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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31>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31>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6.03.06 1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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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의 삶을 추억하며 “왜 죽었노! 망한 것…”
▲ 포석이 절친 김우진의 죽음 1주기를 맞아 1927년 9월 1일 조선지광 71호에 쓴 ‘김수산군을 회함’. 포석은 이 글에서 진실로 신뢰했던 김우진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짧은 삶이 비극적으로 끝난 것보다 그 죽음으로 인해 조선 문단에서 우진의 재능이 사라진 것에 대해 더 애석해 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가장 친했던 벗 우진을 추억하며 쓴 포석의 글 ‘김수산(金水山) 군을 회(懷)함’은 당시 김우진과 윤심덕의 ‘현해탄 투신 정사’가 얼마나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지, 수산과 포석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고 포석은 그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 풀어내야 했는지, 그리고 삐뚤어진 매스컴으로 인해 포석 자신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포석은 너무나 먹먹하여 묵히고 묵혀두었던 상처, 수산의 자살을 두고 따따부따 세상에서 떠들어댔던 선정적 이야기들에 대해 “그가 죽은 뒤에 세상에서는 그의 죽음과 그의 생전 일에 대하여 멋대로 지껄이고 멋대로 판단을 내린다. 더구나 무근한 사실을 함부로 과장하여 내어 놓는 신문 잡지의 기사란 것은 차마 볼 수가 없을 만하였다”고 질타한다.

포석이 이 글을 쓴 때가 1927년 8월 27일, 수산 김우진이 사망한 날은 1926년 8월 8일.

포석은 우진이 죽은 뒤 1주기가 되어서야 “그렇건만 나는 이때껏 그의 일에 대하여 줄곧 침묵만 지켜왔었다. 그것은 그가 죽을 그때에도 나의 생각과 감정이 몹시 착란도 하고 변화도 잦았으므로 쉽사리 얼른 말하기가 싫었던 까닭이요, 그 뒤에는 때가 지나고 보니 뒤늦게 말하기도 어중되었던 까닭”이라고 서두를 연 뒤,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에 대해 “나는 그의 죽음이란 일에 이르러서는 말하지 않겠다. 세상 사람 판단 그대로 맡겨두련다. 또는 그의 생전 일에 대하여 세상에서 떠도는 올곧지 않은 풍설도 일일이 다 변명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죽음을 본 나의 감정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놀라고 그 다음에는 의심하고 슬프고 밉고 하는 갖가지로 갈아들이는 감정이었다. 바로 말이다마는 나는 그의 죽음을 가장 미워하던 사람의 하나였었다. 그러나 때가 지나고 느낌이 가셔진 이 때에는 다만 남아 있는 것이란 공리감(功利感)으로부터 나오는 아까운 생각 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독백처럼 되뇌인다.

“왜 죽었노!… 망한 것….”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던 우진의 죽음을 포석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해서 1년 동안 가장 친했던 벗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말문을 여는 순간 포석에게 우진은 ‘레테의 강(망각의 강)’(47)을 건넌 존재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포석은 우진이 간 지 1년이 지나서야 그의 죽음을 객관적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해서 포석은 “나는 그의 죽음을 무슨 시적으로 철학적으로 공상적으로 생각하기는 싫다. 나는 산 사람이요 현실인이다. 그의 죽음을 오늘날 있어서는 공리감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일 이외에도 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은 포석 자신의 가슴 속에 오롯이 남겨져 있는 수산과의 추억들이었다. 그래서 “왜 죽었노!… 망한 것” 하면서 포석은 수산이 생각날 때마다 혼자이면 욕(辱)을 하여 부친다.

그러면서도 포석은 우진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대신 잃어버린 우진이라는 사람을 이야기하겠다고 한다.

포석의 글을 보면 그가 우진을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는지 잘 드러난다.

포석이 둘도없이 신뢰하던 벗이었고 그 신뢰는 평생을 나갈 것이라고 믿었던 우진은 인간으로서 진실하였고, 그 진실은 가까이 하는 사람의 거짓을 없앨 만큼 깊은 것이었다고 포석은 말한다.

그렇듯 믿을 수 있는 친구요, 진실했던 벗 수산을 떠올리며 “그의 꼭 다문 입, 그윽이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또 다시 눈에 떠오르는구나. 수산! 그대의 앞길은 영원히 비었다. 나의 걸음도 허전허전하구나!” 한탄한다.

 

이 즈음 포석에게 조선 문단은 한낱 쓰잘데 없는 ‘잡동사니’에 불과했었다. 일제에 영합하여 글을 쓰는 글쟁이도 싫었고, 민중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며 나약한 감상에만 젖어 글을 쓰는 부류들도 싫었다.

조선의 민족을 위하여, 조선의 민중을 위하여 수많은 밤을 새우며 사고하고 글을 쓰고 또 실천해 온 날들에서 포석은 때론 상처를 받았고, 때론 낙담했으며, 때론 절망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어주던 벗, 우진이 있었다.

포석은 인간적 신의로 우진을 믿었고 그의 놀랄만한 정력을 믿었고 예삿사람으로 하지 못하는 그의 과단을 믿었었다.

함부로 그를 추어대자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굳센 편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믿었다. 그래서 포석이 소위 조선의 문단인이란 것들에게 사람으로서 낙망을 가진 때에 수산을 생각하고 이런 말을 혼자 하였던 것이다. “잡동사니들의 문단인. 그러나 오직 수산만은 참된 물건일 것이다. 두고 보라. 앞으로 이 참된 물건이 하나 나올 때가 있을 터이니….”

