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영섭 서양화가

얼마 전 정우현 MPK그룹 회장이 지난 2일 밤, MPK그룹 소유의 한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 문이 잠겨 못 나가게 되자, 건물 경비원 58살 황 모 씨를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현대BNG스틸의 정일선 사장도 운전기사들에게 상습적으로 폭행과 폭언을 했고, 교통법규를 무시하라는 등의 내용이 담긴 140여장의 ‘갑질 매뉴얼’을 숙지토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꼴갑을 떤 것이다. 또한 재벌2,3세들이 “야! 얼마면 돼?” 하며 여성연예인들의 성을 사고, 유명세로 거액의 출연료를 받은 일부 유명연예인들이 노름으로 돈을 물쓰듯 하는 것도 일종의 갑질이다. 고전사회에서 신분을 양반, 평민, 머슴 등으로 구분되던 것이 현대에는 오직 자본으로 계층을 나누고, 위치를 판단해서 역겨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갑(甲)’이란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차례의 첫째’라는 뜻이다. 을, 병, 등은 물론 그 다음이다. ‘갑(甲)과 을(乙)’이란 말은 원래 계약서 용어이다. 갑은 계약의 주체가 되어 금액을 지불하는 사람을, 을은 용역이나 상품,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를 지칭한다. 계약 당사자를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던 갑과 을이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상류층과 하류층, 가진자와 못가진자를 구분하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언제 부터인지 갑이 신분상 제일 우두머리를 대변하는 말로 변질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갑이 갑노릇은 하지 않고, 갑질을 한다는데 있다. ‘질’이란 말은 특정 명사뒤에 붙어 도구사용 행동을 말하는 뜻으로 바느질, 걸레질, 부채질 등이 있고, 좋지 않은 행위를 뜻하는 도둑질, 싸움질, 오입질 등이 있다. 여기에 갑질이란 후자의 뜻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갑질’은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지만,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우월한 지위에 있는 자의 횡포’라고 사전에 수록될지도 모른다. 갑이 갑노릇을 제대로 한 옛이야기로 경주 최부자집 이야기가 유명하다. 다른 부자들이 70% 정도 받던 소작료를 40%로 낮추어 부의 혜택이 자연스럽게 남들에게로 퍼져나가게끔 하였고. 일만석 이상의 재산은 반드시 이웃과 사회에 환원하였다. 그리고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였다. 또 조선 제일의 자린고비로 불렸던 조륵은 근검절약하여 큰 부자가 된 뒤 어려운 백성들을 많이 도와 가자(加資)라는 벼슬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적인 갑부인 빌 게이츠는 “나는 부를 사회에 돌려줄 책임이 있고, 최선의 방식으로 돌려줘야 한다고 믿는다.” 말하며 기부재단인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세웠다.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딸의 출생을 기념해 자신들이 보유한 주식의 99%를 사회에 기부하였다. 그런데 갑이 아니면서도 갑노릇을 하시는 분들도 있다. 서울 영등포구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면 대학 총장이라 불리는 젓갈할머니가 있다. 그냥 총장이 아니다. 40여년 평생 젓갈을 팔아 번 돈으로 수백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온 ‘류양선(79 )젓갈대학 총장님’이시다. 참으로 두 손으로 박수쳐 드리기엔 너무 죄송할 따름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최환석씨가 한국사회의 문제점과 개선책을 폭넓고 심도있게 설파한 ‘갑질사회’란 저서에서 불평등 현상에 대한 비유로 ‘자전거 반응’을 예로 들었다. 경주용 자전거를 탈 때 상체를 숙이고 페달을 밟는 모습이 마치 위의 강자에게 고개를 굽실굽실 숙이는 반면, 아래의 약자는 있는 힘껏 작신 밟아대는 모습과 같다고 했다. 한마디로 갑질을 잘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갑으로부터 횡포를 당한 ‘을’이 자신보다 더 약자인 ‘병’에게 분풀이 하듯 저지르는 ‘을질’도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불평등사회일수록 폭력성, 열등감, 모욕감, 수치심, 차별감 등이 증가하며 국민이 불행해져 간다. 언제부터인가 ‘존중’, ‘배려’ 같은 인간관계의 상식적인 덕목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 불평등 사회의 ‘갑질’은 비도덕적일 뿐 아니라 비효율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갑에 속하는 경제인, 정치인, 고위직행정가, 유명연예인 그리고 우리 주변의 수많은 돈 좀 벌었다고 하는 사람들이여! 제대로 갑노릇 좀 한번 해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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