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행 : 김태창(83) 전 일본 장래세대종합연구소장, 전 충북대 교수

● 토론

이승우(86) 한국위기문화연구회 회장, 도서출판 ‘바둑과문화’ 대표, 수필가.

유성종(85) 전 충북도교육감, 전 꽃동네대 총장.

야마모토 교시(山本 恭司·YAMAMOTO KYOSHI·69) ㈜오피스21 대표, 미래공창신문(未來共創新聞) 편집장.

가마다 도오지(鎌田 東二·KAMATA TOJI·65) 일본 교토대 교수, 신도학(神道學) 박사.

 

● 때 : 2015년 12월 7일

● 곳 : 청주 명관한정식

● 기록 : 조아라 취재부 차장

 

잃었던 빛을 되찾은 환희의 그 날, ‘광복’을 맞은 지 올해로 71주년이다. 그러나 조국을 잃어야했던 이들은 나라를 되찾은 지 70년을 넘어선 2016년 현재에도 당시의 상처를 주홍글씨처럼 선연하게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지난해에는 이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많은 기념사업들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는 여전히 전쟁을 겪어야 했던 세대의 아픔에 크게 공감하지 못한 채 물과 기름처럼 떠돌고 있다. 특히 일본의 많은 전후세대들은 역사를 감추기에 급급한 일본 정부에 의해 전쟁의 참상과 폐해를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동양일보는 지난해 말 기획해 실시한 한국과 일본 지성인 5명의 좌담을 신년 특집으로 지면에 싣는다. 이날 한국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세계 2차 대전을 겪은 전쟁세대들은 일본 전후세대의 양심적인 지성인들에게 패망 직전 일본의 단말마적인 폭거와 수탈, 강제동원의 참상을 들려줬다.

이날 좌담에는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서 열린 퇴계학 구제학술회의 참가 차 한국을 찾은 야마모토 교시 대표와 가마다 도오지 교수, 이승우 회장, 유성종 전 총장, 김태창 전 연구소장이 참석했다. 특히 야마모토 교시 대표는 이번 학술회의에서 퇴계학이 일본에서 관학(官學)이었다는 종래의 통념을 반박하고 퇴계 선생의 평생 선비로 일관한 모습과 처신에 입각해 민학(民學)이라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해 크게 주목 받기도 했다.

당시 참석자들의 대화는 일본어로 이루어졌으며 녹취 후 유성종 전 총장의 통역으로 한국어로 기록했다.

 

▷김태창 전 일본 장래세대종합연구소장 “오늘 이 자리는 한국인으로서 2차 대전을 경험한 세대들과 일본의 전후세대들이 마주 앉아서, 솔직하고 양심적인 대화를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바로 이해하고 반성하고 교감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함께 만들기 위한 뜻으로 만든 것입니다. 서로 기탄없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회장의 바둑에 관한 경력과 지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돼 자연스럽게 일본과 중국의 바둑문화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고 일본의 고대문화와 현대문화가 한국의 문화와 이어지는 지점으로 내용이 전환됐다. 이들은 서로 준비해 온 선물(야마모토 대표의 일본 과자, 유성종 전 총장의 직지 영인본)을 주고받기도 했다.

 

▷김 전 연구소장 “이 선배는 일본 2차 대전 말기의 성장과정이 어땠습니까?”

 

 

