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사로 굶으면서도 ‘생활’과 타협 안 한 조명희

▲ 1959년 황동민 교수의 주도로 포석 탄생 65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조명희 선집’ 원본의 표지.
▲ 내지에는 황 교수가 쓴 서문 ‘작가 조명희’가 실렸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황동민 교수는 일본 유학생활을 끝내고 조선으로 돌아온 포석이 ‘남다른 곤궁과 기아에 처박힌 처지’에 놓여 있었음에도 “조명희처럼 주림을 잘 참는 사람도 없었으며 사흘동안 굶으면서 참는 것은 조금도 희귀한 일이 아니었다”고 포석을 잘 아는 동지들의 술회를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포석은) 시시로 닥쳐오는 기아를 참지 못하여 생활의 추악한 면과 타협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생활을 창조하기 위하여, 그리고 인민의 기아와 고통을 영원이 없이하기 위하여 반드시 자본주의 착취 제도를 청산해야 한다는 신념에 도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한 삶의 고단함이 포석에게 인류 사회발전의 방향을 유일하게 밝혀주는 과학적 세계관을 소유하게 했던 동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그러한 사고는 당대 조선의 현실의 역사적 전변을 올바른 과학적 근거로 이해할 수 있게끔 하는 기틀이 되게 하였다.

황 교수의 포석에 대한 글은 이어진다.

 

 “역사는 움직인다. 대중은 움직인다. 힘은 움직인다-현실을 정면으로 뚫으며, 떠밀며, 참으며, 부닥치며, 필연한 약속 밑에서 새 시대를 받아 들이며…. 여기에 새 현실관이 있다. 이 현실을 부정하는 밑에 새 현실이 솟아 오른다.”라고 조명희는 외쳤다. 그는 위대한 10월혁명에 의하여 고무된 조선 근로대중의 힘이 당시 조선의 구체적 역사적 환경에 의하여 비록 아직 약하나 앞으로 점점 더 장성될 것이며 나중에는 일제의 참을 수 없는 민족적 억압과 착취 제도를 뿌리부터 뒤엎는 극복할 수 없는 혁명적 역량으로 전변되어 새로운 현실, 사회주의적 현실을 창조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조명희에게 있어서 이와같은 맑쓰-레닌주의 세계관의 급속한 형성은 그의 창작 사업에 거대한 전변을 가져왔다. 그는 “예술-힘의 예술, 새 현실관에서 솟아 오르는 힘의 예술-이것이 새로 요구되는 무산계급의 예술이다.”라고 소리치면서 자기의 문학을 새 현실을 창조하기 위하여 ‘움직’이는 노동계급의 믿음직한 사상적 무기로 삼을 것을 결의하였다.

작가는 이 결의를 실천하였으며 그를 실천하기 위하여 지난 시기의 낡은 예술적 관습을 극복하고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1925년을 전후하여 조선에서 맑쓰-레닌주의의 기치하에 노동계급을 선두로 하는 근로 대중의 혁명적 투쟁과 연계된 현실을 묘사하기 위하여 새로운 창작방법이 요구되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주의다. 현실에 부닥치자. 뚫고 나가자!”고 그는 부르짖으면서 새 창작 방법-그의 표현에 의하면 “고리끼 류의 사실주의”-즉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택하였다.

그리고 모순과 투쟁으로 충만된 복잡한 생활 화폭을 표현하기에는 자기의 시 형식이 협착함을 느낀 조명희는 운문에서 산문에로 이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25년에 자기의 처녀작 ‘땅 속으로’를 발표한 후 수많은 단편, 수필, 희곡들을 계속적으로 창작하였다. 그의 초기작들의 기본 주제는 빈궁의 증오였다. 작가는 이 작품들에서 빈궁의 근원을 정당히 밝히고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밝혀 내었다. 그리하여 그의 문학은 근로 계급의 투쟁에 복무하는 예리한 사상적 무기로 변하였다. 이때로부터 조명희에게 있어서 문학은 곧 생활이며 투쟁으로 되었다.

조명희는 조선에서 1920년대에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 프로레타리아문학-세칭 ‘신경향파’ 문학 대열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25년에 한설야, 이기영 등과 함께 ‘카프’(조선 프로레타리아 예술동맹) 창건에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 황동민, ‘작가 조명희’, 1959년 조명희선집.

