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카프결성 주도… 중앙위원 선출돼 맹활약

▲ 1925년 결성되었다가 1935년 해체된 카프에 가담해 활동을 펼쳤던 문인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막심 고리끼는 1868년 3월 28일 출생해 1936년 6월 18일 사망했다.

포석과 출생년도가 28년 차이가 나는데, 고리끼가 사망한 1936년은 소련작가동맹 맹원인 포석이 하바로프스크 ‘작가의 집’에 거주하면서 그의 문학과 삶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고리끼가 사망한(일설에는 스탈린에 의해 독살됐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이듬해인 1937년 9월 18일 포석은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KGB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었고, 2년 뒤인 1938년 5월 11일 총살형을 당하게 된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가정적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것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실현을 위해 온 정열을 바쳤다는 것, 러시아에서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으며 화려한 삶의 후반부를 장식하다가 스탈린에 의해 제거 되었다는 점(고리끼의 사망설에는 다소 이견이 있지만) 등을 보면 막심 고리끼와 포석 조명희의 삶과 죽음의 궤적이 묘하게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러시아 문학의 전범(典範)으로 읽히는 ‘어머니’의 작가 막심 고리끼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문명을 떨치다 살다간 모습과 러시아 한인문학의 시조로 불리며 고리끼의 사상을 좇아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던 포석의 삶과 죽음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포석처럼, 고리끼 또한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각지를 떠돌며 온갖 막일로 목숨을 연명했던 불우한 시절이 있었다. 제화점 보조원, 성상화가(聖像畵家) 심부름꾼, 볼가강 기선의 접시닦이에 제빵공, 부두노동자, 야간 경비원 등을 전전했던 고리끼에게 그 거칠고 험하기 그지없던 자신의 삶이 오롯이 자신의 작품으로 녹아들었던 것처럼 포석 또한 이기영의 술회처럼 “1924년 도시 근로 인민의 비참한 생활의 비하층에서 생활의 진실을 직접 체험하고 관찰하면서 날로 앙양되어 가는 근로 인민의 투쟁과 접촉하기 시작하자, 그는 자기 시의 원천을 현실생활의 기본 모순과 그에서 빚어진 인민들의 투쟁에서 찾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기영이 고리끼의 영향을 받은 포석에 대해 말하고 있는 다음 대목은 주의 깊게 살펴볼만 하다.

 

그가 고백한 바와 같이 고통스러운 탐구의 길에서 처음에는 여전히 시인의 고독하고 협착한 세계에서 뛰어나오기를 겁내 하였었다. 생활의 고난과 기아와 부딪칠 때 아마 그는 생활로부터 ‘시’를 막아내려고 발버둥쳤다. 그를 ‘시’의 세계로부터 현실로 이끌어낸 것은 엄혹한 선생인 생활 자체였다. ‘사실주의와 현실에 부닥치고, 뚫고 나가자!’고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의 기나긴 정신적 방황이 지평선 위에 사상의 기초를 쌓자고 건의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그의 표현에 의하면 ‘고리끼류의 사실주의’를 택하기에 이르렀다. 고리끼의 작품이 조선의 진보적 작가들과 인테리 속에서 창작상 지침과 사고의 영감으로써 열광적으로 읽히기 시작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벌써 조명희는 인간과 생활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계에 있어서 고리끼를 뒤쫓았다. 그리고 이러한 전변은 고리끼의 프롤레타리아적 인도주의 사상과의 그의 상봉으로 말미암아, 또 이 상봉을 창조적 탐구의 길을 멈추지 않는 한 사람의 시인에게 필연적인 것으로 되게 하였다. 그것은 조선 현실의 진변-즉 노동 계급의 혁명적 투쟁의 급격한 앙양으로 말미암아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실례로 그의 시 ‘인간 초상찬(人間肖像讚)’에서 인간에 대한 이상을 종교 윤리적 관념을 통하여 ‘시의 모델’로 표현하였으며 그것을 또 ‘사람들아- 엎드릴지어다. 이 영원성 앞에…’라고 호소하면서 현실의 인간과 대립시켰다면 고리끼의 프롤레타리아적 인도주의와 상봉한 후에 와서는 ‘보라! 인간이 이 같이 장엄 신비한 세계를 머리에 이고 산더미 같은 고통의 짐을 등에 지고 태연히 서서 영원한 신음 가운데에도 환희의 소리를 부르짖음을!’(집없는 나그네 무리, 1924년 3호 개벽) 하고 호소하였다. 현실적 인간-그 자체와 그의 역사 창조에 있어서의 고통과 두려움을 모르는 낙관주의가 소리 높이 울리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이기영, ‘포석 조명희에 대하여’, 1957년 1월, ‘포석 조명희 선집’ 수록.