▷이승우 한국위기문화연구회 회장 “저는 1942년까지 당시의 국민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입학하고 참으로 철저한 일본제국주의 교육을 받아서 거의 일본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일본의 교육의 효과라 할까 생각과 행동이 일본 신민이 다 되었던 꼴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절대로 이 전쟁에 지지 않고, 태평양의 여러 섬이 미군에 의해서 점령되고 설사 오키나와를 거쳐 본토에 침공해 오더라도 일본은 결코 지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었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참으로 예상하지 못한 놀라움이었습니다. 그 당시 청주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제가 받은 교육과 일본이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베푼, 엄격히 얘기하면 강요한 것입니다만, 교육의 효과로 일본사람이 다 된 그런 상태에서 일본이 전쟁에 진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던 것이지요. 일본은 꼭 이긴다고 끝까지 선전했고 모든 국민을 그렇게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믿었었습니다. 전쟁 말기에 30~40대의 일본인 교사 중에서 군인으로 응소한 분들이 많았고, 음악시간에는 고전 명곡보다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친다’ 따위의 군가를 가르치고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라 할 만큼 교내에서도 이른바 성전(聖戰) 완수라는 분위기가 늘 가득 차 있었습니다.”

 

 

▷유성종 전 꽃동네대 총장 “저는 종전을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 겪었습니다. 이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초등학교부터 황국신민으로서 천황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교육받았고 그렇게 되뇌면서 자랐습니다. 모든 국민에게 ‘황국신민의 맹세’라는 것을 외우게 하고 국경절과 경축일에는 천황의 친영(親影·임금의 사진)을 모시고 배례하고 칙어(勅語)나 조서(詔書)를 낭독하는 방법으로 황국신민 만들기를 철저히 획책했습니다. 제가 교육자로서 살아온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곧 일본의 군국주의가 얼마나 혹독하고 치밀하게 국민을 기만하고 괴롭혔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회장 “그렇게 얘기하니까 이제 와 보면 참으로 혹독했지요. 우선 학생의 근로동원을 생각나게 합니다. 전쟁 말기에 수업은 뒷전으로 하고 거의 매일 근로동원에 나갔지요. 아래 학년들은 청주 수동 대한불교수도원 자리에 청주신사가 있었는데 거기 땅굴을 파는데 동원됐고 상급 학생들은 집단적으로 군수공장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또는 초평저수지를 만드는 수리사업에까지 동원됐습니다. 나중에는 군용 기름의 보충 자료인 솔뿌리(松根)를 캐는 데 동원되는 일이 거의 일상적이었습니다.”

 

▷유 전 총장 “이 선배의 말씀은 약과예요. 저는 청주 주성초등학교(당시 청주 영정(榮町)국민학교)를 거쳐 청주상업학교에 갔는데, 그 국민학교가 한국 최고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모범학교였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 보리 베기 나가고 3학년 때 모심기 나가고 4학년 때부터는 여름에 퇴비 증산이라 해서 등교 때마다 큰 다발의 풀더미를 메고 나갔고 수업시간에는 솔뿌리를 캐는 데 동원됐습니다. 일본의 궁내성(宮內省) 시종(侍從)이 조선을 시찰하러 왔을 때 전국에서 두 군데 학교를 보였는데, 지방에서는 영정학교를 시찰할 정도였지요. 우리가 그 영정학교에서 겪은 것은 이 선배가 중학교에서 겪은 것과 비슷했습니다. 2학년 때부터 조선어 독본을 거둬가고 온전히 조선말을 못 쓰게 했어요. 누군가 조선말을 한 번 쓰면 선생님이 나오라고 해서 손을 벌리라 하고 손바닥을 내밀면 엎으라고 하여 선생님의 엄지 손가락만한 굵기의 매채로 손가락을 매우 쳤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어린이들의 손가락이 남아나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언어를 뺏고 나중에는 식량 배급을 받을 때 일본어를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배급도 제대로 안주는 그런 무서운 강요정치를 했습니다.”

 

▷이 회장 “그렇지요.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습니다. 역시 똑같이 조선어 독본을 거둬가고 참으로 철저하게 언어 말살 정책을 펴 나갔습니다. 그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2학년 때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본사람이 말하는 종전 때까지 계속된 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고 우리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식 성으로 고치게 하는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저희는 00이라고 하였는데, 유 선생네는 어떻게 했던가요?”