 

김우진은 포석을 평생의 동지로 생각했다. 일본 동경 유학시절부터 포석의 성품에 반해 그를 평생의 벗으로 삼은 우진은 포석에게는 일기뿐만 아니라 편지도 자주 했다.

윤심덕과의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가정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던, 그리고 문학을 포기하고 부친의 가업을 이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던 우진에게 포석은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속마음을 비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

우진은 포석에게 보낸 편지에 “형은 요새 어떠시오. 형의 그 곧은 심플한 천진하고도 열있는 얼굴, 입, 코, 눈앞에 기회있을 때마다 나타납니다. 되게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썼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닮은 스트린드베리(48)를 이야기 했다.

그 편지글을 보면 우진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고독했었나를 짐작할 수가 있다.

 

(47)레테의 강

레테(Leth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리스(분쟁의 여신)의 딸이며 망각의 화신이다.

또한 지옥세계에 있는 강이나 평원의 이름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의 신비주의 종교인 ‘오르페우스교’에 따르면, 기억의 샘(므네모시네)과 망각의 샘(레테)은 지하세계의 입구로 생각되었던 트로포니우스 신탁이 있는 레바데이아 근처에 있다고 한다.

레테의 강은 그리스 신화 속의 강으로, 아케론, 코퀴토스, 플레게톤, 스틱스와 함께 망자가 하데스가 지배하는 명계로 가면서 건너야 하는 저승에 있는 다섯 개의 강 중 하나이다. 망각의 강이라고 불린다.

망자는 명계로 가면서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되는데, 강물을 마신 망자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깨끗이 지우고 전생의 번뇌를 잊게 된다.

하데스 왕국의 다섯개의 강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아케론(Acheron)은 슬픔과 비통, 코키투스(Cocytus)는 탄식과 비탄, 플레게톤(Phlegethon)은 불, 레테(Lethe)는 망각, 스틱스(Styx)는 증오를 상징한다.

 

(48) 스트린드베리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

berg)는 1849년 1월 22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1912년 5월 14일 스톡홀름에서 사망했다.

심리학과 자연주의를 결합시킨 새로운 종류의 서구극을 만들어냈으며, 이것은 후에 표현주의 극으로 발전했다.

아버지 카를 오스카 스트린드베리는 파산한 귀족으로 증기선 선원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술집 종업원 출신이었다.

자서전 ‘하녀의 아들’(1886~87)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어린시절은 정서불안, 가난, 할머니의 종교적 광기, 무관심 등에 상처를 받았다.

웁살라대학을 다녔고 처음에는 성직자, 나중에는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으나 끝내 학위를 받지 못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스톡홀름에서 자유기고가로 일했다. 이때 스웨덴의 종교개혁을 다룬 사극 ‘올로프 선생’(1872)을 완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 작품은 그의 첫번째 대표작이었으나 왕립극장에서 ‘올로프 선생’의 공연을 거부하자 그의 비관주의는 더욱 깊어졌다. 이 작품은 후세에 스웨덴 최초의 현대극으로 인정받았다.

첫 번째 결혼. 1874년 스트린드베리는 왕립 도서관의 사서가 되었고, 이듬해 귀족의 아내 시리 폰에센을 만나자 곧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2년 후 남편과 헤어져 스트린드베리와 결혼했다. 그러나 모두가 격렬한 개성의 소유자인 이들의 사이는 얼마 후 싸움이 그칠 사이가 없게 되었다.

1879년, 스톡홀름의 예술가 사회를 묘사한 소설 ‘붉은 방’으로 그는 새로운 사실주의 문학의 기수가 되어 명성을 획득했다. 이어 여배우가 된 아내를 위한 몇몇 희곡도 썼으며, 1883년 아내와 함께 스웨덴을 떠나 이후 16년 동안을 거의 외국에서 보내게 된다.

두 번째 결혼. 1893년인 44세 때 그는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상대는 젊은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 프리다 울이다. 그러나 결혼은 곧 파탄났다. 이듬해 두 사람은 별거하여 스트린드베리는 파리에서 격렬한 정신적 불안정 상태를 경험한다. 이것은 의학상의 정신착란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1897년, 스트린드베리는 이혼했다.

세 번째 결혼. 1901년 스트린드베리는 노르웨이의 여배우 하리에트 보세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재능있는 여배우 보세는 몇몇의 스트린드베리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으나 결혼생활은 이윽고 다시 파국을 맞이하여 3년 후에 이혼한다.

마지막 사랑. 그의 마지막 연애 상대는 파니 파르크네라는 19세의 소녀였다. 그는 그녀의 집(그것을 그는 ‘푸른 탑’이라고 불렀다)에 하숙하고 있었으며 59세와 19세라는 연령 차이를 생각하여 결혼은 단념했다.

1912년에 그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립 아카데미는 그의 죽음을 묵시했으나, 스웨덴 최고의 작가로서 그의 이름은 널리 국민의 존경을 모았다.

성격과 작풍에 있어서 같은 북구의 거장 입센과는 반대의 입장에 서는 스트린드베리는 그 본질을 구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얼핏 보면 혼돈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그의 표현주의 작품에서도 그 저류에 흐르는 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구성과 내용이다.

대표작으로는 ‘아버지’(1887), ‘줄리양’(1888), ‘채권자들’(1888), ‘꿈의 연극’(1902), ‘유령 소나타’(19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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