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층서 터져 나오는 ‘폭발탄’된 낙동강의 로사

▲ 1990년대 중반 낙동강 을숙도를 찾은 조명희 선생의 후손들. 김 안드레이(포석의 외손자·왼쪽·전 타시켄트대학 교수)와 조성호(포석의 종손·수필가)씨.
▲ 1957년 4월 12일 포석의 제자이자 처남댁(황동민 교수의 부인)인 최 예까떼리나가 필사한 낙동강. 2년 뒤인 1959년 12월 10일 조명희 문학유산위원회에서 발간하게 되는 ‘낙동강 선집’의 자료로 쓰인 원고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성운이 고향에 돌아와 한 일은 선전, 조직, 투쟁이다. 농촌 야학을 설치하고, 농민 교양에 힘을 쓰고, 그네들 틈에 끼어 생일도 하고, 농사일터나 사랑 구석에 모인 좌석에서나 야학 시간에서나 기회가 있는 대로 교화에 전력을 다했다.

또 소작조합을 만들어 대지주 동척의 횡포와 착취에 대항운동을 벌인다. 그러나 소작쟁의에서 희생자도 내고 소작조합 해산명령도 받고, 노동야학도 금지 당한다. 동척과 관영의 횡포와 압박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성운의 친구는 밖으로 나가 테러를 하자고 한다. 그러나 성운은 “우리는 죽어도 이 땅 사람들과 같이 죽어야 할 책임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 ‘피칠할 일’이 생기게 된다. 성운의 마을 앞 낙동강 기슭에 여러 만평되는 갈밭이 문제의 시발점이 된다.

이 갈밭은 ‘낙동강이 흐르고 이 마을이 생긴 뒤로부터, 그 갈을 치고 그 갈을 털어 삿갓을 만들고, 그 갈을 팔아 옷을 구하고 밥을 구하였던’ 그런 밭이다.

그것이 촌민의 무지로 10년 전 국유지로 편입되었다가 일본 사람 가등이란 자에게 넘어가고 만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은 이번 가을부터 갈을 벨 수도 없게 된다.

도 당국에 사정을 해도 안 되고, 촌민끼리 손가락을 끊어 혈서 동맹까지 조직하여 항거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 뿐이다. 그래서 촌민들은 ‘분김에 눈이 뒤집혀’ 덮어놓고 갈을 베어 제낀다. 그리고 저 편의 수직꾼하고 시비가 생겨 사람까지 상하고, 그 끝에 성운은 선동자라는 혐의로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연대기적인 서술이라면, 낙동강의 도입 부분에 나오는, 위중한 몸으로 고향땅으로 오는 성운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풍경은 ‘시간의 역전’에 의한 서술이다.

 

성운과 로사가 정인(情人)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갈밭을 두고 촌민들과 일제 당국 사이 갈등의 골이 깊어가던 그해 여름, 어느 장날에 형평사원들과 장꾼들과의 큰 싸움에서 비롯됐다.

장거리 사람들이 형평사지부를 지나면서 모욕적인 언사를 한 것이 시초가 돼 떼싸움으로 번졌는데, 그 자리에서 성운은 “늬도 이놈들, 새 백정이로구나”라고 조소하는 장꾼들을 향해 말한다.

“백정이나 우리나 다 같은 사람이다. 다만 직업의 구별만 있을 따름이다. 무릇 무슨 직업이든지, 직업이 다르다고 사람이 귀천이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옛날 봉건시대 사람들의 하는 말이다. 더구나 우리 무산계급은 형평사원과 같이 손을 맞붙잡고 일을 하여 나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형평사원을 우리 무산계급은 한 형제요, 동무로 알고 나아가야 한다.”

성운의 말에 감화된 로사는 여성 동맹원이 되고, 자연히 성운과의 상종도 잦아지고, 필경에는 남다른 정이 가슴 속 깊이 들어 배게까지 된 것이다.

 

성운의 연인이자 낙동강 캐릭터의 두 축을 이루는 로사는 백정의 딸이다.

형평사원이던 로사의 부모는 딸을 서울로 보내 여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시키고 사범과까지 마치게 해 여훈도로 만든다.

로사는 함경도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하기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온 터였고, 성운의 말에 감화되어 여자청년회동맹에 가입하게 된다.

백정의 설움을 평생 지고 온 아비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

“이년의 가시내야! 늬 백정놈의 딸로 벼슬까지 했으면 무던하지.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있더노?”

그러나 ‘배운 딸’의 응대는 “아배는 몇 백년이나 몇 천년이나 조상 때부터 그 몹쓸 놈들에게 온갖 학대를 다 받아왔으며, 그래도 그 몹쓸 놈들의 썩어빠진 생각을 그저 그대로 가지고 있구만. 내사 그까짓 더러운 벼슬이고 무엇이고 싫소구마. 인자 참 사람 노릇을 좀 할란다”였다. 그러면서도 로사는 부친에게 야단맞은 게 분한 것이라기 보다는 ‘부모가 아무리 무지해서 그렇게 굴지마는, 그 무지함이 밉다가도 도리어 불쌍한 생각’이 나 울음을 터뜨린다.

