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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27>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27>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6.01.31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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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 태동이 이뤄졌던 백면서생 포석의 팥죽가게

▲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한 이후 포석이 이룬 가족. 앞줄 왼쪽이 부인 황명희 마리아, 오른쪽이 차남 조 블라디미르. 뒷줄 왼쪽이 장녀 조선아, 오른쪽이 장남 조선인이다. 이 사진은 1938년 포석이 총살형을 당한 이후의 것으로,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한 가족들의 모습이다. 하바로프스크 ‘작가의 집’에서 같이 살았던 러시아의 문호 파제예프(1901∼1956년·소련 작가회의 회장 역임)는 황명희 마리아를 만나 “어려운 역경에도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운 당신이야말로 영웅”이라는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사진 속의 가족들 가운데 막내 조 블라디미르만 생존해 있다.

 

▲ 포석이 총살형을 당했던 1938년 당시 9개월의 갓난아기였던 조 블라디미르는 이제 일흔 아홉의 노인이 되었다. 사진은 지난 2014년 9월 ‘동양일보 조명희 탐사단’이 하바로프스크 아리랑 호텔에서 만났던 조 블라디미르로, 그는 현재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한설야의 말에 의하면 1925년 당시 ‘생활상의 위협’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조명희 선생이었다고 한다. 포석에게는 남달리 많은 가족이 있었고 그 부양 능력은 오로지 조명희 선생 한 사람에게 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포석은 조선과 러시아에서 두 아내와 7명의 자식을 두었던 셈이었다.

포석에게는 당시 부인 민식과 장녀 중숙, 차녀 중남, 장남 중락이 있었고, 1927년 차남 중윤이 태어난다. 소련으로 망명한 뒤 재혼한 황 마리아와의 사이에 장녀 조선아와 장남 조선인, 차남 조 블라디미르까지 둔 것을 치면 조선과 소련 자녀 모두 합쳐 7명이 된다. 세월이 꽤 흐른 뒤, 1990년대 소련에서의 장녀 조선아씨는 한국을 찾아와 조선에서의 장녀 조중숙씨를 만나 눈물의 상봉을 하기도 했다.

 

백면서생 포석이 생전 해보지도 않은 팥죽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리고자 했던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런 ‘팥죽장수 포석’과 관련해 전해지고 있는 에피소드 1.

1925년 여름 이기영, 한설야, 최서해, 송영 등 조선의 여러 문인들이 팥죽가게에 모였다. 시장기를 감추려 훌훌 불어대며 먹는 팥죽은 무엇보다 맛이 있었다.

문인들이 모여든 팥죽가게는 포석이 그의 막역한 지우 김우진에게 빌린 200원으로 시작하게 된 점포였다.

한 그릇에 1~2전이면 먹을 수 있었던, 돈 없는 서민들이라면 너나없이 즐겨찾던 음식 팥죽이었지만, 조선 팔도 내로라하는 문인들의 호주머니엔 그만한 돈조차도 없었다.

“돈 걱정은 말고 요기가 되게끔 많이들 자시오!”

팥죽가게 주인 백면서생 포석이 말했다.

“거참, 번번히 신세만 지니, 좋은 날 오면 갚으리다.”

호탕하게 통큰 인심을 쓰는 포석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숨져겨 있었다.

몇 푼 안되는 원고료로는 가족들 생계를 꾸려가기가 여간 벅찬 일이 아니었다. 그런 빈궁한 처지의 친구가 안타까웠던 수산 김우진이 포석에게 선뜻 거금 200원을 장사 밑천으로 대주었지만, 손님은 많고 팥죽은 연신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이문은 남지 않았다. 포석의 성격 때문이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곱절로 퍼주고, 그도 모자라 일면식도 없는 빈털터리 손님에게 외상으로 팥죽을 내어주는 일이 허다했다. 사흘 굶는 일이 예사였던 포석이 배고픔이란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포석에게는 늘 가슴 벅찬 보람도 있었다.

8월이면 우리 땅 조선에도 민중을 가슴에 품을 수 있는 단체가 설립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단체의 이름은 카프(KAPF)였다. 헐벗고 굶주린데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까지 겹쳐 신음하고 있는 조선의 백성들에게 한 줄기 빛으로 카프는 자리매김할 터였다. 또 그러해야만 했다.

그런 믿음과 결기가, 자신의 팥죽가게에 모여들어 열정적 토론을 벌이며 카프의 행로를 탐구하는 조선 문인들의 허기진 배를 감출 수 있도록 팥죽 몇 그릇 대접할 수 있다는 것으로 무엇보다 큰 행복감을 주게 했던 것이다. 되는대로 퍼주고 마는 터무니없는 ‘장사수완’으로 시간이 지난수록 야금야금 원금만 갉아먹게 되는 적자 투성의 팥죽가게도, 가장의 풍족한 귀가를 기다리는 처자식의 애타는 바람도 그의 관심에서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은 당장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조선 사람들의 배고픔을 함께 나누고 덜었다는 작은 위안 때문이었다.

