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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28>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28>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6.02.14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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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가족에 가장 아끼던 시계를 건네준 포석
▲ 포석이 황명희 마리아와 재혼하면서 륙성촌에서 우스리스크로 이사한 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어문학을 가르쳤던 조선사범학교(고려교육전문학교). ‘ㄷ자’형으로 재건축된 이 건물은 포석이 근무했을 당시에는 ‘一자’형이었다. 뒷편 건물이 그 당시 원형이다. 포석은 이 학교에서 근무하며 조선 아이들에게 우리의 글과 문학과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에피소드 3.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열차가 달리고 있었다. 포석은 ‘추∼ 추우∼’ 소리를 내지르며 달리는 기차가 자신의 모습인 듯도 싶어 마음 한켠 착잡했다.

열차의 소리는 외마디 비명처럼 들렸다. 서울 마포나루를 떠났던 것도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 강산이 한 번 바뀔만한 세월이었다. 옥죄어 오던 일경의 감시망을 피해 포석은 1928년 여름 조선을 떠났다. 떠날 때 포석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했다. 정보가 새어나가면 붙잡힐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더러운… 참 나쁜 놈들 같으니.’

포석은 휴우, 한숨을 내쉬며 나즈막히 혼잣말을 되뇌었다. 일제는 그에게 갖은 회유책을 동원했었다.

도지사급의 높은 직위를 줄테니 협조해 달라는 말도 들었다. 귀를 씻고 싶었다. 일제에 가장 강력한 투쟁을 벌이던 포석은 일경들에게 눈엣가시였다. 그러니 차라리 높은 직위를 미끼 삼아 포석의 마음을 돌려놓으려 했던 것이었다.

몸은 이국땅 멀리 떠나있지만 마음은 한 시도 조선을 잊은 적이 없는 포석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마음을 늘 품어오던 그였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열차 안, 아이를 데리고 한 여인이 포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행색이 꾀죄죄했다. 아이는 자꾸 칭얼댔다. 포석이 안스러워 빈말을 건넸다.

“어디까지 가시오? 아이 아버지는 어디 있고?”

잔뜩 경계심을 품던 여인이 포석의 온화한 미소에 마음이 풀려 대답했다.

“아이 아버진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아니, 어쩌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이 아이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긴 하지만 그래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싸운 그이의 뜻을 생각하면서 다시 힘을 내보곤 합니다.”

포석은 낮은 탄식을 토했다. 러시아 정부에서 내준 ‘작가의 집’에 살면서 그나마 자신의 인생에 가난이라는 때를 한거풀 벗겨낸 자신이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저렇듯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고 있구나!’

포석은 그 여인을 위해 무엇이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여비를 빼면 몇 푼 되지 않았다. 문득 자신의 손목에 눈길이 갔다. 집안에 쌀이 떨어져도 손을 대지 않았던, 자신이 가장 아끼던 손목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그 당시로는 비싸고 귀했던 손목시계. 가난한 포석에게는 그 시계가 가장 값나가는 소유였다.

“힘을 내시오. 그리고 조선이 독립되는 좋은 날, 반드시 올겁니다.”

포석은 주저없이 자신의 손목시계를 끌러주며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당황한 것은 여인이었다.

“아니 어찌 이런 귀한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완강하게 받기를 거부하는 여인에게 포석은 예의 온화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받아 주세요. 조선을 지켜내지 못했던, 조선을 되찾지 못한, 부끄럽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주는 작은 위안이라고 생각하세요.”

1938년 하바로프스크 KGB 지하감옥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가던 그날까지도 포석의 손목에는 시계가 없었다.

 

에피소드 4.

1931년 봄 황명희 마리아와 재혼한 포석은 륙성촌에서 우스리스크로 이사해 조선사범학교 조선어문학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1932년 1월 20일 장녀 조선아가 태어나고 또 1년 뒤인 1933년 2월 2일 장남 선인이 태어났다.

1934년 파제예프 추천으로 소련작가동맹 맹원으로 가입하면서 포석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신문 ‘선봉’의 문학 편집자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망명한 지도 벌써 6년여. 그러나 포석의 마음과 눈길은 언제나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는 조국, 조선에 두고 있었다.

이런 저런 소식을 듣는 것은 신문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것이 없었다.

고려신문 ‘선봉’을 비롯해 러시아 신문, 중국 신문 등 두루 즐겨보던 포석. 포석은 특히 그때 당시 중국 신문을 통해 루쉰(46)의 연재소설을 보는 것을 큰 낙으로 삼았다.