 

▷유 전 총장 “저는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할 수 없이 응하되 그래도 뿌리는 남겨두어야 되겠다고 김(金)씨라면 금본(金本·김씨가 본이라는 뜻), 김촌(金村), 금성(金城) 이런 식으로 자신의 본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만을 참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앞에 말씀드렸던 언어말살과 한국 사람들한테 강했던 민족관념에서 그것을 송두리째 없애려했던 것입니다. 더욱 심한 것을 제가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5·6학년을 이어 담임한 선생님은 체육시간은 물론이고 음악 미술 시간에, 어느 때는 당신의 마음 내키는 대로, 학생들에게 웃통 벗고 목검을 가지고 운동장에 모이라고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미영 격멸(米英擊滅)!’을 외치면서 목검을 휘두르는 것만 가르쳤지요. 졸업 전 제자의 중학교 진학 지원서를 써주지 않는 선생님이 있다면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희 일본인 담임선생님은 제 반의 동급생들한테 입학지원서를 써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항공창(航空廠·진해에 있던 비행기 공장)에 가라. 소년항공병 가라. 예과련(豫科練)에 가라고 강요했습니다. 그것들은 곧 인간소모품이 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양성기관이 아닙니까.

그리고 일상생활의 문제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이른바 공출(供出)이라 하여 지은 농사의 거의 전부를 앗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부자들은 더러 남는 것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가난한 소작농들은 먹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겨울을 간신히 나고 봄이 되면 새로 돋아나는 풀뿌리를 캐고 물기가 오른 나무껍질을 벗겨서 삶아먹고 곡기도 없는 국물만 먹고 연명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 이북에서 겪고 있는 식량난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때 겪었습니다. 요새 보릿고개라는 말을 우리는 더러 씁니다만 그때 우리는 그것을 정말 뼈저리게 맛본 겁니다. 심한 예를 하나 들까요. 우리 조상들은 제사 올리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었는데 그 제사 쌀을 감춰둘 데가 없어서 변소에 작은 항아리를 묻고 제사 쌀을 감춰두기도 했습니다. 설마하니 변소는 더러운 데라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도시에서 배급제도가 생기고 극히 적은 양의 식량을 배급했지만 전쟁 말기에는 만주 땅에서 거름도 못하는 썩은 콩깨묵을 식량이라고 배급하기도 했습니다. 콩깨묵은 본래 거름으로 쓰던 것인데 쌓아 두어서 새까맣게 썩은 것을 사람이 먹으라고 배급했으니 그 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김 전 연구소장 “학교제도, 배급제도, 직장 등의 차별도 심했던 것 같았는데요?”

 

▷이 회장 “식량배급제도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차별적 등급이 아주 심했고, 조선인 사이에도 또한 달랐고, 지역에 따라 다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식량의 종류와 수량에서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는 적은 양의 밥, 점심은 거르고 저녁은 죽을 먹기는 했지만 유 총장이 말한 그 정도까지는 경험하지 않았어요.”

 

▷유 전 총장 “이 선배님은 부모님의 사회적인 신분이 높으셔서 도시의 차등 배급의 혜택을 누린 것입니다. 귀족이셨지요.” (모두 웃음)

 

▷이 회장 “그래. 우리 아버지께서는 금융조합의 간부셨으니까 좀 나은 대접을 받았지요. 그리고 학교 제도는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일본사람의 자녀만 다니는 학교가 서울만이 아니라 청주에도 있었습니다. 청주중학교(5년제·갑종중학교)는 남자중학교였는데, 청주제2중학교(4년제·을종중학교)가 생겨 일인 학생을 수용한 뒤에는 조선인 학생만의 학교가 되었습니다. 또 청주제일여자중학교(4년제)는 일본인만의 학교, 청주제2여자중학교(4년제)는 조선인만의 학교였습니다.”

