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 삶의 모습이 곳곳에 배어있는 소설 ‘낙동강’

▲ 포석 조명희 원작 ‘낙동강’의 대중 그림책. 44쪽. 기웅 그림과 림호권 개편으로 1959년 국립미술출판소에서 한정판 5만부를 대중그림책으로 발행한 것이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박성운과 로자의 성격 속에 있는 혁명적 정열과 영웅주의 인도주의적 애정의 깊이와 미래를 확신하는 아름다운 낭만주의적 지향에도 불구하고 조선 농촌에서 전개되는 투쟁의 온갖 고난성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낙동강’은 비극적 사건들로 충만되어 있으며 구슬픈 정서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곤란한 투쟁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쓰러진 혁명 투사의 뜻을 이어 투쟁의 더 큰 길을 걷기 위하여 북으로 떠나는 그의 애인 로자의 눈물 속에서 독자들은 다만 그들의 사업의 곤란성을 느끼고 거기에 동정을 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러한 독자들은 곤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더 큰 투쟁을 준비하기에 바쁜 그들의 불굴의 혁명적 의지를 강렬하게 느낄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예술적 구상으로 말미암아 ‘낙동강’은 현대 조선 문학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발전에 대한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항상 그 토론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즉 ‘낙동강’이 평론계에 의하여 예증되어 왔다. 뿐만 아니라 ‘낙동강’은 일제 경찰에 의한 무수한 복자(伏字·인쇄물에서 내용을 밝히지 않으려고 일부러 비운 자리에 ‘O’‘×’ 따위로 표를 찍는 것)에도 불구하고 해방 전후를 통하여 조신 인민이 가장 애독하여온 작품중의 하나로 되고 있다.

조명희의 창작활동-특히 프로레타리아 작가로서 국내에서 활동한 기간은 그가 소련으로 들어간 1928년까지의 약 4~5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그가 발표한 작품들의 수량과 그것들을 통하여 조선 근로자의 투쟁에 기여한 업적은 결코 적지 않다.

- 이기영, 포석 조명희에 대하여, 1957년 1월, 조명희선집.

 

민촌(民村) 이기영(李箕永)이 이 글을 쓴 것은 1957년이었다. 당시 그는 북한의 문학예술 분야 고위직을 두루 지내고 있었던 때였다.

1953년 9월 민촌은 조선작가동맹 상임위원,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을 지냈고, 그밖에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 등 북한에서 문학예술 분야의 고위직을 거쳤다. 1966년 12월 이후에는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했다.

민촌은 1895년 5월 29일 충남 아산에서 출생하여 1984년 8월 9일 북한 평양에서 사망했다. 그러고 보면 민촌은 90세까지 장수를 누린 셈이었다. 포석이 1884년 8월 10일생이니, 민촌과 포석은 한 살 차이가 난다. 그런 까닭으로 포석과 민촌은 막역한 친구사이였다. 포석에게 있어 흉금을 서로 터놓고 인생의 가장 깊은 벗으로 남은 이가 수산 김우진이었다면, 민촌은 문학적·사상적 동지이자 벗이었다.

1928년 5월 7일 ‘낙동강’·‘민촌’ 공동출판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볼 수 있다. 여기서 ‘민촌’은 이기영의 호이기도 하지만, 이기영의 소설이기도 하다.

조선의 문인 가운데 포석을 가장 따르고 존경했던 이는 한설야였다. 그에게 포석은 스승이자, 동지이자, 벗이었고 자신의 인생의 롤 모델이었다. 그가 1901년 출생이니 포석과는 일곱살 나이 터울이 난다.

