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의 영향을 받아 쓴 우진의 희곡 ‘산돼지’

▲ 김우진이 포석에게 보낸 편지글. “조명희 군의게. 오랫동안 적조햇소이다. 내 생활이야 그러닛가(형의 상상대로) 형의게 쓸 생각이 매일 몇번식 있었으면서두 못하고 못하고 못하고 지내 왓슴니다. 창작욕이 성盛하면서도(실상 졸업 전보다는 정신상의 자유가 잇스닛가, 아쥬 이 충동이 만사외다.) 시간이 업서 그져 지냄니다. 그러지만 외부의 생활을 하는 살람의게 두 가지 태도가 잇을 것을 요새…” (하략)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趙明熙君에게

창작욕이 성하면서도 시간이 없어서 그저 지냅니다. 스트린드베리가 30대 때의 스웨덴의 사회적 분위기를 맛본것 같은 큰 걸작이 지금 일 소부르조아 가정 안에서 생활하는 내게도 돌아올 것이외다. 나는 숙명론자요, 숙명을 벗어나지 못할 줄 압니다마는 한 가지 이 how의 생활에서 내 가치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요사이 실업(實業)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 어떻게 보일지 모르나 그러나 나는 나요! 겉으로 일 광인(狂人)에 지나지 못한 swedish dramatist의 생활을 난 흠모합니다.

- 1924년 8월 24일, 포석에게 쓴 김우진의 편지글

 

포석에게 보낸 이 편지는 우진이 ‘스웨디시 드라마티스트’로 지칭한 스트린드베리의 삶을 자신의 삶에 투영시켜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 결혼도 파탄이 나고 마지막으로 59세 때 19세의 소녀 파니 파르크네를 만나 사랑을 꿈꾸었던, 하면서도 결국 결혼에는 이르지 못한 스트린드베리의 삶을 윤심덕을 만나 사랑을 꿈꾸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하고 번민에 빠져 있는 자신의 모습에 오버랩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여 우진에게 스트린드베리의 삶은 가정과 일에 얽매여 있는 자신이 꿈으로나마 지향할 수 있는 이정표였고, 해서 우진은 말년에 정신착란을 앓았던(현대 의학상 정설로 알려져 있음) 광인(狂人) 스트린드베리의 삶을 흠모한다고 포석에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김우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다섯번째 희곡 ‘산돼지’는 조명희의 낭만시 ‘봄 잔디밭 위에’에서 암시를 받아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포석이 동경 유학시절과 조선으로 돌아와 쓴 초기작 ‘봄 잔디밭 위에’는 좌절을 당하고 상처를 입은 한 인간이 ‘이데아(Idea)’를 찾아 방황하는 모습을 묘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아 김우진은 자신의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산돼지를 쓰게 되는데, 김우진이 쓴 산돼지의 주제는 그의 주된 사상이라 할 사회 윤리개혁이었다.

우진은 사회개혁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신의 운명에 아픔을 느끼고 있었고, 그런 까닭에 산돼지는 일제 탄압과 봉건적 유습의 견고한 고옥(古屋) 속에 유폐되어 좌절과 절망 속에 몸부림치던 개화기 지식인의 고뇌를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산돼지의 주인공인 원봉은 ‘나라를 위해, 중생을 위해, 백성을 위해, 사회를 위해’ 동학당(東學黨)에 가입하여 혁명에 참가했다가 죽은 동학군의 아들이다. “내 뜨슬 받아 양반놈들 탐관로리들 썩어가는 선비놈들 모두 잡아죽이고 내 평생 소원이던 내 원수를 갚지 않으면 산돼지탈을 벗겨주지 않겠다”는 부친의 엄명을 받은 자이기도 하다. 원봉은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사회개혁이란 큰 사명을 지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목베인 항우(項羽)처럼 참패하고 산돼지처럼 산등성이를 헤매다가 결국 한 여성에게 돌아간다.

김우진이 조명희에게 보낸 편지에는 ‘주인공 원봉이는 추상적인 인물이요, 조선 현대 청년중의 어떤 성격과 생명력을 추상해 놓은 것이요, 기 성격 중에는 형도 일부분 들고 김복진(49)군도 일부분 든 것 같소이다”라고 썼다.

