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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통한 치유와 소통-53. 사과(謝過)가 먼저냐 용서(容恕)가 먼저냐?
문학을 통한 치유와 소통-53. 사과(謝過)가 먼저냐 용서(容恕)가 먼저냐?
  • 동양일보
  • 승인 2015.12.07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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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단편소설<벌레이야기>는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려주는 작품이다.
 
알암이(초등학교 4학년)의 돌연스런 가출이 유괴에 의한 실종임이 확실시 되자 엄마는 약국문을 닫아걸고 아들 찾는 일에 집중한다. 김 집사가 옆에서 위로하며 알암이 엄마를 지켜준다. 유괴당한 지 20일 만에 약국 근처 건물 지하 콘크리트 밑에서 알암이가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범인은 면식범이었다. 알암이가 다니던 주산학원 원장이었다.
알암이 엄마는 범인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심으로 혼절 상태에 빠졌다. 김집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알암이 엄마가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기운을 차린다. 기도회나 부흥회에도 자주 참석하며 영적인 삶으로 변해간다. 알암이의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에 열중한다. 마침내 가장 고귀한 사랑은 용서임을 깨닫는다.
원장에게 용서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교도소로 찾아간다. 원장은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하느님께 용서받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알암이 엄마는 다시 절망에 빠진다.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가 하느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게서 그것을 빼앗아가 버린 거예요. 나는 하느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예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원장은 눈과 신장을 기증하고 라디오 인터뷰까지 마치고 교수형에 처해진다. 알암이 엄마는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존엄성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양쪽 모두를 거부하는 방편으로 자살을 선택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사과가 먼저냐 용서가 먼저냐 하는 문제를 던져놓고 있다. 상처 입힌 사람이 먼저 사과하고 상처 입은 사람이 용서해주는 것이 정석일 것이다. 알암이 엄마가 용서하러 갔을 때가 원장이 사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원장은 어떤 죄도 달게 받겠다고 하였지만, 알암이 엄마가 보기에는 사과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미안해 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이 뻔뻔스럽게 보였다. 그런 태도는 알암이 엄마를 다시 절망에 빠뜨리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누구든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른 후의 태도가 문제이다. 태도는 관계회복은 물론 삶의 문제를 결정하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 잘못을 저지르고 난 다음 곧바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진심어린 마음으로 사과하는 공부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이런 교육이 꾸준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알암이 엄마가 원장을 용서해 주겠다며 원장을 찾아가는 대목은 우리를 또 하나의 문제 속으로 끌어들인다. 용서는 마음으로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상대에게 용서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이 문제의 해답은 용서의 선택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살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상처 입힌 사람이 사과를 하든 아니하든 용서를 빌든 아니하든 용서의 선택권은 순전히 상처 입힌 사람보다 상처 받은 사람 쪽에 있다. 그러므로 선택권을 가진 알암이 엄마가 그냥 마음속으로 혼자서 용서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상대방의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하는 것이 용서니까. 내가 살아야 하니까.
이 이야기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죽음으로 끝난다. 문제는 인물들이 어떻게 죽었느냐 하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장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알암이 엄마는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지엄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용서하지 못하면 자신이 지나가야 할 다리를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청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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