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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25>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25>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6.01.17 1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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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민·최금순 부부, 포석의 삶 기리며 선집 발간
▲ 젊은 시절 황동민 모스크바 관계대학 교수와 최금순(예까떼리나) 부부. 황 교수는 포석 조명희의 손 아래 처남으로, 1959년 포석의 탄생 65주년을 맞아(포석이 1928년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한 지 21년 뒤)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부인 최금순과 함께 주도적으로 ‘조명희선집’을 발간했다. 최금순은 포석의 처남댁이면서, 포석이 우스리스크 인근 륙성촌에서 교사 생활을 할 당시 제자이기도 했다. 최씨는 포석이 비운에 간 이후 스승의 명예를 회복하고 문학적 생애를 기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학자였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1925년 2월 개벽에 단편소설 ‘땅속으로’를 발표하면서 포석은 시보다 단편소설과 수필쪽으로 관심이 방향을 돌렸다. 이로부터 포석은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할 수 있는데, 김기진과 이기영, 최승일, 안석주, 염상섭, 최학송 등과의 교분을 나누면서 사상적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그해 포석은 이기영을 주선하여 조선지광에 취직시키고 카프의 맹원으로 가입하게 했다. 8월에 결성된 카프는 민족민중주의적 삶과 문학을 견지해 온 포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포석은 카프의 정치학습 그룹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한설야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때 우리들 중에서 생활상의 위협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아마도 조명희 선생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남달리 많은 가족이 있었고 그 부양 능력은 오로지 조명희 선생 한 사람에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또 엎친데 덮치기로 언제나 일제 경찰과 또는 그들로하여 빚어지는 갖갖은 박해와 피란이 멎을 날이 없이 앞뒤로 조여들었다.

조명희 선생은 언제나 이런 고달픈 수난 속에서 자기의 창작 사업을 꾸준히 계속하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후배를 키우며 고무하는 선배로서의 지도 사업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조명희 선생은 보기 드문 정열적인 시인으로 또 소설가로 정열을 오직 자기 창작에만 돌린 것이 아니고 보다 많이 동지들과 후배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급박한 경우를 만난다 하더라도 언제나 태고연하도록 유장하고 여유있는 조명희 선생만 보면 자연 맘이 훈훈해지면서 열어 제치고 나갈 구멍이 내다보이곤 하였다.

- 한설야, 정열의 시인 조명희, 1957년 8월, 1959년 조명희선집 수록.

 

포석은 생활상의 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또 일경들과의 마찰과 그들로부터 가해지는 갖은 박해 속에서도 꿋꿋한 모습을 보이며 문인 후배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지도 사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와 소설 창작 뿐만 아니라 문학과 민족주의와 민중주의와 조선의 독립을 향한 자신의 뜨거운 열정을 갖고 동지와 후배들을 끌어주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해나가고 있었다. 하여 한설야를 비롯한 카프계 문인들은 포석만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든든한 마음으로 그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카프와 관련된 여타의 일 뿐만아니라 자신들의 작품의 방향에 대해서 언제나 포석과 함께 토의하는 것을 즐겨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들 카프 맹원은 많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제와 부르죠아 작가들, 즉 순수예술파, 아나키즘 작가들, 해외문학파, 민족주의파들의 우리에 대한 공격, 그리고 그 보다도 부르죠아 작가들이 날마다 독자에게 주는 좋지 못한 영향이 더 무서웠으며 그래서 우리들은 순시도 이것들과의 투쟁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런데 카프 내에 잠입한 이색분자들이 투쟁의 발전 과정에서 딴 장난을 놀기 시작하였다. 카프 내부의 아나키스트들은 맑스주의를 깎아내리고 아나키즘을 추켜 올릴 것을 시도하였다.

이때는 아직 박영희, 김기진 등 변절자들의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 음모는 개시되지 않았으나, 이들은 이때부터도 카프 내부의 와해 공작으로 나타난 아나키스트들의 준동에 대하여 침묵으로써 대답하였다.

이것은 다름아닌 아나키스트들에 의하여 카프 파괴의 단서가 열릴 것을 희망하는 심리의 표현이었던 것이오, 그것은 또 일제의 기대와도 상통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교묘하게 과장되고 분식된 자들의 사이비 혁명사상을 우리들은 유예하지 않고 폭로하면서 카프 맹원들과 대중들을 저들의 기만으로부터 수호하는 것을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의무로 삼았다.

일제를 상전으로 하는 이광수 지도하의 우익 민주주의파, 이태준을 선두로 하는 악질 반동문학 단체인 구인회의 이른바 순수 문학파, 유치진, 이헌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대주의자들이며, 꼬쓰모뽈리스트들인 이른바 해외문학파의 우리에 대한 파괴 음모는 일제 사촉 하에서 백귀야행식으로 점점 더 노골화하여 갔다. 우리들은 이것들과 싸우기 위하여 첫째 출판 사업을 강화하며 또는 부르죠아 출판물의 이용에 특히 힘을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때 조명희 선생은 주로 시와 또는 산문으로 그야말로 좌우 양수에 예리한 무기를 들고 우리들의 선두에서 싸웠다. 나는 항상 그에게 고무되면서 보다 더 보람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나의 실력을 키우는데 노력하였다. 우리 계급 앞에 맞서는 모든 것과 싸우기 위하여 언제나 나 자신에 매를 내리면서 나 딴에는 정력적으로 썼다.