모스크바대학 교수였던 황동민 박사(포석에겐 처남이 된다. 포석의 부인 황명희씨가 황동민 박사의 누나이다)가 러시아에서 1959년 8월 10일 조명희 탄생 65주년을 맞아 ‘조명희 선집’을 출간할 때 이기영과 한설야가 기꺼운 마음으로 포석을 회고하고 그의 문학적 업적을 되짚는 원고를 보내주게 되었던 것도 그런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민촌은 포석 탄생 65주년을 맞아 발간한 조명희 선집에서 ‘포석 조명희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낙동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포석의 단편 소설 가운데 그의 사상과 예술적 원숙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낙동강’이라는 것이다. 민촌은 포석이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낙동강의 구포벌로 찾아가 3개월간 ‘현장 취재’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낙동강과 그 강 주변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자랑하는 구포벌이 지니고 있는 ‘아이러니’에 대해 포석은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것을 언술하고 있다.

“구포벌의 역사에 대하여 낙동강을 젖줄기처럼 물고 있는 이 비옥한 땅에서 오히려 빈궁과 무권리의 암담한 생활을 하고 있는 빈농민들의 실지 생활에 대하여 그는 연구하였다”며 “그 결과 이 작품에는 1920년대 조선 농촌의 생활 처지와 환경에 대한 전형화가 생동하게 주어져 있으며, 그러한 환경에서 탄생된 새 영웅, 빈궁과 암흑을 낡은 제도와 함께 영원히 매장하기 위하여 역사적 필연 속에 태어난 사회주의적 투사들의 고난에 찬, 피의 투쟁이 전개되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낙동강을 젖줄기처럼 물고 있는 비옥한 땅 구포벌은 오히려 그들에게 빈궁과 무권리의 암담한 생활을 안겨다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은 다름아닌 일제의 수탈 때문이었고, 포석은 그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사회의 제 현상들을 날카롭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결과로 낙동강은 1920년대 조선 농촌의 생활처지와 환경에 대한 전형화(典型化)가 생동하게 그려지며 리얼리티를 담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민촌이 서술한 뒷 이야기는 ‘문학성’을 염두에 둔 시점으로 접근할 때 오히려 생각해볼 여지가 생긴다.

“그러한 환경에서 탄생된 새 영웅, 빈궁과 암흑을 낡은 제도와 함께 영원히 매장하기 위하여 역사적 필연 속에 태어난 사회주의적 투사들의 고난에 찬, 피의 투쟁이 전개되어 있다. 사회주의적 투사들의 고난과 희생에 대한 작자의 깊은 인도주의적 태도는 이 작품으로 하여금 혁명적 낭만주의와 서정적 빠포쓰로 충만되게 하였다.”

새로운 ‘영웅’의 등장, 즉 영웅화된 주인공이 이야기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소설은 오히려 소설의 리얼리티를 떨어뜨릴 수 있는 요소가 된다. 고대의 소설들이 그러했듯, ‘영웅소설’들이 가지게 되는 한계점은 영웅의 활약상에 묻혀 소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우리 주변의 실체적 삶이 제대로 형상화 되지 않아 소설과 ‘거리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석의 ‘낙동강’에서 박성운과 로사라는 두 캐릭터가 ‘영웅적 사상’을 지닐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 소설이 지향하고 있는 좌표가 카프가 새롭게 내놓은 ‘신강령’에 충실히 복무하고, 그 이전의 작품과 변별성을 가진 ‘방향전환’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예술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예술의 도구화’를 통해 사회주의의 실현을 가장 우선되는 목표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의 등장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낙동강의 전반부는 박성운이 감옥의 미결수로 있다가 병이 위중하여 보석 출옥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른 겨울 어두운 밤, 낙동강 어귀에서 청년회원, 형평사원, 여성동맹원, 소작인, 조합사람, 사회운동단체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동저고리 바람에 헌 모자 비스듬히 쓰고 보따리를 든 촌사람도 있고, 검정 두루마기 흰 두루마기, 구지레한 양복, 루바시카 입은 사람, 자켓 깃 위에 짧은 머리털이 다팔다팔하는 단발랑(斷髮娘), 혹은 그대로 틀어앉은 신여성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이는 병으로 출옥한 박성운이다. 위중한 몸 상태인 그를 차에서 받아 인력거에 실어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는 참이다.