자신 스스로에게도, 가족에게도, 그의 친한 벗들에게도 어색했던 이름 ‘팥죽장수 조명희’.

한국 근현대 문학의 결정체였던 카프의 태동이 포석의 팥죽가게에서 이루어진 것도 어찌보면 그의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빈궁한 생활에 찌든 ‘가난’이라는 것은 포석의 삶 전체를 두고 따라온다.

소련 작가연맹의 맹원으로 하바로프스크에서 ‘작가의 집’이라는 번듯한 집에서 살았던 몇 년을 제외하면 가난은 포석을 늘 옥죄어 왔다. 그러나 그는 그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신념을 이루는데 결코 가난은 걸림돌이 될 수 없었으며, 또 가난이라는 족쇄에 묶여 ‘찌질찌질한 삶’을 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가난보다 주변의 가난에 눈길을 주었고, 조선 백성의 절박한 삶에 괴로워했다.

그의 주변에는 늘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고 흠모하여 따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특히 조선의 문사들에게 그는 하나의 사표(師表)이기도 했다.

 

에피소드 2.

1920년대 중반의 어느날. 조명희, 송영, 이기영, 한설야가 한 자리에 모였다.

하루가 멀다하여 늘상 모이는 것이었지만, 그날따라 누군가의 제안으로 통 크게 막걸리 말술이라도 받아놓고 술값내기 윷놀이판을 벌이고 있었다.

윷놀이판은 끝났지만 모두 가난한 작가들. 호주머니에 짤랑거리는 돈 몇 푼 가지고 있는 이가 없었다.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볼 수밖에. 빈한한 처지의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너나없이 몇 전조차 없었기 때문에 선뜻 나서 “옛소, 먹걸리 값이오!”하고 셈을 치루려 나서는 이가 없었다.

먹걸리는 먹어야겠고, 그런데 술값은 누구에게도 없고, 그렇다고 내온 술을 도로 물릴 수도 없는 일.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던 그때 포석이 슬그머니 일어나 혼자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간 곳은 바로 전당포였다.

주인에게 포석이 말했다.

“가진 게 없는데, 이거라도 받아줄 수 있겠소?”

그가 전당포 주인에게 내민 것은 입고 있던 두루마기였다. 그 두루마기는 포석의 아내가 ‘조선의 문사가 꾀죄죄한 모습이어선 안된다’며 큰맘 먹고 장만해준 것이었다.

포석을 알고 있던 주인은 손을 내저었다.

“선생님,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신가 본데, 받은 양 치고 내어줄터니… 몇 전이면 되겠습니까?”

“문우들하고 술 몇 잔 먹어야겠는데 탈탈 털어도 동전 한닙 나올만한 데가 없네요. 값을 얼마나 쳐줄 수 있겠소?”

“30전은 셈해줄 수 있습죠. 날도 험한데 두루마기는 그냥 입고 가셔요. 저같은 무지랭이가 조선의 문인들이 하시는 일을 다 알 수야 없지만, 그래도 큰일을 하기 위해 열심이시라는 건 알고 있지요. 그분들 술값을 위해 돈 몇 푼 드리는 것도 다 큰일을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주인장도 먹고 사는 일인 것인데 그럴 수는 없는 일, 두루마기 값만큼만 내어주시오.”

“정 그러시면 나중에 고료라도 들어오면 그때 셈해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받아 두시고 셈 만큼만 주시오.”

전당포 주인의 호의를 부득불 물리치고 포석은 술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루마기 값으로 받은 30전을 조용히 내놓았다.

한 잔에 5전하는 막걸리 여섯 잔을 나누니 밤이 이슥해졌다. 그러나 그가 막걸리 값 대신 맡긴 자신의 두루마기를 후일 되찾아 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1928년 조선을 떠나 러시아로 망명한 포석의 삶은 그 이전과 그 이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낯선 땅에 적응하려면 우선 언어 소통부터 되어야 했다. 어문학에 워낙 능통했던 포석은 큰 어려움없이 러시아어를 배웠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에 익숙해 진다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포석이 망명지 러시아에서 지사(志士)로서의 굳건한 삶을 이어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세운 신념을 실천해 나간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석을 두고 우리가 지사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조선에서 보여준 일제에 대한 가열찬 투쟁과, 러시아에 와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늘 힘을 기울였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포석에게 조선은 시집 온 딸이 친정어미를 그리워하는 양으로 늘 애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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