단편 소설, 수필, 문학 평론을 비롯하여 사회 평론, 국제정세 정치 경제 논평까지 썼다. 물론 이 글들의 많은 부분이 불가살이처럼 집어 삼킬줄만 아는 왜경에 의하여 잡아먹히었지만, 그러나 놈들에게 결손을 보고 말 수는 없었다. 나도 조명희선생도 또 다른 동지들도 놈들이 먹으면 또 쓰고, 먹으면 또 쓰고 하였다.

- 한설야, 정열의 시인 조명희, 1957년 8월, 1959년 조명희선집 수록.

 

포석의 처남으로, 모스크바 관계대학 교수를 지냈던 황동민은 곤궁한 생활에도 꼿꼿한 선비의 정신으로 조선 문단을 이끌어 나갔던 포석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에 대해 세세한 설명을 곁들여 놓고 있다. 이 글은 포석이 사망한 지 21년이 지난 1959년,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던 황 교수와 그의 아내 최금순(예까떼리나)이 주축이 되어 포석의 삶과 문학을 기리고자 발간한 ‘조명희 선집’에 실린 것이다.

 

조선에 돌아온 조명희는 현실 속에 뛰어들어 가난한 근로 대중의 극빈과 비인간적인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는 남다른 곤궁과 기아에 처박힌 처지를 견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생애를 잘 아는 동지들의 회상에 의하면 조명희처럼 주림을 잘 참는 사람도 없었으며 사흘 동안 굶으면서 참는 것은 조금도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조명희는 시시로 닥쳐오는 기아를 참지 못하여 생활의 추악한 면과 타협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민의 기아와 고통을 영원히 없이 하기 위하여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 제도를 청산해야 한다는 신념에 도달하였다. 이렇게 조명희는 생활을 넘어서려는 ‘영혼’의 세계에서 오랫 동안 방황하다가 근로 인민의 비참한 최하층에서 생활의 진실을 직접 체험하고 관찰하면서 자기가 이때껏 그처럼 찾아 헤매던 인간의 이상을 비로소 현실 그 자체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조명희의 이와 같은 급속한 사상 발전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물론 그를 관념의 세계로부터 현실의 세계로 끌어내온 생활 자체였다. 그러나 그가 맑쓰-레닌주의 이론의 학습을 거치지 않고는 이와 같은 진리의 파악에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만은 사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20년대 전반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에서 맑스-레닌주의 사상이 침투되어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의 선진적 로동자들과 인테리들은 맑쓰-레닌주의를 알게 되었다. 조명희도 다른 진보적 작가들과 같이 맑스-레닌주의적 학설을 연구하였다. 그는 특히 자기 개인의 자질에 따라 맑스, 엥겔스 및 레닌의 철학적 저작들을 주로 학습하였으며 그것을 몇 해를 두고 손에서 뗀 일이 없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이런 결과 조명희는 인류 사회발전의 방향을 유일하게 밝혀주는 과학적 세계관을 소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대 조선 현실의 역사적 전변을 올바른 과학적 견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황동민, ‘작가 조명희’, 1959년 조명희선집.

 

(45) 김기진과 박영희의 논쟁

▲ 김기진

김기진과 박영희의 ‘내용과 형식 논쟁’은 김기진이 박영희가 쓴 ‘전투’(개벽, 1925년 1월)에 대해 “설교체로 지문을 삽입해 놓은…, 노골적으로 주관을 나타내려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박영희의 작품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시작됐다. 박영희는 이에 대한 반박으로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조선지광, 1927년 1월)에서 “예술지상적·초계급적·개인주의적”인 것이라고 반박하고 “그(김기진)는 프로 문학가나 프로 비평가로서는 자격이 없는 부르주아 비평가, 예술가적 비평가”라고 비판했다.

김기진은 ‘무산 문학작품과 무산 문예비평-동무 회월에게’를 통해 “회

▲ 박영희

월(박영희)의 ‘지옥 순례’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라 단언한다. “절망의 폭발이 골자로 된 소설, 또는 복수가 곧 투쟁으로 된 소설 등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박영희의 소설이 “기둥도 없이, 서까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입혀 놓은 ‘비소설적 건축’이다”는 혹평이었다. 박영희는 이에 대해 “현 단계는 투쟁기이기 때문에 소설을 완전한 건축물로 만드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프롤레타리아 문화가 하나의 건축물이라면 프롤레타리아 예술은 그 구성물 중 하나이므로 서까래도, 기둥도, 기와도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16년 배재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사귀어 1920년 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채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했을만큼 절친이었던 둘은 그 이후로도 논쟁을 계속했다. 그러다 김기진의 형 김복진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철회하며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고 앞날을 맹세하겠다”고 말하면서 끝이 났다.

프로문학의 헤게모니를 쥔 박영희는 카프문학의 방향전환을 시도하며 빠르게 정치주의화 했지만, 7년 뒤 그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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