이처럼 산돼지는 좌절한 개화 지식인의 임상보고서와 같은 작품이다. 우진은 포석에게 주인공 원봉의 캐릭터를 포석 조명희와 정관 김복진을 투영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산돼지’는 그 자신이 고백했듯 김우진이 가장 자신을 갖고 쓴 작품이며 그 자신의 ‘생의 행진곡’으로 그의 일생뿐 아니라 시대적 고통과 지식인이 감각적으로 느낀 시대정신을 가장 심도있게 묘사한 작품인 것이었고, 그 발원은 포석의 ‘봄잔디밭 위에’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김우진은 그가 좋아하는 연극을 보기 위해 축지소극장에 열심히 다녔고 연극평인 ‘축지소극장에서 인조인간을 보고’라는 글을 써서 서울에 있는 조명희에게 부치기도 했다.

우진은 6월 29일자 조명희에게 보낸 편지에 “머리 속에서는 무엇이 무럭무럭 기어나오는 것 같소이다. 원고도 분을 아끼지 않고 쓰고 있습니다”라고 썼고, 7월 9일자 편지에는 “좌기 서책 좀 구해서 보내주시면 4~5일간에 곧 보내그리겠습니다”라면서 갑자(甲子)년 동학난리에 관해 기록한 책과 ‘개벽’ 잡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마지막 작품 ‘산돼지’의 마무리를 위해서였던 것이다.

 

포석이 쓴 글 ‘김수산(金水山) 군을 회(懷)함’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포석은 “수산이 앞으로 사오 년, 오륙 년만 더 살았던들 상당한 업적과 수확을 문단에 또는 사회에 끼쳐놓았을 것”이라며 한탄한다.

그리고 우진과의 첫 만남을 추억한다.

“벌써 8년이나 되었나 보다. 내가 처음으로 동경을 갔을 때이다. 군은 그때 와세다 영문과 재학중이었다. 그해 여름에 와세다대 그라운드 옆 장백료(長白寮) 일실(一室)에서 군을 처음 만났었다. 내가 군을 처음 본 인상은 ‘몹시 침착한 사람, 단단한 사람, 심각한 곳이 있는 사람, 책임성이 많은 사람’, 그러므로 이쪽에서 여간 데면데면한 소리를 하여서는 아니 되겠다는 경계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첫 자리에서 남에게 믿음성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같은 문예의 길의 동반자, 아니 동반자라는 것보다도 그때 나는 그를 나에게는 접장격(接長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뒤에는 피차에 문예 동호의 도(徒)로서 상종이 잦아졌다. 나는 습작의 시구나 글 같은 것을 쓰면 으레 쫓아가서 그의 비평 아래에 찬(讚)과 폄(貶) 받기를 즐거워하였다. 그는 나에게 앞길을 가다듬는 말을 가끔 하여준다. 나도 삼가 듣는다. 나는 또 가다가 마음의 괴로움이 있을 때에는 또한 달려가 가슴을 풀어 헤쳐서 이야기 한다. 그는 무슨 책임이나 진 듯이 사려 깊은 태도로 나의 말을 들으며 나의 길을 힘써서 생각하고 말하여 준다. 나는 이때부터 ‘평생을 신뢰할 만한 친구 하나를 얻었다. 이 다음에 가서 사상과 행동에 극단의 배치가 없는 한도에는…’ 하고 생각하였다.”

 

그처럼 첫 만남부터 포석에게 우진은 둘도 없는 벗이요, 문학의 길을 걷는 동료이자 그에게 접장격 지도자가 될만한 문학적 리더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여름에는 동우회극단(同友會劇團)의 조선 순회공연에서 더욱 공고해진 우정을 말한다. 그때 무대감독이었던 우진과 포석은 한 달 이상이나 동고동락하며 다녔던 것이다.

동우회극단 조선 순회공연을 다닐 때에도 포석에게는 수 십 명이나 되는 단원이라는 잡동사니패들 가운데 오직 김수산 만은 착실한 사람으로 보였을 정도로 그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던 것이다.