 

포석은 1925년 2월 1일 자신의 첫 단편소설인 ‘땅 속으로’를 개벽 56호와 57호에 발표한다. 이 즈음 포석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단체의 구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22년 9월께 이호, 김두수, 이적효, 송영 등에 의해 결성된 염군사(焰群社)는 낭만적·퇴폐적 문학에 대한 비판과 문학의 계급성에 대한 인식을 기초로 했지만 큰 성과없이 초보적 단계에 머물렀다.

1923년 김기진, 박영희, 김복진, 이상화, 김형원, 이익상 등이 참여해 결성한 파스큘라(PASKYULA) 역시 그 활동이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포석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일제 강점기하에서 압제에 대한 투쟁의 방식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대한 고민이었다. 선결적인 전제가 포석에게는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양상에서의 민족주의 고취였고, 두 번째는 압제에 신음하는 민중들의 삶에 투쟁정신을 고양시키는 민중주의의 실현이었다. 그런 까닭에 포석에게 있어 문학은 투쟁의 도구화와 무기화로 환치될 수밖에 없었다.

포석은 이기영과 한설야, 최서해 등 뜻이 맞는 동지들과, 기존의 파스큘라 멤버 일부를 규합했다. 그리고 1925년 8월 카프(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결성했다.

 

카프는 에스토란토어에서 따온 것으로 3.1운동 이후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을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인식한 문인들이 문학 또한 프롤레타리아 해방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문예운동단체였다.

1920년대 중반까지 여러 단체로 분리되어 있던 사회주의운동단체는 1926년 11월 ‘정우회 선언’을 기점으로 방향전환론이 전개됐다.

그리고 1927년 9월 총회에서 “우리는 무산계급운동의 일부분인 무산계급 예술운동으로써 봉건적 및 자본주의적 관념의 철저한 배격, 전제적 세력과의 항쟁, 의식적 조성운동의 수행을 기한다”는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게 된다. 이러한 카프의 ‘방향전환’은 과거 막연한 민중주의로부터 벗어나 노동자게습의 당파성에 대한 인식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조직 또한 새롭고 견고하게 짜나갔다. 중앙위원회 아래 서무부, 조직부, 교양부, 출판부, 조사부 등을 두었고, 조명희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돼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이때 포석과 함께 카프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이는 한설야와 김복진, 박영희, 최서해, 윤기정, 이북만, 조중곤, 한식, 홍효민 등이 있다. 대중적 조직화를 위해 카프는 외연을 넓히는 작업도 병행했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도쿄와 개성, 수원, 해주, 평양, 간도, 임실, 남원 등지에 지부를 두었다.

그러나 카프 맹원들간의 반목과 1931년 영화 ‘지하촌’ 사건으로 인한 일제의 1차검거, 1934년 카프 연극단체인 ‘신건설’의 전단을 가진 학생이 금산에서 발각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2차 검거 등으로 인해 1935년 5월 주도 세력이었던 임화와 김남천이 경기도 경찰국에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10년에 걸친 카프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됐다.

