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의 대표작·프로문학의 금자탑 ‘낙동강’ 발표’”

▲ 1928년 4월 20일 백악사에서 발행한 조명희의 프로문학 대표 단편소설 ‘낙동강’ 소설집.(가운데) 국한문 연활자(鉛活字) 방식으로 인쇄됐다. 포석은 1927년 7월 구포벌을 배경으로 일제 강점의 농촌현실을 다룬 소설 ‘낙동강’을 조선지광 69호에 발표하고 이듬해 4월 20일, 두 아이를 업고 황량히 나루를 떠나는 표지 그림의 프로문학 최대의 걸작 소설집 ‘낙동강’을 백악사에서 펴냈다. 13.8×19.8㎝ 크기로 정가는 50전. 포석이 저자 및 발행자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백악사를 설립해 직접 책을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은 포석의 조카인 조중흡(벽암)과 조중협(우봉)이 함께 운영하던 건설출판사에서 발간한 소설집이고, 오른쪽은 1946년 북조선예술총연맹의 산하단체로 출발한 조선작가동맹출판사에 발간한 조명희 선집 ‘락동강’이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포석이 신간회의 결성과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은 그가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 사이 하나의 ‘공유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로 분류되는 포석은, 그러나 극단적이고 협착(狹窄)한 사상적 틀에 갇혀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지사(志士)로서의 면모로 유연하고 포용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가진 그런 ‘사상적 여백’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섞이지 않을 듯했던 물과 기름의 관계를 융합시킬 수 있었던 큰 틀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화학적 결합’은 언젠가는 깨질 운명을 내포하고 있었다.

신간회는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은 신간회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고 신간회는 거기에 무력한 모습만을 보일 뿐이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운동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전위와 아래로부터의 반제통일전선 결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므로 신간회 해소에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그 방법에 있었다.

 

1928년 말 신간회는 국내외에 143개 지회와 3만여명의 회원을 확보할 만큼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기하급수적으로 조직이 커지자 당연히 일제는 큰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 일제는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 진영의 동태 파악과 계보 활동을 추적하고 구금하기 위해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신간회를 허가해 주었다. 그러나 감추어 두었던 속내와는 달리 신간회의 위세가 점차 높아지자 일제는 조직에 대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신간회의 대규모 전체회의를 허가하지 않은 점이 이를 반증한다.

1929년 말에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고자 개최하고자 했던 광주실정보고 민중대회를 중지 요청했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병옥, 김무삼, 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槿友會) 간부 등 40여명을 구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갈등·대립으로 분란이 계속되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했고 창립된 지 만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포석이 소련으로 망명한 것이 1928년 8월 21일이었으니, 창대할 것으로 보였던 신간회가 그가 떠난 지 불과 3년도 안돼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강압적이고 집요한 일제의 탄압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여기에 더하자면 포석이라는 완충적 공간이 사라진 신간회는 브레이크 없이 마주 달려오는 기관차와 같았기 때문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1927년 7월 1일, 포석은 자신의 삶과 문학 가운데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소설 ‘낙동강’을 조선지광 69호에 발표한다.

포석을 돌이켜볼 때 소설 ‘낙동강’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 소설이 가진 문학사적 의의와 더불어 문학적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낙동강 칠백 리, 길이길이 흐르는 물은 이 곳에 이르러 곁가지 강물을 한몸에 뭉쳐서 바다로 향하여 나간다. 강을 따라 바둑판 같은 들이 바다를 향하여 아득하게 열려 있고 그 넓은 들 품 안에는 무덤무덤의 마을이 여기저기 안겨 있다.

이 강과 이 들과 저기에 사는 인간-강은 길이길이 흘렀으며, 인간도 길이길이 살아왔었다. 이 강과 이 인간 지금 그는 서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면 아니 될 건가?

 

봄마다 봄마다

불어 내리는 낙동강 물

구포(龜浦)벌에 이르러

넘쳐넘쳐 흐르네-

흐르네-에-헤-야.

 

철렁철렁 넘친 물

들로 벌로 퍼지면

만 목숨 만만 목숨의

젖이 된다네-

젖이 된다네-에-헤-야.

 

이 벌이 열리고

이 강물이 흐를 제

그 시절부터

이 젖 먹고 자라 왔네

자라왔네-에-헤-야.

 

천년을 산, 만년을 산

낙동강! 낙동강!

하늘가에 간들

꿈에나 잊을소냐-

잊힐소냐-아-하-야.

