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 김우진,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투신정사

 

 

▲ 당시 언론에 발표됐던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투신정사 관련 보도. 조선일보는 ‘미성의 주인 윤심덕양, 청년 문사와 투신정사’라는 3단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뤘다. “남겨놓은 주인을 기다리는 적적공방에는 고가의 축음기와 정겨운 겹외투가 말없이 있을 뿐, 최후의 레코트 취입”이라는 부제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1925년 2월 1일과 3월 1일 포석은 개벽 56호와 57호에 소설 ‘땅속으로’를 연속해서 발표한다.

4월 1일에는 같은 잡지 58호에 시 ‘어둠의 검에 바치는 서곡(序曲)’과 ‘온 저잣사람이’를 발표하고 신여성 4호에 시 ‘고향의 봄’을 발표한다. 6월 1일에는 개벽 60호에 시평 ‘나는 어럿케 생각한다’를, 7월 1일에는 시대일보에 수필 ‘생명(生命)의 고갈(枯渴)’과 개벽 61호에 시 ‘바둑이는 거짓이 업나니’와 ‘어린 아기’를 싣는다.

8월 1일에는 개벽 62호에 시 ‘나에게 일반성(一反省)의 낙원(樂園)을 다고’와 ‘세 식구’를 잇따라 발표한다.

1926년 들어서는 2월 1일 문예운동 1호에 시 ‘농촌의 시’를, 5월 1일 같은 잡지 2호에 수필 ‘단문(短文) 몃’을, 6월 1일에는 개벽 70호에 수필 ‘늦겨본 일 몃가지’를 선보인다.

9월 1일에는 개벽 73호에 소설 ‘마음을 갉아먹는 사람들’을, 11월 1일에는 조선지광 61호에 소설 ‘저기압(低氣壓)’을, 12월에는 중외일보에 수필 ‘직업·노동·문예작품’과 ‘박군의 로맨스’를 내놓는다.

이 가운데 1926년 11월 조선지광 61호에 실었던 포석의 소설 ‘저기압’에 대해 팔봉 김기진은 그해 12월 조선지광 62호를 통해 문예월평을 내놓았다.

 

조명희형의 ‘저기압’은 ‘조선지광’에서 읽었다. 지난달에 동시(同詩)에 발표되었던 ‘마음을 갈아먹는 사람’에서 볼 수 있던 간단한 표현이 이 작(作)에 이르러서는 거진거진 틀이 잡히었다. 굵게, 간단하게, 확실하게-새로운 표현 형식을 지어내고자 하는 기뻐할 만한 노력이 작 전체에 넘쳐있다. 작자는 집세에 몰리어 쫓기어나게 된 주인공이 마누라와 싸움을 하고 밖으로 뛰어나오면서 느끼는 복잡착종하여 형언할 수 없는 심리를 극히 간단한 주인의 독어(獨語)를 씀으로써 완전히 표현하였다.

“네가… 이 조선땅 젊은 놈의 썩는 속은 누가 알까?… 저기 가는 저 소나 알까!” 한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극히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고 수법은 작중에 잠시 나타나는 인물들의 면영(面影)까지도 실재의 인물에 방불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우리들은 이 작품을 작자 자신이 체험한 고백으로 보아도 좋다. 그러면 작자가 쓴 것은 무엇이냐. 무기력한 지식 계급인 ‘나’라는 인물-그것은 금일의 조선 지식 계급의 일소전형(一小典型)-과 이 인물과 동형의 인물들이 처하고 있는 현대 조선의 무기력한 시대적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함에 작자의 정신은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빈궁에 쫓기기에 정신이 혼돈하고 사회적으로 아무러한 활약도 감행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존재의 위치에 서서 고민하는 현대 조선의 일 전형적 지식 계급자의 자화상-그렇다. 고민하는 자화상이다.

지난 달에 서해(曙海)형은 사회의 최하층에서 발효되는 시대적 사회 인심의 ‘저류(底流)’를 붙잡고서 거기에서 생장의 원칙을 구하고 인생의 의의를 암시하고자 하였다. 지금 조명희형의 ‘저기압’은 이것에 대조로 사회의 상층에서 중대한 직무도 가지지 못한 계급적으로 유리하는 지식군의 저기압과 같은 시대적 고민을 제시하였다. 저기압은 어느 때 불원한 장래에 빗방울이 되어서 폭풍우로 나타나리라. 이것은 자연계의 현상이다. 저류는 어느 때 반드시 두터운 얼음자의 틈을 벌리고 그곳을 유일의 유출구로 하고서 장강(長江) 전체를 굳게 폐쇄한 빙상에 덮어 흐르며 강안(江岸)에까지 범람하고야 마는 잠세력(潛勢力)을 가진 것이다. 저류는 어느 때 반드시 전해면을 요란하여 드디어 저 무서운 해소(解嘯)를 가져오고야 만다. 이것은 자연계의 현상이다. 그리고 ××××××××××××××× 그 이법(理法)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이곳에서 조명희씨의 ‘저기압’을 해부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된 서해형의 ‘저류’도 또는 조명희씨의 ‘저기압’도 둘이 다 함께 이 사회 현상을 제시하고 암시한 것임에 불외(不外)한다.

