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아내가 식탁에 메모 한 장 놓고 외출했다.

당신에게 바라는 점

1)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아침저녁으로 전화하기

2) 하루에 두 번 이상씩 사랑한다는 말 해주기

아내와의 전화는 힘이 부친다.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니까 듣기 힘들다. 그런데 하루에 두 번씩이나 전화 하라니. 그리고 부부가 오래 살다보면 정으로 사는 거지 꼭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하나. 아내의 일방적인 요구에 은근히 부아도 나고,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다는 게 아무래도 닭살스럽다. 이보다 더 큰 형벌은 없는 듯싶었다. 무시해버릴까 하다가 왠지 찜찜해서 주머니 속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이상하게 자꾸 궁금해진다. 전철 안에서 메모를 다시 읽어보았다. 꾹꾹 눌러 정성스럽게 쓴 글씨였지만 내려 긋는 선이 흔들렸다. 어딘지 모르게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 같았다. 언젠가 아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은 아파서 죽는 게 아니라 외로워서 죽는대.’ 가슴이 조금씩 아려왔다. 내가 너무 무심한 건 아닐까. 타인은 가까운 사람처럼 여기고 정작 가까운 아내는 타인처럼 여겨온 것이 아닐까. 차라리 이러저러해서 당신과는 더 이상 못살겠다고 써 놓았으면 내 가슴이 이토록 아리지는 않았을 텐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아내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생겼다.

사랑한다, 는 말을 하던 첫날은 얼마나 힘들었던지.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고 모기만한 소리를 내는 데도 식은땀이 흘렀다.

며칠 후 또 아내의 메모가 식탁에 놓여 있었다. 이번 메모는 문장이 좀 보태졌다.

“사랑해 소리 들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져. 그런데 나는 당신이 전화 끊을 때는 ‘사랑해’ 하고 끊었으면 좋겠어.”

마음이 편안해져, 라는 글귀를 보니까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헌데 꼬리가 붙어 있으니까 부담스러웠다. 전화할 때마다 사랑해 소리를 두 번씩 하라는 뜻이다. 그래도 내친 김에 하나는 해야지. 젖 먹던 힘을 다해 매일 전화할 때마다 그 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사랑해’ 하고 끊었다. 그리고 며칠 후의 메모장에는 꼬리가 더 붙었다.

“사랑해, 하고 그냥 끊지 말고, 끊어요, 하고 끊으면 어떨까.”

‘어쭈, 갈수록 태산이네.’ 이러다가 한도 끝도 없이 꼬리가 붙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기가 생겨 딱딱 끊기는 목소리로 ‘사랑해, 끊어.’ 하고 통화를 마치곤 하였다. 며칠 후에 적힌 메모는 아내가 마치 내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끊어요, 나는 이 소리가 제일 듣기 좋더라.”

습관은 참 편하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하다. 아내와 전화로 밀고 당기는 사이 조금씩 아내에게 길들여져 갔다. 아내가 시시콜콜 하는 말이 점차 시냇물처럼 리듬감 있는 소리로 흘러들었다. 결혼하고 40년 만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런 날이 100일째 되는 날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립 서비스라도 괜찮아요. 사랑해요.”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하지만 아내의 속마음이 읽혀졌다. 아내한테 필요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남자가 아니라 친구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보 ‘메모’ 중에서)

소금이 들어간 음식이 오래간다. 어떤 음식이든 소금이 들어가야 썩지 않는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사랑은 소금과 같다. 사랑하는 만큼 관계가 유지되고, 사랑의 양만큼 관계가 깊어진다. 사랑이 엷어지면 관계가 시들해지고, 사랑이 끊기면 관계도 끊긴다. 사랑이 식으면 부부관계도 타인처럼 서먹해진다. 그 때 부부 사이에 위기가 온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위대한 힘은 내 안에 꼭꼭 숨겨진 2,8%의 사랑을 꺼내는 일이다. 그 때 사랑을 꺼내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본래모습을 되찾고, 내 삶의 주인의 자리를 되찾는 사람이다. 금이 간 부부 관계를 회복하고, 부부 사이의 더 많은 잠재력을 키워갈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랑은 신이 준 선물이다. 슬픔을 아는 나이가 되더라도 사랑만큼은 놓지 말자. 그리고 필요할 때 언제든지 꺼내서 쓰자. 부부, 사랑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청주대 명예교수>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