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논설위원·소설가

사람이 나이가 들어 늙어지면 피부에 탄력이 없어져 쪼글쪼글해진다. 이렇게 늙어서 살이 빠지고 쭈그러진 여자를 버커리라 한다. 사람이 병이 들어 먹는 게 부실해도 몰골이 핼쑥해지고 살이 빠져 쭈그러진다. 이런 여자도 버커리라 한다. 사람이 고생살이를 많이 해도 몸에 살이 붙질 못하고 깡말라 볼품없이 쭈그러진다. 이러한 여자 또한 버커리다. 그러니까 늙고 병들고 그리고 고생살이로 해서 살이 빠지고 쭈그러진 이런 여자를 버커리라 일컫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여자들이 있을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사람들은 특히 여자들은 아주 드물게 특수한 안락인생이 아니라면 거개가 이러한 삶을 산다. 그래서 버커리란 여자일생의 대명사일 수 있다. 버커리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인 것은 아마 여자가 남자보다 더 기박한 인생역정의 주인공이기 때문일 게다.

이 버커리들이 이 겨울철 농한기에 오늘도 마을 경로당에서 독지가들이 주고 간 쌀과 부녀복지원들이 해준 김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줬다 뺏는 고스톱 판도 물리고 이야기장단판으로 들어갔다. “요새 아주 우리한테 꼭 맞는 노래가 나왔더만 거 뭣이라?” “아이고 아직 백 살도 안 된 사람이 백 살은 살고 싶은가베 ‘백 살 인생’ 아닌가?” “백 살 인생이 아니고 ‘백세인생’여. 난 또 뭐 저니보다 낫다고오?” “그러는 자네 어디 한 번 불러보게!” “그려 잘 들어봐, ‘나이 백 살에 날 오라고 하거들랑 보채지 말고 아무 때나 내가 가고 싶을 때 좋은 날 좋은 시 가려서 가겠다고 일러라!’” “아주 시조 한 가락을 읊으시는구먼. 왜, 노래를 하나 새로 맹글어서 부르시지 그랴. 그게 아녀 이 사람아.” “아니 이 나이에 그렇게 하믄 잘 블른 거지, 워디 백빠센또 잘 부르기를 바라는가베?” “백빠센또는 안 되야도 예순빠센또는 되야제. 시방 독산할망이 불른 황천길 안 갈랴고 발버둥치는 노랫가락은 예순, 일흔, 여든, 아흔, 백 살꺼정 있는 것들 중 맨 마지막 한 퇴막인디 것두 젤 끝엣 게 ‘일러라’가 아니구 ‘전하게’여. 원 하나라도 웬전한 게 있어야제.” “지금 저니 나무래는 정산할매도 다 맞췄다구는 못햐. ‘전하게’가 아니라 ‘전하시게나’ 잖여 안 그려?” 이때 다른 버커리들의 ‘해해해해, 호호호호’ 하는 웃음소리들이 와르르르 와르르르 쏟아진다. “뭐여, 왜들 이랴, 내도 틀렸나베. 그람 뭐여 뭐냔 말여 그러구 보닝께 내도 영 헷갈리누만.” “시방 누가 누구보구 어떻다 저떻다 할 게재가 아녀. 너나 할 것 없이 그 밥이 그 밥이구, 숯이 검정 나무래는 식여. 우리들 나이를 생각해야제.” “와, 우리들 나이가 워뗘서 아직두 멀었는디, 영감이 찝쩍대두 마다하지 않는디.” “맞어 맞어 그야말루 요새 늙은이들 한창 불러대는 노래마냥 ‘사랑하기 딱맞춘 나이’인디.” “‘딱 맞춘 나이’가 아이고 ‘딱 맞는 나이’여 내 한 번 불러 볼팅께 잘 들어봐바! ‘야 야 야, 내 나이가 워뗘서 사랑에 나이가 있는가뵈, 눈물이 나네용 콧물도 나네용 사랑하긴 딱 좋은 나인디 어느 날….’” “그만 그만, 내 자세히는 몰라두 뭔가가 엉망진창인 것 같은디?” “내 말이 그 말이라니께. 여기서 그걸랑 끝냐. 젊은 애들이 들으믄 웃긴다구 허겄어 할망구들 노망났다구.” “갠찮야 갠찮야 늙으믄 다 그렇기두 하는겨. 울리는 것보담 낫잖여.” “백 번 맞는 말여. 요새 늙은이들 낮춰 보는 젊은 애들한테 하는 말이 있잖여 ‘너 늙어 봤니 난 젊어 봤다’ 하는 말 말여. 누가 만들었는지 참 훌륭한 말여. 늙어보지두 않은 것들이 까불구 있어 안그려 들?” “깔깔깔깔, 왜 안그려 왜 안 그려, 우리 늙은이들 속이 다 후련한 걸!” 경로당 안이 한바탕 출렁인다.

여기 어디 늙어 정신 혼미해지고 몸뚱어리 쭈그러졌어도 한탄하는 버커리들이 있는가? 농사일에 집안일에 자식들 일에 한 평생 얽매이느라 삭신 쑤시고, 관절 안 아픈 데 없고, 허리 끊어져라 결리지 않은 데 없는 그래서 이렇게 병들어 찌들어졌어도 마냥 유쾌하기만 한 이 버커리들! 그리고 지금까지 풍성치 못한 살림에 허덕이며 고생 고생하느라 살이 빠지고 쭈그러졌어도 이렇게 즐겁기만 한 버커리들!

아직 가진 게 많이 남아 있고 더 많이 가지려 욕심을 내느라 코앞에 닥친 죽음의 문턱이 두렵고 무섭기만 한 그래서 웃음과 여유가 없는 도시 풍 노년들의 각박한 현실에 반해, 비록 가진 것 풍요롭지 못해도 땅과 산과 물과 그리고 몸 부딪고 살 비비는 이웃과 더불어 여유롭게 살아가는 시골의 버커리들이 한층 낙천적이어서 아름답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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