- 조명희, 낙동강, 조선지광 69호.

 

소설 ‘화두’의 작가 최인훈은 포석을 두고 말한다.

“인간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탐구에서 얻어진 이성적인 판단에 생애 자체를 일치시키려고 한 치열한 의식의 의미는 지금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생활과 예술에서의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리고 포석의 ‘낙동강’과 포석의 삶을 대비시켜, 식민 통치하에서 가능한 한계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포석의 문학과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조명희는 이런 위험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장을 취한 문학적 유파에 속해 있었으나, 그도 결국 국외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입장은 국내에 머무는 한 끝까지 유지하기 힘든 태도였기 때문이다. ‘낙동강’에서도 국외에서 활동하다가 국내로 돌아온 주인공은 일제에 의해 학살되고 말며, 그의 뜻을 이은 로사는 다시 망명길에 오르는 것이다. 독립군 군가라든가, 기록적 성격의 저술이라든가를 포함한다면 앞에서 말한 규정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필자는 지금 좁은 의미에서 ‘문학’을 말하는 것이다. 내용과 형식에서 ‘문학’이 전제하고 있어야 할 어떤 본질이 식민 통치하에서 가능한 한계를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문학이란 과연 무엇이고, 인간사회의 본질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과 우리를 직면하게 하는 것, 이것이 포석 조명희의 문학과 생애가, 특히 망명 후의 그의 존재가 우리 문학사에 대해서 지니는 최대의 의미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일제의 검열제도 아래 생산된 문학활동은 국외의 독립운동 같이 일제에 대한 전면적 부인의 태도를 명시적으로 취할 수 없었고, 조선인의 정치의식을 정당하게 반영하는 표현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었으며, 그 강요된 한계가 자칫 문학 자체의 성격적 한계인 듯 이후의 문학의식에 수용될 위험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석은 이런 위험을 감수하며 일제에 저항하는 문학을 펼쳐왔다. 그러나 조선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이라는 그 신념을 포석이 끝까지 문학이라는 형식 속에 형상화해 내기엔 현실적 한계가 있었던 것이고, 결국 망명이라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인훈은 ‘가장 치열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문학적 유파에 속해 있었던’ 포석이 소설 ‘낙동강’을 통해 당시의 현실과 그에 대한 문학적 반응 태도를 뚜렷이 나타내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덧붙여 “‘낙동강’에서 그는 조국의 운명과 자신의 태도를 종합해서 보여줄뿐 아니라, 그 자신의 문학 자체를 종합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식민지 권력의 감시와 탄압 아래에서 모국어를 지키면서 국민생활을 묘사해온 문학사회에도 역사의 기상은 정직하게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포석 조명희는 그런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문학적 유파에 속해 있었다.

당시의 현실과 그에 대한 문학적 반응 태도를 뚜렷이 나타내주는 것이 그의 작품 ‘낙동강’이다.

‘낙동강’에서 그는 조국의 운명과 자신의 태도를 종합해서 보여줄뿐 아니라, 그 자신의 문학 자체를 종합하고 있다.

이 해 즉 1928년에 이 작품의 주인공의 한 사람이 택한 길을 그 자신도 실행하였다.

국내에서의 생활을 단념하고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망명한 그의 소식은 해방이 되기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해방된 후에는 그의 1942년에 망명지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졌으나, 실지로는 1938년에 스탈린 정권에 의해서 학살된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의 사망 후 무려 반세기가 지난 90년대 초의 일이다.

그의 생애가 우리나라의 현대사만큼 비극적인 것에 못지 않게, 작가로서의 그의 위치도 우리 현대문학에서 특이한 것이 되었다.

포석이 망명지에서 집필했다고 전해지는 장편소설이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의 문학적 질량은 국내에서 발표된 ‘낙동강’이 여전히 절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련에서 집필된 시들은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가 있지만 예술적으로는 ‘낙동강’을 넘어서는 위치를 차지할만 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 최인훈, 문학사에 대한 질문이 된 생애, 1995년 3월 20일, 포석 조명희 전집.

 

(50) 신간회(新幹會)

독립운동단체로,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해 서울에서 창립한 민족협동전선.

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이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조직되었으며, 발기인은 신석우(申錫雨), 이상재(李商在), 안재홍(安在鴻) 등 조선일보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이었다.

1920년대∼19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회원이 2만∼4만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 사회운동단체였다.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갈등·대립으로 분란이 계속되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을 결의, 창립된 지 만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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