 

포석이 카프 맹원으로 활동했던 기간은 1925년부터 1928년까지 3년이라는 매우 짧은 기간이었다. 1928년 8월 21일, 점점 더 옥죄오던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우던 포석이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3년 동안 포석은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소설 ‘낙동강’을 발표하는 등 큰 활약을 펼친다.

1926년 1월 카프의 준기관지로 발간된 ‘문예운동’에 발표된 김기진의 ‘본능의 복수(復讐)’, 이익상의 ‘위협의 채찍’, 이기영의 ‘쥐 이야기’, ‘팔아먹은 딸’, 최학송의 ‘의사(醫師)’ 등은 아직 경향문학의 자연발생적 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1927년 자체 내의 이론 투쟁을 거쳐 박영희의 ‘문예운동의 방향’이 발표된 이후 목적의식기의 프로문학운동은 그 이론과 함께 작품에도 방향 전환이 반영되었다.

프로문학의 이러한 전환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조명희의 ‘낙동강(洛東江)’이었다.

‘낙동강’은 신경향파문학(42) 제2기의 작품으로, 종전의 신경향파 문학이 빈궁에 항거하는 반항적인 특색이 자연발생적인 데 비해, 포석의 ‘낙동강’은 그 빈궁의 원인을 민족적·계급적 사정과 환경으로 제시했다는 데 큰 특징이 있다. 즉 ‘낙동강’에서 포석은 낙동강변의 빈궁한 주민의 생활이 자본계급과 일제의 수탈에 의한 것이라 보고, 자각적인 계급의식에 의한 반항을 시도했던 것이다.

 

(42) 신경향파문학(新傾向派文學)

1920년대초 백조파의 감상적 낭만주의, 창조파의 자연주의 등 이전의 문학 경향을 부정 혹은 발전시킨 사회주의 경향의 새로운 문학이다.

1920년대 한국 문단에서 유행어가 되었던 ‘신경향파문학’은 일정한 ‘신념·주의·이상·사조 등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경향문학’이라는 용어는 ‘사회주의사상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쓰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20년대 전반기의 한국 문단에 ‘경향’이란 용어를 처음 소개하였던 박영희(朴英熙)는 ‘경향문학’보다 ‘신경향파문학’이란 용어를 자주 썼다.

그는 신경향파문학이란 말을 사회주의 색채를 띤 문학이라는 뜻과 신흥 문학, 신사조(新思潮)의 문학이라는 뜻을 섞어서 사용하였다.

한국 문학사에서 경향문학은 대략 두 가지 관점에서 처리되어 왔다.

그 첫번째 관점은 박영희에 의해서 시작되고 백철에 의하여 굳어진 것으로, 경향문학을 이른바 프로문학의 예비 단계로 처리하는 태도이다. 사실상 이 관점은 지금까지도 거의 수정되지 않은 채 국문학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공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영희는 당시 여러 편의 평론을 통하여 ‘자연생장적(自然生長的)’인 신경향파문학은 ‘목적의식적’인 무산자문학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신경향파문학은 빈궁과 고뇌의 생활상을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그려내는 것이며, 무산자문학은 빈궁과 고뇌의 생활 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투쟁 의식과 반항 의식을 심어주려는 목적을 분명하게 지녔던 것이다.

또 하나의 관점은 경향문학을 아예 프로문학의 대명사나 동의어로 보자는 태도이다. 경향문학과 프로문학 사이의 구분은 이론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나 실제 작품을 통하여 볼 때 그러한 구분은 쉽지 않다.

경향문학의 활동은 특히 평론 분야와 소설 부문에서 많이 전개되었다.

경향소설의 주요 작가와 작품으로는 최서해의 ‘고국’, 박영희의 ‘지옥순’ 김기진의 ‘붉은 쥐’, 이기영의 ‘가난한 사람들’, 조명희의 ‘낙동강’, 주요섭 ‘인력거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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