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 조아라 기자) ‘늘 다니던 생의 노선을 누가 바꿔 놓았을까? 새 길은 아버지에게도 낯선 모양이어서 자꾸 어둠을 끌어다 얼굴을 덮네 한 번 달리기 시작한 기차는 뒤로 가지 못하고 철길은 제 몸 열어주며 갈 길 재촉하지만 삶이 어찌 달리는 일 뿐이겠냐며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출발하는 밤기차 객차 안 불빛이 유난히 밝네 (‘밤기차를 탈 때면 추억의 칸에 앉는 버릇이 있네’)’

 

3회 충북여성문학상 수상자인 박등 시인이 최근 시집 ‘꽃핀을 꽂고’를 발간했다.

“시의 서랍을 열어 쓸 만한 게 있나 뒤적여 보”다 “서랍을 정리하는 의미로” 그동안 써온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엮었다는 박 시인. 한 때 삶의 일부를 불살라 피워냈던 지극히 소중한 시 66편을 담았다. ‘그 방에는 바다가 산다’에 이은 두 번째 시집이다.

시집 안에는 유난히 가방, 기차, 장롱, 폐가 등 내부를 지닌 사물들을 소재로 한 시가 자주 눈에 띈다. 시인은 시를 통해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자신의 내밀한 아픔과 기억을 토해낸다. 시는 어쩌면 시인에게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 ‘밤기차를 탈 때면 추억의 칸에 앉는 버릇이 있네’에서 아버지와 함께 밤기차에 탄 일곱 살 소녀는 지금 자신들의 삶이 기차처럼 덜컹거리고 있음을 어림짐작한다. 아버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은 밤보다도 더 깊어서 소녀에게 ‘밤기차 객차 안 불빛은 유난히 밝’게만 느껴진다. 뒤로 가지 못하고 갈 길을 재촉하는 기차 안에서 ‘아버지 일 금방 풀릴 거야 엄마의 말만 쥐었다 폈다’ 하는 소녀의 모습은 애잔하고 쓸쓸하다.

시 ‘쥔 여자’는 ‘만든 지 반 백 년 된 장롱’을 소재로 한다. ‘식구들이 돌아와 지친 하루를 벗어 걸거나 슬픔을 놓아두도록 가슴을 내어주는데, (중략) 이제는 낡아 때깔이 안 나는, 재질이 무언지 물러빠져 흠 많은 가구(‘쥔 여자’)’인 이 장롱은 곧 ‘쥔 여자(주인 여자)’이며, 시인 자신이다.

박 시인은 “세상과 자연에 바짝 귀 기울이고 살지는 못했지만 나는 많고 많은 시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며 “딱히 내놓을 만한 시 한 편 없이 세월을 흘려보냈지만 그래도 문학은 내게 큰 위안이고 살아가야 할 이유 중 하나”라고 밝혔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은 “박등 시인의 시들은 그 바탕에 젊음의 혈기와 대담함이 이끌었던 길에서 돌아와 장년의 언덕에서 흐르고 사라져버린 시절의 회고를 깔고 있다”며 “장년의 기분과 감정을 보여주는 박등의 시를 읽는 일은 즐겁다. 격류와 진흙을 다 흘려보내고 장년의 언덕에서 숨을 고르고 추억들을 되새기는 어조에는 회한과 그리움이 어린다”고 평했다.

박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전남대를 졸업했으며 1996년 ‘예술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충주지부장을 역임했으며 3회 충북여성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시인협회·국제펜클럽·한국문인협회 충주지부·문향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서출판 푸른나라. 119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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