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이 동양일보 편집상무

(김영이 동양일보 편집상무)“국민의 민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4.13 총선 결과를 두고 한 말이다. 참 애매하다. 그냥 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 하면 될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니...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지, 아니면 남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자신이 생각한다는 건지 헷갈린다.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비틀어서 한 것 같다.

국민들은 4.13 총선에서 여권이 참패한 후 박 대통령의 입만 바라봤다. 어떤 입장을 내놓을까, 참 궁금했다. 왜냐하면 총선 민의가 국정과 정권 심판으로 귀결됐고, 그 1차적 책임이 바로 박 대통령과 청와대에 있다고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첫 반응은 정연국 대변인을 통해서 나왔다. 그는 총선 다음날인 지난 14일 오전 춘추관에서 총선 결과에 대해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 국민들의 이러한 요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이런 발언은 총선 전날(12일)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민생안정과 경제활성화에 매진하는 새로운 국회가 탄생해야만 한다”며 야당 심판론을 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총선 결과가 박 대통령의 불통정치와 측근들의 전횡, 무능에 대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다.

그러니 박 대통령의 생각이 더 궁금해졌다. 드디어 박 대통령은 총선 닷새만인 지난 1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국민 메시지를 내놨다.

6분 동안 모두(冒頭)발언을 하면서 총선 결과와 관련된 언급은 달랑 43초였다. “국민의 민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민의를 겸허히 받들어서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겠다” 정도였다.

총선 패배를 인정하는 구체적인 언급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정운영 방향에 대한 청사진도 내놓지 않았다. 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새겨 들으라’며 어물쩍 넘어갔다. 개각, 비서실 개편 등 인적 쇄신책도 입 벙긋하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민의를 배반한 정치에 대한 반성은 커녕 성찰조차 없었다. 총선에서 국민들은 성난 민심을 표출했지만 상대방은 마이웨이만 고집했다.

이번 총선은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금 일깨워 준 의미있는 선거였다. 만약 이번 총선이 박근혜 정권을 심판하지 않았다면 국민들은 오만과 불통이 가득하고, 진박(진실한 친박)들이 설쳐대는 ‘대한민국호’에 갇힌 채 살아가야 할 뻔 했다.

박 대통령은 유신, 5공때보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똑똑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그저 아버지(고 박정희 대통령)의 향수에 기대 콘크리트 지지층만 있으면 된다는 착각에 빠진 것 같다. 유신때나 5공때처럼 일부 보수 언론만을 등 업고 여론몰이 하면 국민들이 그저 따라올 줄 알았던 것 같다. 또 과거 못된 정권이 선거때마다 써 먹었던 북풍을 일으키면 국민이 알아서 길 줄 알았던 것 같다. 대통령의 선거중립 위반 논란을 무시하고 ‘선거의 여왕’인 자신이 붉은색 재킷을 입고 전국을 누비면 산하가 빨갛게 물들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야당이 발목을 잡는다며 파행적인 국정운영을 국회 탓으로 돌렸다. 국민적 합의없이 위안부 문제를 덜컥 일본과 합의해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5세까지 무상보육 공약을 뒤엎어 국민적 분란을 자초했다. 역사학자 대부분이 반대하는 국정교과서를 밀어붙여 국민적 저항을 샀다. 유승민 의원의 원내대표 사퇴를 촉발한 ‘배신의 정치 심판’ 발언으로 그를 새끼 호랑이로 키우는 옹색한 정치력을 보여줬다.

박 대통령은 선거때는 경제가 괜찮다고 국민들을 안심시키더니 선거가 끝나니까 경제위기라고 한다. 박 대통령의 말대로 경제 살려야 하고 국가 안보 튼튼히 해야 한다. 두말 하면 잔소리다. 그렇지만 이 말들을 앞세워 민의를 희석 내지는 왜곡시키면 안된다. 민의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잘못을 인정하고 국정을 ‘못 먹어도 고(go)’식으로 운영하지 말라는 거다. 그게 국민에 대한 예의다.

이번 총선의 회초리는 박근혜 정부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국가를 혼돈 속으로 빠지게 하려는 게 아니다. 이제까지의 윽박지르고 호통치는, 불통의 정치를 거두고 정신 차려 남은 임기를 잘 이끌어 달라는 부탁의 의미다. 국민하기 참 좋은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국민들의 읍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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