이럴 때마다 로사는 성운에게 달려가 하소연 하고, 성운은 그런 로사에게 한 여성으로서 세상에 당당하게 대응하는 삶과 사상에 대해 조언을 해준다.

“당신은 최하층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탄 같아야 합니다. 가정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같은 여성에 대하여, 남성에게 대하여, 모든 것에 대하여 반항하여야 합니다.”

“당신은 또 당신 자신에 대하여서도 반항하여야 되오. 당신의 그 눈물-약한 것을 일부러 자랑하는 여성들의 그 흔한 눈물도 걷어 치워야 되오. …… 우리는 다 같이 굳센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운은 우연히 독일의 여성 혁명가 로사 룩셈부르크(52)의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에게 ‘로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성운으로부터 ‘로사’라는 이름을 ‘농삼아’ 받은 그녀는 아예 자신의 이름을 그것으로 바꾸어 버렸다.

 

성운의 행적을 좇아 이야기의 전개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면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성운은 낙동강 어부의 손자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운의 아버지는 자기네 무식이 한이 되어 성운을 서당, 보통학교, 도립 간이농업학교로 보내 공부시킨다. 성운은 군청 농업 조수로 한 두해 있다가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다니던 곳을 집어던지고 독립운동에 참가한다. 그로 인해 1년 6개월 감옥생활을 한다. 형기를 마치고 나온 성운은 아버지를 모시고 서북간도로 떠난다.

그곳에서 관헌의 압박, 호인의 횡포, 마적의 등쌀에 시달려 여기저기 떠돌다 늙은 아버지를 잃어버린다.

성운은 남북만주, 노령, 북경, 상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5년 동안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모든 운동이 침체되고 쇠퇴돼갈 판에 성운은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모하여 조선으로 돌아온다.

서울에서 사회운동을 벌이지만 파벌싸움에 환멸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와 사회운동단체 일부분을 맡아 활동하게 된다.

선전, 조직, 투쟁 등 세가지를 프로그램으로 세워 농촌민들의 계몽활동과 교화에 전력을 기울인다.

낙동강 갈밭을 두고 일제와 갈등을 빚다 선동자라는 혐의로 붙들려가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그로 인해 병이 위중하게 되어 풀려난다.

성운은 병원으로 가지 않고 상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소설 낙동강은 마지막 ‘파국’으로 이어진다.

 

(52) 로사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년 3월 5일 폴란드 자모슈치 출생, 1919년 1월 15일 사망.

독일에서 활동한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 폴란드사회민주당과 스파르타쿠스단, 독일공산당의 조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로사는 어렸을 때 앓은 병으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된다. 1873년 가족이 바르샤바로 이주했고, 고등학교 시절 프롤레타리아 당원이 된 후 총파업 선동 등의 활동으로 수배됐다. 이로 인해 1889년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으며, 취리히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여 1898년 박사학위를 받는다. 1893년에는 함께 공부하던 레오 요기헤스 등과 함께 ‘스프라바 로보트니차(노동 대의)’라는 신문을 창간하고 R. 크루신스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그해 8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3차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연설을 통해 유명해졌다. 이듬해 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당시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을 장악하고 있던 폴란드 사회당의 대표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폴란드 사회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경계하고 진정한 사회주의화 국제주의를 주창했으며, 당시 폴란드를 셋으로 분할 점령하고 있던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민중들과 연대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폴란드의 독립보다 계급적인 연대와 투쟁을 중요시했던 그들의 주장은 당시 많은 폴란드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바르샤바로 가서 혁명에 동참하다가 체포돼 투옥되고, 풀려난 후에는 베를린에 있는 사회민주당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1907-1914)하면서 ‘자본축적론(1913)’을 집필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사회민주당이 독일정부의 참전을 지지하자, 이에 반대하며 독일사민당을 떠나 인터내셔널단(Die Internationale)을 결성하고, 로마시대에 노예 검투사의 반란을 일으켰던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이름을 따서 스파르타쿠스단으로 개명한다.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을 통해서 전쟁을 끝내고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세우고자 했는데, 로자 룩셈부르크는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1916년 체포돼 2년 반 동안 투옥된다. 그녀가 감옥에서 집필한 ‘사회민주주의의 위기(1916)’는 스파르타쿠스단의 사상적 기초가 된다. 여기에서 그녀는 레닌과 뜻을 같이하여, 기존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대규모 학살을 방지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가진 새 인터내셔널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8년 12월 말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과 다른 사회주의 세력들을 규합해 1919년 1월 1일 독일 공산당을 창설한다. 며칠 후 2차 독일 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혁명세력과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당시 군부와 결탁한 독일사민당의 우파세력에 의해 살해되는데,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 시기에 체포돼 감옥으로 이송 도중 1919년 1월 15일 호송병들에 의해 살해됐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살해된 후 베를린의 운하에 버려졌고, 4개월이 지난 그해 5월이 돼서야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들이 동료들과 함께 묻힌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 묘지에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이상을 기리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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