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게 점점 팍팍해진다. 정이 점점 메말라 간다. 사람들이 점점 개인주의로 변해간다. 많은 사람들 특히, 어르신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다. 집에서 식구들끼리 밥을 먹을 때도 말이 거의 없고, 직장 동료들과 점심시간에 가까운 식당에 가도 눈을 맞추고 담소를 나누기 보다는 제각기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에 눈을 고정하고 묵묵히 밥만 우걱우걱 먹는 풍경이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세상사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뉴스에서는 층간소음으로 칼부림이 났다느니 부모가 친자식을 때려서 숨지게 했다느니 길가던 행인을 이유없이 살해했다느니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사건들이 연일 나오고 있다.

언제부터 우리사회가 이웃사촌에게 무관심하게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살아온 것일까? 환경직 공무원으로 20년 이상을 환경분야에 근무하면서 현장에서 느끼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웃집의 개가 짖는다. 이웃 슈퍼에서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다. 옆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냄새가 들어온다. 이웃집 철거하는 소리가 시끄러우니 조치를 해 달라 등등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하고 소박한 내용들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나의 불편사항만 있을 뿐이다. 왜 불편하게 되었는지 무슨 일로 이런 상황이 생겼는지 문제에 대한 고찰이나 탐색 또는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없다. 민원전화를 받으면서 불편한 것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거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지에 대해 반문할 때면 늘 같은 대답이 나온다. 왜 내가 얼굴 붉히면서 불만을 얘기를 해야 하는가. 다 필요없고 공무원이 찾아가서 얘기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평소 이웃에 대한 관심과 교류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왜?”라는 의문이 먼저 생기고 먼저 다가가서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하지만 나의 불만들만 쏟아낼 뿐 어느 누구도 내가 한발 다가가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보고 상대방을 입장을 알아보려는 경우는 없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사는 동안 주변에서 내 엄마, 내 집, 내 나라, 내 학교라는 말을 하거나 들어 본적이 거의 없다. 우리 엄마, 우리 집, 우리 나라, 우리 학교 등 “우리”라는 말을 당연한 듯 항상 동반하여 사용해왔다. 이것은 옛날부터 나, 내 것 이라는 개인적인 관점보다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오면서 서로에게 애정 어린 관심과 배려를 하며 살아온 조상들의 오랜 삶의 방식이 언어에도 배어 있는 것 같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은 점점 더 나 이외의 주변이나 이웃에는 관심이 멀어지고 있다. 친구가 없어도 이웃과 교류하지 않아도 인터넷이라는 광활한 사이버 세상을 헤메며 얼마든지 시간을 보내고 즐길 수 있다. 사이버 세상과 접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가족과 이웃과 눈을 마주치는 횟수가 점점 줄고 주변에 대한 관심도 줄어드는 것 같다.

대화를 할 때면 눈을 마주하며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컴퓨터를 보면서 또는 핸드폰을 보면서 하는 것 또한 익숙해져 가고 있다. 상대방의 눈을 마주 쳐다봐야 그 사람의 마음이 짐작되고 서로 공감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길텐데...

자 지금부터라도 컴퓨터에서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옆에 있는 동료의 또는 한 공간에서 살고 있는 가족의 눈을 쳐다보고 마주보면 어떨까. 거기에 따뜻한 나의 온기를 담뿍 담고 미소라는 양념까지 덧붙이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루에 한번씩 이라도 이런 노력을 한다면 내 주변 내 가족에게 미약하나마 나의 따스함이 전달될 것이고 그 따스함들이 모이고 모이면 이 사회가 좀 더 훈훈해지고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당장 지금부터 햇살가득 머금은 미소와 따스함을 담은 눈빛으로 세상을 가족을 이웃을 바라보고 마주보도록 노력해야겠다.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하는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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