 

▷유 전 총장 “정신대 문제도 저는 제 집안에서 겪었습니다. 청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제가 휴일에 집에 왔더니, 마당에 어떤 젊은이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눈초리로 집에 들어서는 저를 보고 어머니가 나오시면서 “얘야, 인사해라”하시는 겁니다. “누군데요?”하고 물으니 제 매부라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의아해하는 저에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네 누나가 정신대에 끌려갈까봐 갑자기 이웃마을의 청년을 구해서 찬물 떠놓고 혼인행례를 했단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지만 저는 하나밖에 없는 집안의 외아들인데 저도 모르는 매부가 생기고 누나는 시집을 갔습니다. 이것이 정신대 그리고 나아가 종군위안부 문제의 실태입니다.”

 

▷이 회장 “정신대는 남녀 할 것 없이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진해의 항공창이 있었는데 거기 가서 일한 사람도 있고, 병원에 가서 일한 사람도 있고요. 남자들은 징용(徵用)이라고 하여 군수물자를 만든다거나 운반한다거나 탄광에서 일한다거나 하는 필요로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사할린 동포의 문제고 심심찮게 거론되는 일본의 새 역사문서 발굴의 충격적인 보도 내용이기도 합니다.”

 

▷유 전 총장 “종군위안부 문제에서 저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수상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솔직하게 “미안하다, 죄송하다”라고 못하는 겁니까. 저는 그가 외조부(기시 전 수상·岸信介)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겪은 정신대 문제는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군 위안부 문제로까지 번져서 나이 든 부모들은 거의 다 알고 있었고, 그것을 피하고자 우리 누님처럼 밤에 혼례를 올리는 그런 일을 여러 집안에서 치렀는데, 아베상이나 일본의 몇몇 지도자들이 부인한다고 숨겨지는 일입니까. 우리는 새삼스레 배상을 가지고 외교적 다툼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이 인도적으로 정직하고 솔직하게 시인하고, 국제무대에서 고개 들고 선진국 행세하기를 바랍니다.

아까 제가 드린 직지 영인본도 (다시 들어 보이면서) ‘하권’밖에 못 찾았습니다. 이것은 세계 최고(最古)의 기록문화재로서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입니다. 저는 2000년에 ‘세계인쇄출판박람회’의 조직위원장을 맡았었는데, ‘직지’의 ‘상권’이 일본에 있다는 비공식적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그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상권을 갖고 계신 분이 그것을 천하에 공개하고 ‘상권’ 여기에 있다고 하면 그분은 세계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명예와 부를 누리고, 직지는 ‘상·하’의 짝을 갖춘 문화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할 뿐이지 돌려달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새삼스레 위안부 문제의 배상에 매달리는 정도의 치사한 나라가 아닙니다. 훨씬 부자이고 마음이 넉넉한 나라입니다.”

 

▷이 회장 “그 다음에 징용에 더해서 징병 제도가 실시되었습니다. 이것은 처음에 지원병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전문대학의 학도병으로, 그리고 온 조선의 젊은이에게 징병제도로 확대돼 나갔습니다. 그 인력 동원을 위해 5년제(갑종) 중학교의 졸업을 1년을 단축해 4년 졸업으로 하여, 그 시작 첫해는 4학년과 5학년이 함께 졸업하기도 했습니다.”

 

▷유 전 총장 “저희 아버지는 별로 공부를 한 분도 아닌 일개 농민이었습니다만, 제가 6학년 때 “일본은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조선과 동양의 사상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정권이나 정치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라는 걸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그렇게 강성하고 천하무적이라고 했던 일본군, 그 중에서도 세상에 자랑하던 관동군(關東軍·만주에 주둔했던 일본육군)의 한 중대가 이동 중에 일시적으로 학교에 주둔한 일이 있었는데, 한 병졸이 (당시 식량 증산을 위해 운동장의 구석구석 마다 농작물을 심었음.) 우리가 솎아 내버린 무 뿌리를 집어 대충 흙을 훑은 채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옆에 있는 전우가 그것을 말리면서 속을 버린다고 하니까 체념 어린 표정으로 “괜찮다. 죽어도 좋다”라고 내뱉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일본군도 이런 정도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에 패망하기 직전의 일본군 사기 저하의 한 면을 본 것입니다.”

