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옥

시원한 동치미 국물이 없었더라면

겨울 여신의 희고 몽툭한 종아리가 영감처럼

퍼뜩 떠오르지 않었더라면

아무 생각 없던 아내를 꼬드겨 육거리 시장에 가서

쪽파 갓 마늘 삭힌 고추 무를 사다가

영혼을 톡 쏘는 초정약수를 퍼붓지 않았더라면

투명하게 익어가던 열망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마음까지 혹독하게 추웠던 이 겨울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새벽공기처럼 청량한 동치미 무를 썰어

아삭아삭 소리 내어 씹어 먹지 않았더라면

북극 오로라처럼 영롱하게 익은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켜지 않았더라면

분수처럼 쏟아지는 기쁨의 쪽파를 곁들이지 않았더라면

삭힌 고추를 깨물며 속울음을 토해내지 않았더라면

소소한 행복의 트라이앵글이 형성되지 않았을 테고,

피폐해진 불신의 매듭은 더 꼬여 갔을 테고,

꽉 막힌 시국에 숨이 더 막혀 갔을 테고,

통일기차를 기다리다 지친 실향민의 낡은 시계처럼

쉴 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오다

직장에서 옷 벗고 나온, 나이 옷십 줄에 접어든

한 가장의 무거운 어깨는,

봉인된 가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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