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원(영동우체국장)

▲ 홍석원(영동우체국장)

필자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의 7남1녀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 슬하에서 중학교까지는 고향인 미원에서 다니고 고등학교부터는 청주에서 다녔다.
동생 어린시절 그당시는 나라가 전체적으로 보릿고개넘던 어려운 시기였지만 우리집안 역시 농사짓는 가정의 8남매 대가족이다보니 생활형편이 말이 아니였다.
그 시절엔 어리더라도 농사짓는 집안에서는 방과후나 휴일이면 요즘 어린이들 같이 학원다니고 공부하는게 아니라 그날 그날 밭도매고 소풀도 베며 농사일을 거드는게 일상이었다.
시골마을에서 생활수준은 그래도 좀 낫다고 했지만 8남매이다보니 먹고 입는게 오히려 남들보다 못했고 일은 더 많이 하면서 힘들게 자랐다.
옷은 그 시절엔 대부분 가정이 그러했듯이 위에 형들이 입던거 밑으로 내려가며 입는걸 당연시하며 생활했는데 요즘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옷의 용도가 지금처럼 멋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고 몸을 가릴 수 있고 체온을 보호해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필자와는 바로위에 형이다 보니 동생이 많이 따랐고 유년시절을 함께하면서 자랐는데 동생은 어릴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어릴 적 선친께서 하신말씀중에 막내는 항시 뭐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 이다음 공부를 잘할거 같다고 하신게 지금도 생생하다.
동생이 성장해서 조카들 모아놓고 하는말이 ‘내가 왜 공부를 열심히 했냐면은 어릴적 까마득하게 긴 밭매는게 힘들고 싫어서 악착같이 공부했다’고 하는걸 엿들은 적이 있다.
고등학교부터는 형님네 댁에서 다녔는데 필자가 군복무중 휴가때 들르니 형수님이 한 걱정을 하시며 ‘데리고 있는 형은 이야기하기 곤란하니 필자보고 동생 야단을 좀 치라’고 당부하신적이 있다.
내용인즉 동생은 그당시 고3이였는데 밤에 친구들이 불러 나가면 새벽에 들어오는 등 공부를 등한시한다는 취지였다.
필자 생각에도 고3이면 제일 중요한 시기인데 그러면 큰일이다 싶어 혼을 낼 구실을 찾다가 학생은 뭐니뭐니해도 성적표가 우선였다.
성적표를 보자고 하니까 마침 집에 있어 갖고 왔는데 보는 순간 형으로서 할말을 잃고 말았다.
반에서는 계속 1등이고 전교 3위안에 들고 있으니 야단치려 한 것이 오히려 무안하기도 하고 대견스러워 잘했다고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형수님에게 말씀드리기를 공부 열심히 해가면서 머리도 식힐겸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으시라고 위로해 드린 기억이 있다.
그러다 대학을 갔는데 그 당시 시행하던 예비고사 성적을 우수하게 맞고도 부모님의 가정 형편상 지방대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의 평생 운명을 결정한 획기적 상황은 군 복무 제대 후 대학교 3학년 어느날 일어나 오늘에 이르렀다.
그날은 일요일로 매년 시행해오던 연례행사로서 온가족이 모여 일가친척과 동네사람을 모시고 아버지 생신잔치를 하는날인데 막내가 보이지 않으니 사단이 났다.
형님들과 필자는 화가 나고 괘씸하게 생각하던 차에 오후 늦게 동생이 오길래 다들 한마디씩 훈계를 하였다.
그러자 동생은 ‘일이 있었다’고만 하며 변명이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지 않고 말없이 꾸중을 들었다.
그러다 두달여 후 집안에 예기치 못했던 경사가 났다.
동생이 외무 7급시험 합격자 10명 중 충청권에서 유일하게 합격을 하였다.
그러고는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동생이 말하기를 ‘사실 아버지 생신잔칫날이 시험일이라서 시험보고 오느냐고 늦었다’고 웃으며 이야기 하니 모두들 그때를 되새기며 동생의 장한 속마음을 읽고 감탄하였다.
대학졸업 후 동기들보다 1년 늦게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여러나라 근무를 거쳐 이번에 중미의 니카라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동안 동생을 보면서 외교관의 길은 그리 쉽고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사실과 누구보다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이 요구된다고 판단된다.
우선 이나라 저나라를 옮겨 다녀야하니 여러 가지 환경 적응에 어려움이 있고 일가친척과 자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과 특히 건강과 자녀 교육에 애로가 많이 있다.
조카들이 중고교시절 외국에 있다 국내에 오면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교갔다오면은 혼자 울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들 걱정을 많이 하였다.
어머니께서 작고하시기직전 병상에 누워계실 때 일시 귀국했다가 헤어지며 눈물로 이승을 떠나는 어머니와 마지막 모자간 애절하게 생이별하던 모습은 온가족을 울음바다로 만들었고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눈물을 흐르게 한다.
필자의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동생은 이러한 어렵고 긴 여정속에 이번에 대사로 임명되는 국가의 명을 받았다.
부디 지금까지 잘 해온대로 니카라과에 가서 우리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증진시키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대한의 아들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올 것을 가족의 명의로 명하며 모두가 힘모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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