 

▷이 회장 “그 당시 조선총독(總督)은 상당히 주요인물들이 와서 나중에 총리대신(수상(首相))이 되기도 했는데, 그들이 내건 구호가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시동인(一視同仁)이었습니다. 내선일체는 내지(內地) 곧 일본 본토와 조선은 한 몸이라는 것이고, 일시동인은 그들의 천황은 국민을 한 눈으로 같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호는 사실에 있어서 그렇지 않았다는 반증이었습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은 참으로 심했고,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역겨운 것이었습니다.”

 

▷유 전 총장 “일본인이 우리를 얼마나 천시하였는가는 먹는 음식에서조차 그랬습니다. 김치 먹는 것을 야만이라 욕하고 막걸리 마시는 것을 추하다고 천시하였으니까요. 식량배급, 의류배급 그리고 모든 민생 상황에서 일본인은 귀족처럼 늘 조선인의 상위에 있었고 우선 대접을 받았으며, 조선인이 관청에 출입한다는 것은 외경(畏敬)과 공포의 그것뿐이었습니다. 일본인 관리는 관존민비의 모본(模本)으로 철저하게 위압적이어서, 어린이가 울면 달래는 말이 “순사(순경) 온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내선일체는 정신대와 징용, 학병과 징병 등의 강제동원과 조선어 사용금지와 창씨개명 등 민족말살에 쓰인 전략적 용어였고, 일시동인은 그것들을 무마하는 감언이설이었습니다.”

 

▷이 회장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종전으로 맺을까요? 당시 중학교 2학년생으로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참으로 청천 벽력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일본 선생님들이 주저앉아 통곡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고, 도망치듯 인사도 없이 사라진 일본인들의 양상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베푼 악정의 보복을 두려워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유 전 총장 “저는 8월 15일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 아주 선명하고 깨끗한 한 교육자의 떠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의 교장선생님은 칙임(勅任)의 고등관 훈 몇 등의 훈격(勳格)이 매우 높은 조선에 잘 알려진 메구로(目黑紫樓)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8월 16일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여러분의 해방과 독립을 축하한다. 새나라 건설에 많은 일꾼이 필요할 것이니, 분발해 조국에 이바지하는 인물이 되기를 바란다. 조선의 융성을 빈다” 말하고 떠나갔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교육자였고, 당당하고 깨끗한 뒷모습이었습니다.”

 

▷김 전 연구소장 “저는 여기서 일본의 2차 대전의 종전에 관련한 비화 하나를 상기하고 싶습니다. 일본의 지성인 중에서 역사상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긍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있고, 이른바 전범(戰犯)의 후손들이 전후(戰後)에 살아온 모습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결단케 한 사람, 스즈키 총리(鈴木貫太郞 總理)와 함께 군부의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천황의 종전 결단, 일본이 말하는 ‘천황(天皇)의 성단(聖斷)’을 이끌어낸 사람이 한국계의 토오고 요시노리 외무상(東鄕茂德)이라는 사실입니다. 1억 국민이 옥쇄하더라도 전쟁을 수행한다는 광적인 군부에 맞서서, 국민이 살아남아야 나라가 유지된다면서 고군분투한 지성(知性) 중의 지성, 지사(志士) 중의 지사, 위인(偉人) 중의 위인이 바로 토오고 외상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인이 될 수 없어서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용기로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였고, 정치를 안 하려고 외교관으로 일관해 씨알의 혼을 잇고 이루어 성공했습니다. 육군 출신의 아난 육군상은 끝까지 전쟁수행을 역설하는 편이었지만, 천황의 결단으로 무조건 항복 수락을 결의하고서, 그날 밤에 토오고 외상을 관저로 찾아가 그 진정과 애국심과 인격을 존경, 찬양하고 이튿날 자결하였다는 실화를 남겼습니다.”