그러나 조명희의 ‘저기압’ 일편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는 점이 있으니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인공의 자기 해부의 정신이 결핍한 것이며 따라서 이 작품을 심각한 것으로 만들지 못한 점이다. 이것이 큰 불만이다. 또 한가지 불만을 말하면 ‘저기압’ 일편의 종결을 지은 최후의 일절이니 주인공의 독어-“이 거리에 이 사람들 위에 어서 비가 내리지 않나? 차라리 날이 개이든지…”라는 것이다. “어서 비가 내리지 않나?”하는 주인공의 심리는 작 전체에 큰 효과를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다음의 “차라리 날이 개이든지…”라는 일구는 내 생각에는 “이왕 오고야 말 비거든…”이라고 고치는 것이 좋겠다.

- 김기진, 1926년 12월, 조선지광 62호.

 

카프의 주요 맹원으로 활동하던 포석 조명희와 팔봉 김기진은 이미 밝혔듯 둘 다 충북 출신이다.(포석은 진천 벽암리, 팔봉은 청원 팔봉리가 고향이다.)

카프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가 팔봉이라면, 포석은 카프의 발전과 번성에 반석을 다진 이였다 할 수 있다.

웬만한 일로는 남과 척을 지지 않는 ‘사람좋은’ 포석이 김기진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었는지 정확하게 기술된 자료는 없다. 하지만 카프 내에서 자신의 신념과 다른 행보를 보이던 고향 후배 팔봉에게 호의를 갖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카프 내에서 포석을 따르던 이들, 자기 개성 강하고 원칙과 신념대로 밀어 부치는 한설야 등 카프 강경파들에게 1925년부터 ‘내용과 형식’으로 설전을 벌였던 김기진과 박영희는 ‘본질을 왜곡’시키는 마뜩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해서 한설야는 자신의 글 ‘정열의 시인 조명희’에서 박영희와 김기진을 두고 “변절자들의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 음모”라고 분개했다.

 

팔봉은 포석의 소설 ‘저기압’에 대해 “굵게, 간단하게, 확실하게-새로운 표현 형식을 지어내고자 하는 기뻐할 만한 노력이 작 전체에 넘쳐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덧붙여 주인공의 심리를 극히 간단한 독백을 통해 나타내면서 작중 인물의 형상화에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포석의 ‘저기압’은 개인적으로 빈궁이 쫓기기에 정신이 혼돈하고 사회적으로 아무런 활약도 감행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존재의 위치에 서서 고민하는 현대 조선의 전형적 지식 계급자의 자화상으로, 사회의 상층에서 중대한 직무도 가지지 못한 계급적으로 유리하는 지식군을 저기압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시대적 고민을 제시했다고 평한다. 그렇기 때문에 저기압은 어느 때 불원한 장래에 빗방울이 되어서 폭풍우로 나타날 것이라는 의미를 덧붙인다.

어찌됐든 팔봉은 이 문예월평에 이어 1927년 포석이 발표한 소설 ‘낙동강’을 두고 “이만큼 감격으로 가득찬 소설이-문학이 있었던가. 이만큼 인상적으로 우리들의 눈앞에 모든 것을 보여준 눈물겨운 소설이 있었던가. 이것은 어떤 개인의 생활 기록이 아니다. 이것은 현재 조선-1920년 이후 조선 대중의 거짓없는 인생 기록이다”고 극찬하게 된다.

 

다시, 김우진을 이야기 해야 할 것 같다.

그날 그랬었다.

1921년 포석과 수산 김우진이 홍난파 등 30여명의 청년들과 ‘동우회순회극단’을 꾸려 떠났던 고국 순회공연 막바지의 그날 밤이 그랬었다.

우진은 그날 밤 그녀를 보면 가슴이 뛴다고 말했었다. 처음 가져보는 설렘이요, 울림이라고 했다.

포석도 마음가는대로 하라고는 했지만, 우진에게 건네는 그 충고가 썩 자신의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윤심덕을 마음에 품게 되었노라 이야기 하던 김우진을 바라보며 까닭모를 두려움에 흠칫 몸을 떨었던 포석은 술만 말없이 비워냈었다. 그리고 그날 밤의 모습은 포석의 마음 한 켠에 늘 불길한 전조(前兆)처럼 새겨져 있었다.

1926년 8월 4일,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투신 정사(投身 情死)를 신문들은 앞다투어 보도했다.

전도유망한 천재적 아티스트에 풍부한 재력이라는 배경을 가진 김우진과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로 ‘사의 찬미’ 레코드 취입과 함께 대중적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윤심덕의 동반자살 사건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요란한 사건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포석이었다.

그동안 우진은 음으로 양으로 포석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동우회순회극단’을 꾸렸을 때도 그 막대한 비용을 김우진이 댔다. 여타의 예술가들을 위해서도 우진은 자신의 재력을 아끼지 않았다.

짐짓 모른체하고 있었지만, 우진이 가끔씩 자신의 아내에게 쌀말이라도 팔아먹을 수 있도록 돈을 부쳐온 것도 포석은 눈대중으로 알고 있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투신정사가 있을 때 포석은 북행(北行·러시아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5월 그믐께 김우진이 서울에 온다는 편지를 하고 전보를 쳐서 이른 아침 우진을 만났었다. 어느 여관에서 회포를 푼 뒤 우진은 포석에게 ‘출가(出家)’를 이야기했다. 포석은 기뻐했었다.

집안의 반대에도 예술을 위해 결연한 마음으로 집을 뛰쳐나온 우진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었다. 그때 우진은 재산도 버리고 가족도 버렸었다.

그랬던 우진이었다.

그런데 1926년 8월 5일 한나절이 기울 때 그가 죽었다는 기별을 포석은 듣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에 침묵으로만 일관하던 포석은 1년 뒤인 1927년 8월 27일 ‘김수산(金水山)군을 회(懷)함’이라는 글을 통해 그 먹먹하고 절절했던 마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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