그리고 통영에서 마산으로 밤배를 타고 돌아오던 길에서 보았던 우진의 모습을 그리워 한다.

“거의 다 샐 때가 되어 갑판 위로 올라가자니까 마침 군도 어디서 툭 튀어나온다. 가지록 잠자리에서 나오는 모양이다. (누구나 다 가지록 잠 깬 얼굴은 천연스럽지만) 그때 바다 아침을 배경으로 한 군의 보숭보숭한 얼굴 까막까막하는 검은 눈동자, 나에게 주는 인상은 얼른 ‘이 순진하고도 참한 귀여운 아기!’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는 혼자 빙그레 웃으며 그를 맞았었다.”

 

1923년 봄 동양대학 졸업을 앞두고 생활난으로 귀국하게된 포석은 학업 때문에 동경에 계속 머물러 있던 우진과 한 두해 정도 서신도 잦지 못했고 적조했었다. 학교를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와서 부친의 가업을 이어 사업에 몰두하게 된 우진의 소식을 듣고 포석은 깜짝 놀라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듯한 우진의 행보에 분한 생각이 들어 심하게 꾸짖는 편지를 쓴다.

우진의 답장이 곧 도착했는데, 포석의 편지를 보고 우진은 울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우진은 포석에게 처음으로 친구 하나를 이 세상에서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포석 또한 우진의 속마음을 알고 잃어버릴 뻔한 친구 하나를 다시 얻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49 김복진(金復鎭)

 

1901년 충북 청원 출생, 1940년 사망. 호는 정관(井觀) .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이며 소설가 김기진(金基鎭)의 형이다.

김복진은 1920년에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하여 조각을 전공하고 1925년에 졸업했다.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모교인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 미술 교사, 경성여자상업학교와 경성공업학교 도기과(陶器科) 강사를 지냈고, 서울 기독교청년회 청년학관 미술과에서 조각을 지도하며 새로운 조각계를 태동시켰다.

그는 전공인 조각 이외에 문학과 연극에도 관심을 나타내어, 1923년에 동경에서 김기진·이서구(李瑞求) 등과 신극 운동(新劇運動)의 단체인 ‘토월회(土月會)’를 만들었다.

그해 서울 공연에서는 무대 장치를 맡았으며, 같은 시기에 따로 ‘토월미술회(土月美術會)’를 꾸리고 서울 정동에서 남녀 연구생에게 신미술의 조각을 지도하기도 했다.

1924년에 작품 ‘여인입상’이 동경의 제국미술원전람회에 입선했고, 1925년 서울의 조선미술전람회에 자각상(自刻像)으로 생각되는 ‘3년전’과 ‘나체습작’이 입선됐다. 또 1926년 조선미술전에 나체상인 ‘여인’이 특선에 올랐다. 모두 석고로 빚은 사실적 조형이었다.

김복진은 1925년 KAPF에 참여한데 이어 엠엘당(ML黨)에 가담했다가 1928년 3차 공산당 검거 때에 붙잡혀 6년간 수감생활을 한다.

1933년 출옥, 1935년 생활을 위해 중앙일보사에 입사, 학예부장으로 미술 비평을 쓰기도 하면서 작품 제작에 열중했다.

1936년 병을 얻어 1940년 사망할 때까지 조선미술전에 출품한 ‘목’, ‘불상습작’, ‘나부(裸婦)’, ‘위이암(韋利巖)선생상’, ‘백화(白花)’, ‘소년’ 등이 특선에 올랐다. 그 작품들을 동생 김기진이 보관했으나 6.25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

1936년에 만든 금산사 요청의 ‘미륵대불’과 1939년에 정읍 김수곤(金水坤)의 시주 3만원으로 착수했던 충북 보은 법주사의 ‘미륵대불’이 그이 작품이다. ‘법주사미륵대불’은 광복 이후 윤효중, 장기은, 임천 등의 손을 거쳐 1963년에 변질된 형태로 완성되었고, 현재는 청동대불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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