 

 

▷가마다 도오지 일본 교토대 교수 “저는 토오고 외상의 자손들을 몇 알고 있습니다. 언론계의 중진에 미국의 고급관료 등으로 개방적인 가정이었는데 그 아들은 역시 외교관을 하여 주미대사를 한 후미히꼬(文彦)이고, 그 손자는 가즈히꼬(和彦)로 네덜란드 대사를 했습니다. 묘한 것은 3대가 모두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지 않아서, 모두가 외교관과 일본 여성을 거부한 부조의 뜻을 잘 이어가고 있는 집안이 되어 있습니다.”

 

▷김 전 연구소장 “그리고 민예(民藝)로 한국을 발견하고 그것에 심취했던 야나기 무네노리(柳宗悅)라든가, 시인으로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박열(朴烈) 선생을 열렬히 사랑하고, 평생을 일본의 침략범죄를 고발하여 마지않았던 가네꼬 후미꼬(金子文子) 같은 인사들은 조선에서 전쟁을 겪은 문인들입니다. 특히 가네꼬상은 그 증언이 진솔하고 열정적이었으며, 그래서 일본의 과오를 고발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다고 공언하기도 했었습니다.”

 

▷이 회장 “일본인들은 가정의 일, 직장의 일, 국가의 일은 말을 하지 않는 관습인데다, 식민지의 일은 더구나 관심을 갖지 않아서 많은 전후세대들은 과거사를 모르고 있겠지요.”

 

▷유 전 총장 “또 있습니다. 종국적으로는 국민의 교육, 청소년 교육에 관한 장래문제가 될 것입니다. 지나간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덮어둔다고 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우리만이 아니라, 일본만이 아니라, 정권 유지만이 아니라, 경제 성장만이 아니라 세계 75억의 인류를 위해 참다운 인간 미래의 문제를 일본인들이 어떻게 교육하는지, 평화를 어떻게 가르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히틀러의 독일을 생각합니다. 당시 선진국이었던 독일이 어떻게 정신병자 같은 히틀러의 선동정치에 넘어가고 휩쓸렸는지 말입니다. 사회심리학에서 리더십의 조건을 논할 때, 지도자의 기능을 열거하는 하나로 부격상(父格像·father figure)을 드는데, 그런 것은 동양의 고전에도 보이지요. 대학(大學)에 ‘요순솔천하이인이민종지(堯舜帥天下以仁 而民從之) 걸주수천하이폭 이민종지(桀紂帥天下以暴 而民從之)’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순 같은 성군(聖君)이 나와서 세상을 거느리매 백성이 따르고, 그 역사상 악명 높은 걸주 같은 폭군(暴君)이 세상을 거느려도 백성이 따랐다는 뜻인데 요순의 천하는 백성도 요순 같아서 착했고, 걸주의 시대는 백성도 걸주 같이 악해서 죽이 잘 맞았다는 것입니다. 아까 아베상에 관해 조금 언급했습니다마는 일본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이제는 세계평화를 위하는 대국적인 생각을 하고, 자기들만 생각하는 과거의 소승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김 전 연구소장 “이런 정도로 오늘 말씀을 마치고, 일본의 두 분이 말씀을 하시지요.”

 

▷유 전 총장 “잠깐, 계제에 한 말씀 더 붙이겠습니다. 오늘의 이 정답고 의미 있는 대화를 마치면서 오늘 이 자리를 주선해 준 김태창 박사에게 우리의 영원한 우정으로써 감사드립니다. 또한 일본의 여러분에게도 김태창 박사를 받아들이고 그를 도와서 그의 높고 깊고 넓은 공공철학의 활동 무대를 만들어주신 것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야마모토 교시 ㈜오피스21 대표 “오늘 두 분 한국의 원로 지성인을 모시고 귀한 말씀을 듣게 되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양국 간의 문화교류를 통해서 일본이 바뀔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말씀해 주신 것을 참답게 이해하고 일본과 한국이 민간을 통한 봉사와 국제조약에까지 인간 간의 신뢰를 쌓고 긍정적으로 교류가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는 일본인으로서 지난 세월 한국인에게 모진 식민지 지배, 학정을 통해 비인도적, 비신사적 폭거를 저지른 일에 대해서 여러분께 사과합니다.