 

포석은 ‘역사는 움직인다’고 보았다. 움직이는 역사는 발전과 진화다. 역사의 발전과 진화의 동력은 대중의 움직임이고, 그 움직임은 힘이다. 그리하여 역사 발전의 종극엔 사회주의의 실현과 완성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공산주의가 붕괴되고 신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게 된 지금의 현실은 뒤로 하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고 그것의 실현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포석에겐 아마도 그런 사상이 견고하게 자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20년대 중반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 있던 조선의 현실에서, 그런 당시의 포석에게는 암울한 현실을 타파해 나아갈 돌파구로 그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포석은 “현실을 정면으로 뚫으며, 떠밀며, 참으며, 부닥치며, 필연한 약속 밑에서 새 시대를 받아 들이며…. 여기에 새 현실관이 있다. 이 현실을 부정하는 밑에 새 현실이 솟아 오른다”고 말했다.

또 1925년 전후 조선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치하에 노동계급을 선두로 하는 근로 대중의 혁명적 투쟁과 연계된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창작방법이 요구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사실주의다. 현실에 부닥치자. 뚫고 나가자!”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뚫고 나아가는 새 창작 방법으로 ‘고리끼 류의 사실주의’ 즉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동부터 깊숙히 관여했던 한설야가 카프에 가입한 것은 카프가 결성된 지 2년째인 1927년인데, 한설야의 글을 살펴보면 카프의 분열은 이 즈음부터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런 분열상은 결국 1935년 카프의 해체로까지 이어지는데, 김기진과 박영희가 벌인 ‘내용 형식 문제’(45·포석평전 25회에 설명)는 카프가 문학과 예술과 사상적 차이에 의해 점차 와해되고 있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한설야는 이런 분열상을 일으킨 김기진과 박영희 등에 대해, 그리고 이광수 쪽의 우익 민주주의파, 이태준 쪽의 순수 문학파, 유치진 등의 사대주의자, 해회문학파 등에 대해 카프를 와해시키려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싸잡아 비난했던 것이다.

저돌적이고 거침없는 한설야의 공격성향에 비해 포석의 성품은 매우 온화했다. 그런 까닭에 한설야는 늘 침착하고 사려 많은 포석과 자주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현실의 표면, 현상의 포말(泡沫)에 사로잡힘이 없이 깊이 본질에 파고 들면서 멀리 돌려서 쓰는 방법, 비유와 해학까지 이용해 가면서 간접적으로 알게 하는 방법, 특히 말과 글에 다채로운 색채를 주어 독자들의 흥미를 끌면서 한편으로는 글백정놈들의 눈을 현혹케 하는 방법도 생각해야 했다”며 그는 “자칫하면 저돌적으로 냅다 밀기만 하려는 우리들에게 그(포석)는 부드럽고도 강한 문학상의 전략 전술을 항상 말해주었다”고 언술했다.

 

실상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은 우리들의 글을 보다 많이 부르죠아 풀판물들에 등장시킬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출판 활동을 논문의 문화 말살정책과 살인적인 검열 제도 아래에서 어느 정도 살려갈 수 있었다.

이 당시 우리들의 사업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학습과 이론 및 자질 향상을 위한 사업이었다. 이것이 일상적인 사업으로 되지 않고는 우리 작가들의 창작의 질을 현실 발전의 속도에 앞세울 수 없었고, 카프 활동의 전투적 발전을 가져올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방면에 보다 많이 노력하였고 또 수시로 조직적인 대책을 취하여 작가들로 하여금 일상적으로 사상, 이론 및 창작적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우리들은 정치학습 크루쇼크를 가지고 주로 맑스-레닌주의와 특히 그것의 철학 및 문학 예술에 관한 부분과 또는 그 학설을 우리의 실지 창작 사업, 또는 카프 조직활동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데 특히 노력하였다.

학습은 때로 먹는 일보다 더 중요하였고 학습하는 시간에는 기아도 피곤도 몰랐다. 학습은 원수들과의 투쟁에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우리의 편이며 또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편이었다. 그 다음에는 문학, 예술 학습 크루쇼크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는 전문적으로 우리들의 무기를 보다 정교하고 예리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또 보다 자양있고 맛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한 예술장의 문제들을 연구 토의하였다.

오늘 우리들은 이 시기의 작품들의 일부나마 우선 정리 출판하면서 느끼는 바는, 이 시기에 있어서 카프 작가들이 창작에 있어서 다만 사상성만 세운 것이 아니고 항상 예술성의 제고에 노력하였으며 그리하여 풍만한 유산과 사상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을 다량 생산하게 되었다는 그것이다.

이것은 조선 문학의 자랑인 동시에 조선 역사의 자랑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도 카프 초기에 있어서 사업의 기초를 세우는 데서는 조명희선생의 지도적 역할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 한설야, ‘정열의 시인 조명희’, 1957년 8월, 1959년 조명희선집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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