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명 기 동양일보 편집부장

(김명기 동양일보 편집부장)바둑을 처음 배운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겨울방학을 맞아 빈둥거리는 아들 모습이 좀 뭣했던지 선친께서는 바둑판과 바둑돌을 가져와 앉으라 했다. 9점 접바둑에 덤을 100집 얻고도 판판이 졌다. 바둑의 룰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달 동안 바둑을 배우면서 덤은 없어지고, 아홉점 치수는 넉점까지 내려왔다. 승부라는 게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었다. 그러던 어느날, 비세를 느끼고 승부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바둑돌을 세게 내려 놓았다. 일본 프로기사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가 도끼로 찍듯이 착점을 하는 것처럼. 아버지와의 대국에서 말이다. 아버지는 잠시 나를 쳐다보시더니, 그냥 돌을 거두어 버렸다.

“바둑은 이기는 것 보다 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아차 싶었지만, 일수불퇴의 무례함. 이후 아버지는 나와 대국을 하지 않으셨다. 벌써 37년 전의 일이다.

그때의 아버지 나이보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가끔 대국을 가졌다. 그때엔 아버지가 나에게 다섯점 치수를 놓고 두셨다.

물론, 무례하게 돌을 세게 내려놓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요즘 온통 이세돌 이야기다.

구글에서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국이 온 국민의 관심을 끌고 있다. 바둑 프로기사들은 물론, 이세돌 본인까지 5대0의 승리를 장담했다. 유럽 챔피언 판후이와 둔 알파고의 실력을 보고 유추해본 결과다. 그러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세돌은 3국까지 단 한판도 이기지 못했다.

인공지능은 지속적으로 진화했던 것이다. 해서 판후이와의 대국 때보다 수읽기가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됐던 것이다.

1000여대의 슈퍼컴퓨터와 벌이는 인간 이세돌의 사투는 마치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지구를 찾아온 아놀드슈왈츠제네거와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CPU에 GPU까지 장착하고, 정책망과 가치망으로 로봇처럼(실제 로봇이지만) 냉철하게 판을 짜는 모습을 보면 숨이 턱턱 막혀왔다. 완벽이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고, 인간은 알파고를 이길 수 없을 것이란 비관론이 나왔다. 세계 초일류기사로 꼽히는 이세돌은 “자신이 없어요, 질 자신이”라는 어록을 남길만큼 늘 자신만만했었다. 바둑의 미학, 아름다운 바둑을 두겠다던 이세돌의 말이 무색해졌었다.

하지만 이세돌은 도전에 응전하는 인간이었다. 피말리는 악전고투 끝에 이세돌은 알파고로부터 항복선언(불계승)을 얻어냈다. 의표를 찌르는 이세돌의 승부수는 알파고를 멘붕에 빠지게 했고 버그가 난 것처럼 아마추어조차 눈을 의심하게 하는 ‘떡수’를 연발하게 했다.

“바둑은 내 존재다. 바둑으로 내 존재를 증명할 수 있어서 많이 행복했다”고 말한 이세돌은 인공지능을 이긴 유일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증명했다.

4국에서 ‘인간 승리’를 일궈낸 이세돌은 마지막 5국에서는 자신이 흑을 잡고 싶다고 했다.

이세돌이 흑으로 두겠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백돌 잡고 이겨봤으니 ‘불리한’ 흑돌로 정면승부를 벌이겠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한국과 중국의 바둑 룰의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

바둑에는 ‘덤’이란 것이 있다. 흑선으로 두게되면 그만큼 집을 많이 지을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흑을 잡은 이에게 여섯집 반을 덤으로 제하고 계산을 한다. 그래서 나타나는 승률은 반반이다.

중국 룰은 흑선을 잡은 이에게 덤을 일곱집 반을 제한다. 한국 룰과 비교하면 한집을 손해보는 것과 같다. 중국룰의 승률은 백이 아주 미세하게 앞선다.

프로기사에게 한집은 매우 크다. 한집 때문에 작전과 전략이 달라지고, 한집 때문에 강수가 나오고, 한집 때문에 판세를 그르치기도 한다.

해서 이세돌이 흑선으로 두겠다는 것은 알파고에게 한집을 더 제한다는 페널티를 받으면서 두겠다는 것이었다. 승리가 목적인, 그래서 ‘아름다운 바둑’은 생각조차 없는 기계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알파고에게 이세돌은 인간으로서의 바둑을 두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5국. 초반 판세를 약간 우세하게 진행하던 이세돌이 중반과 마지막 끝내기 국면으로 가면서 결국 졌다. 계산 능력이 신의 영역에 속한다는, 슈퍼 컴퓨터 1000여대로 연결망을 갖춘 알파고를 계산으로 이긴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세돌은 인간의 직관에 의한 바둑으로 4국을 승리로 이끌었고,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며 5국에서 졌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패배를 ‘아름다운 패배’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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