저는 미래공창신문을 통해 일본이 지금부터라도 참다운 인간, 미래의 문제를 참으로 공공(公共)하는 철학의 관점에서 대화(對話), 공동(共働), 개신(開新) 즉 대화하고 함께 힘써서 새로움을 열어 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가와 국가 간의 정치적인 대화는 당장 기대하기 어렵지만 학자와 지식인들이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같이해 개신을 지향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래공창신문을 통해 그것을 밀고 나가고자 합니다. ‘공창(共創)’이라는 것은 함께 만든다는 것으로, 서로 이해하고 돕고 이바지하자는 것인데 저는 양심을 굽히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고 부정을 하지 않고 숨김없이 표현하고 고발하고 주장해 장래 세대들이 인간적으로 넉넉하고 평화적으로 살아가도록 이끌겠습니다. 거듭 오늘의 이 귀중한 대화와 두 분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가마다 교수 “오늘 가슴에 스며드는 두 분 말씀을 경청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저희 어머니도 정신대에 갔다가 히로시마에서 일을 했지만, 히로시마 원자탄폭격의 그 순간에는 구레(吳)에 출장을 갔던 일로 원폭을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정신대와 일본의 정신대가 이렇게 차이가 컸는지 저는 처음 들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인간 평등을 생각하고 인간 차별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거부하는 태도로 자라고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두 분이 말씀하신 그런 일본의 과거를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저희 아버지는 전쟁 때 공군에 있었는데 동료가 다 죽고 겨우 둘이 살아남아서 아버지는 자기의 그 후의 생애를 ‘덤으로 얻은 삶’이라고 할 만큼 그 군대생활의 기억을 되뇌었습니다. 아버지도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오토바이 사고로 40대 초에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자라서 종교학을 배우고 그 연구를 깊이하면서 느낀 것은 일본에는 두 가지 차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조선에 대한 차별과 또 하나는 일본의 차별인데, 일본의 차별은 지금까지도 혼인에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저는 우리의 과거에 한국과 중국과 그 밖의 여러 나라들과의 관계가 어떠했음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는 그 많은 일본의 신사(神社) 중에서 반에 가까운 숫자가 조선인을 신주로 모시고, 중국계가 그 다음이고, 인도계도 몇 퍼센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터해서, 그것을 총합하는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1997년 저는 한국의 전통무용가 김매자(金梅子)씨를 일본에 초청해 일본 공연을 하고, 2002년 2차 공연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일·한 간에 모두 놀라고 반발도 했습니다만 2009년에는 한국에서 한국전통악단과 일본의 노오(能) 예술단이 협연해 3차 공연을 가졌습니다. 그때 저도 피리와 젓대를 협주해 문화교류 무대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문화교류를 통해 평화로이 민족 간, 국가 간의 이해를 깊게 하고 넓혀 나가는 관계 지음을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과거는 한 때 불행하기도 했지만 이제 지식인들이 새로운 생각, 새로운 발걸음으로 김 박사가 뜻하시는 개신(開新)을 지향해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두 번째는 지금 두 분이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얼마나 어려운 시절이 있었는가, 일본이 얼마나 혹독하게 굴었는가를 알고 그 역사를 기억하며, 앞으로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더욱 양국의 교류를 통해서 양 국민을 끈끈하고 굳건하게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다짐하게 합니다. 감사합니다.”

 

▷유 전 총장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함께 노력합시다. 그 보람을 기대하겠습니다.”

 

▷김 전 연구소장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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