그들의 말을 살펴보면 병원으로 곧장 가야할 성운은 위중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굳이 돌아온다.

그리고 배에 올라 마을로 돌아가는 배 위에서 사람들의 성화에 못이겨 로사는 노래를 부른다.

 

봄마다 봄마다

불어 내리는 낙동강물

구포벌에 이르러

넘쳐넘쳐 흐르네-

흐르네-에-헤-야-

 

천년을 산 만년을 산

낙동강! 낙동강!

하늘가에 간들

꿈에나 잊을소냐-

잊힐소냐-아-하-야

 

위중한 성운은 고향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소매를 걷어 낙동강물에 팔을 담가보며 로사에게도 그러하기를 재촉한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해외에 가서 다섯 해 동안을 떠돌아 다니는 동안에도, 강이라는 것이 생각날 때마다 낙동강을 잊어본 적은 없었다. 낙동강이 생각날 때마다, 내가 이 낙동강의 어부의 손자요 농부의 아들임을 잊어본 적은 없었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것도.”

 

성운의 할아버지는 낙동강에서 고기잡이로 일생을 보냈고, 그의 아버지는 농사꾼으로 일생을 보냈다. 무식이 한이 되어 아버지는 남의 논밭을 빌어 농사를 지어 구차한 살림에도 성운을 가르쳐 놓았다. 서당으로, 보통학교로, 도립 간이 농업학교로 가르쳐 놓은 성운은 군청 농업조수로 한두 해 있다가 삶의 큰 변환점을 맞게 된다.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이 그것이었다.

성운은 군청 농업조수를 걷어치우고 열렬한 투사로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그리고 1년 반 동안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낙동강을 보면 포석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이 소설 곳곳에 자전적 요소들이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포석도 그랬었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 그는 진천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3개월의 옥고를 치른 바 있었다.

소설 낙동강으로 돌아와, 성운이 감옥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 보니 모친은 그동안 죽고, 부친 또한 딸네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이들 부자는 고향에서 살 수가 없어 서북간도로 떠나게 된다.

삶을 바라고 찾아간 서북간도 또한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 나라 관헌의 횡포에 호인들의 횡포, 마적의 등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운은 이리저리 떠돌다 이역 타향에서 늙은 아버지마저 영원히 잃어버리고, 남북만주, 노령, 북경, 상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그렇게 5년을 지난 뒤 고국 조선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이미 성운은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모해 있었다.

서울로 돌아와 사회운동을 하려 했으나 사회운동 단체란 것이 일에는 힘을 쓰지 않고 공연히 파벌을 만들어 동지끼리 다투기만 했다. 성운은 양방 타협운동도 일으켰으나 아무 효과도 없었고, 여론을 일으켜 보기도 했으나 파쟁에 눈이 뻘건 사람들의 귀에는 그도 크게 울리지 못하게 된다.

이 부분은 포석이 일제에 대항해 사회주의자들과 좌파 민족주의자들의 가교역할을 하며 여러 활동을 벌였던 ‘신간회’를 떠올리게 한다.

포석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듯싶었던 두 성향의 인사들을 결집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포석이 우려했던 것처럼 신간회는 1931년 5월 해체되고 만다. 신간회가 해체된 데에는 일제의 탄압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어쩌면 가교역할을 했던 포석이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하면서 빠졌던 것 또한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된다.

 

성운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며 “이 파벌이란 시기가 오면 자연히 괴멸할 때가 있으리라”며 고향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남조선 일대를 망라하여 사회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게 되고, 낙동강 하류 연안 지방의 한 부분을 떼어 맡아 일을 보게 된다.

성운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또한 포석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그러나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그 감정을 의지로 누르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그런 모습 또한 포석과 닮아 있다.

“혁명가는 생무쇠쪽 같은 시퍼런 의지의 마음씨를 가져야 한다.”

성운이 지닌 이 ‘생활의 지표’는 정 많은 포석이 마음 다잡아 세웠던 지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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