업을 확장했다. 장편소설 ‘어머니’는 러시아 문학사에 길이 남은 작품이다. ‘어머니’는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영웅상을 확립한 작품으로, 소비에트 문학,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전범이 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레닌을 만났는데, 두 사람은 때로 반목하고 사이가 벌어지기도 했으나 오랫동안 사상적 동맹 관계를 유지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스탈린 정권은 고리키에게 친화적 태도를 보였으나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이탈리아, 독일 등지를 전전하며 살았다. 1936년 감기가 폐렴으로 번지면서 치료 도중 혼수상태에 빠져 6월 18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 1900년 얄타에서 고리끼(오른쪽)와 체홉.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