조선사범학교로 출근하다보면 길에서 늘 마주치는 신문팔이 소년이 있었다. 포석에게는 그 아이로부터 신문을 사 보는 것이 소소하지만 즐거운 일이었다.

“오늘은 많이 팔았나보네. 그래, 내가 즐겨보는 신문은 혹 남아 있는가?”

언제나 인사성 밝게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꾸벅거리던 아이였다.

“선생님, 어떡하죠? 선생님께서 보시는 신문은 다 팔려버렸는데요.”

아이는 신문이 다 팔린 것이 자신의 잘못인양 뒤통수를 긁적이며 난감해 했다.

“그렇구먼. 아쉽지만 어떡하겠나. 그래도 우리 학생이 신문을 다 팔았으니 좋은 일 아닌가.”

발걸음을 옮기려던 포석에게 아이가 다급하게 말했다.

“선생님, 여기 잠깐 계셔요. 제가 얼른 구해보겠습니다.”

말릴 겨를도 없이 아이는 포석의 출근길을 묶어 놓은 채 쪼르르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 한참만에 숨을 헐떡이며 포석에게 달려온 아이는 소중한 보물인양 어렵사니 구해온 신문을 내어주었다.

“거 참,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구먼…”

포석은 아이에게 신문값을 셈하고 난 뒤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아이의 수고로움을 돈 몇 푼으로만 셈할 수는 없었다.

마침 포석에게는 빵이 있었다.

“이거 가져가거라. 보아하니 아침도 거른 듯한데, 가족들하고 나눠 먹도록 하거라.”

포석이 감사의 표시로 준 빵은 배급받은 것이었다. 그 빵은 배고픈 포석의 가족들이 기다렸던 몇일 분의 끼니였다.

 

46. 루쉰(魯迅 )

▲ 루쉰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으로, 중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루쉰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지은 필명이다. 1881년 9월 25일 출생하여 1936년 10월 19일 사망했다.

중국 현대 문학의 출발점이자 현대 사상계를 이끌며 중국 문학의 기초를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루쉰은 1881년 9월 25일 중국 저장성 샤오싱현에서 태어났다.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으나 13세 때 할아버지가 과거시험의 부정부패에 연루된 일로 투옥되고 집안이 멸문의 위기에 처했는데 루쉰의 가족만이 미리 외삼촌 집으로 피하여 가까스로 화를 면했다.

18세 때 난징 지방에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학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상경하여 강남수사학당에 들어갔다. 이후 강남육사학당 부설 광무철로학당에 진학하여 당시 유신개혁의 영향을 받아 신학문을 배웠다.

22세 때 학당을 졸업하고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며, 유학생 준비학교인 도쿄 홍문학원을 거쳐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다.

1908년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주안이라는 여성과 혼례를 치렀다. 결혼 후 루쉰은 홀로 항주로 가서 양급사범학당에서 화학과 생리위생학을 가르치며, 박물학을 번역했다. 이듬해 샤오싱부 중학교 교감으로 취임했으며, 이듬해에는 산회초급사범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18년 문학혁명을 계기로 문예지 ‘신청년’에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광인일기’를 발표했다. 광인일기는 파격적인 시각, 구어체 문장, 유교적 구습에 대한 비판을 담은 문학혁명의 대표적 작품이자 중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다.

특히 192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아Q정전’은 당대 중국의 현실을 집약한 것으로, 루쉰을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1920년에는 베이징 대학에서 중국 소설가에 대한 강의를 했으며, 1923년에는 베이징 여자사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6년 3월 18일, 베이징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제국 열강에 맞서 싸우자는 투쟁을 시작했고, 정부는 이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루쉰은 이 3·18사건으로 베이징을 떠냐야 했다.

상하이에서 그는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쉬광핑과 함께 지내면서 이곳으로 피신 온 문인들과 함께 혁명 활동을 하는 한편, 집필과 번역 작업에도 몰두했다. 루나차르스키의 ‘예술론’, ‘문예와 비평’, 플레하노프의 ‘예술론’, 고리키의 작품을 비롯한 러시아 근대 단편 문학 등이 있다.

국민당에게 수배당하고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수년간 도피 생활을 하는 와중에 중국 혁명을 위한 집필 활동과 혁명운동 등에 투신하면서 루쉰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1936년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루쉰은 폐병과 천식이 악화되어 그해 10월 19일 사망했다. 병석에 누운 그는 거동도, 말하는 것도 불편할 지경이었음에도 집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관을 덮은 흰 베에는 ‘민족혼’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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