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망명 직전까지 활발한 작품활동한 포석

▲ 포석이 1928년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속 발표한 수필 ‘서푼짜리 원고상폐업’ 1~3편. 이 시기는 포석의 러시아 망명 바로 직전이었다. 포석은 또 13일 ‘발표(發表)된 습작작품(習作作品)’, 14일 ‘잠못 이루든 밤’, 15일에도 ‘잠못 이루든 밤’ 등 연이어 수필을 발표하는데, 이는 그가 러시아 망명을 눈앞에 두고 조선인들에게 안겨준 마지막 선물이었던 셈이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병든 성운을 둘러싼 일행이 낙동강을 건너 어둠을 뚫고 건넌 마을로 향하여 가던 며칠 뒤 낮결이었다. 갈 때보다도 더 몇 배 긴긴 행렬이 마을 어귀에서부터 강 언덕을 향하고 뻗쳐 나온다. 수많은 깃발이 날린다. 양렬로 늘어선 사람의 손에는 긴 외올베 자락이 잡혀 있다. 맨 앞에 선 검정테 두른 기폭에는, ‘고 박성운 동무의 영구’라고 씌어 있다.

그 다음에는 가지각색의 기다. 무슨 ‘동맹’, 무슨 ‘회’, 무슨 ‘조합’, 무슨 ‘사’, 각 단체 연합장임을 알 수 있다. 또 그 다음에는 수많은 만장이다.

“용사는 갔다, 그러나 그의 더운 피는 우리의 가슴에서 뛴다.”

“갔구나, 너는! 날 밝기 전에 너는 갔구나! 밝는 날 해맞이 춤에는 네 손목을 잡아 볼 수 없구나.”

“……”

“……”

이루 다 세일 수가 없다. 그 가운데에는 긴 시구(詩句)같이 이렇게 벌려서 쓴 것도 있었다.

‘그대는 평시에 날더러, 너는 최하층에서 터져나오는 폭발탄이 되라, 하였나이다. 옳소이다. 나는 폭발탄이 되겠나이다. 그대는 죽을 때에도 날더러, 너는 참으로 폭발탄이 되라, 하였나이다. 옳소이다. 나는 폭발탄이 되겠나이다.’

이것은 묻지 않아도 로사의 만장임을 알 수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성운은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죽게 된다.

그러나 성운의 죽음은, 사멸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상승적 재생(上昇的 再生)’의 의미를 띠고 있다. 성운의 삶이 로사의 삶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그것이다.

이런 구조는 김동인의 소설 ‘배따라기’(53)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미(美)로 대별되는 아내와 동생의 관계를 오해하고 질투하는 ‘그’ 때문에,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떠나게 된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동생을 찾아 기약없이 유랑하다가 동생이 부르는 ‘배따라기’ 노래를 듣게 된다. 아내의 죽음, 미의 소멸이 동생의 ‘배따라기’를 통해 더욱 깊은 아름다움으로 재생되는 것이다.

낙동강의 경우도 성운의 혁명적 삶과 죽음이 로사의 혁명적 삶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볼 때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낙동강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자.

 

이 해의 첫눈이 푸뜩푸뜩 날리는 어느 날 늦은 아침, 구포역(龜浦驛)에서 차가 떠나서 북으로 움직이어 나갈 때이다. 기차가 들녘을 다 지나갈 때까지, 객차 안 동창으로 하염없이 바깥을 내어다보고 앉은 여성이 하나 있었다, 그는 로사이다. 아마 그는 돌아간 애인의 밟던 길을 자기도 한 번 밟아보려는 뜻인가 보다.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다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

 

‘돌아간 애인의 밟던 길’은 관헌의 압박, 호인의 횡포, 마적의 등쌀이 있던 서북간도요, 성운이 5년간 독립운동을 했던 남북만주, 노령, 북경, 상해 등지이다.

로사는 그 길을 되짚어 성운이 못다 이룬 뜻을 다시금 펼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운이 그러했듯 로사 또한 그 험한 삶의 여정을 거쳐 필경에는 머지 않아 다시 잊지 못할 조선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한층 단단해진 마음으로 ‘운동’을 펼칠 것이다. 그래서 낙동강은 종결과 동시에 시작이 된다.

 

포석의 ‘낙동강’에 대한 평가는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선구적 소설이라는 데에는 일치하고 있지만, ‘목적의식’을 띠었느냐의 여부를 두고는 엇갈린 평가도 나왔다.

민병기 전 창원대 교수가 쓴 ‘망명작가 조명희론’을 살펴보면 이러한 제 평가들에 대한 약간의 정리가 될 듯싶다.

 

(포석의 선구적 업적은) 목적의식기의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선구적 소설가로서의 업적이다.

그의 단편소설 ‘낙동강’은 프로문학의 방향전환 직후에 발표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었느냐, 목적의식의 성격을 띠었느냐를 놓고 카프 내부에서도 서로 엇갈리는 주장이 제기되어 주목을 받았다.

발표 당시에 쟁점이 되었던 사정과는 달리, 그뒤 연구가들은 이 소설을 목적의식의 대표작으로 꼽고 있다.

백철은 이 작품이 최초로 계급투쟁을 주제로 담고 있으며, 계급혁명운동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신경향파의 작품 경향과는 명백히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목적의식기의 대표작으로 보았던 것이다. 임화도 이 작품이 우리 문학사의 한 모멘트가 됨을 지적했으며, 우리 신문학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자산임을 강조했다. 조연현도 ‘낙동강’을 경향파의 작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보았다. 경향파의 작품에서는 빈궁의 양상이 개인의 문제로 제기됐으나 ‘낙동강’에서는 민족적·계급적 문제로 제기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저항의 동기가 경향파는 자연발생적인데 비해 ‘낙동강’은 맹목적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점과 조직적 저항의 성격을 띠었다는 점을 들어 양자의 차이가 뚜렷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프로문학의 성격을 뚜렷히 부각시킨 획기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이상에서 포석은 한국의 현대 희곡·시·소설 어느 분야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문학가임을 확인했다. 그가 초기 한국문단에서 활약한 기간은 6년초 정도로 비록 짧지만, 다양한 활동상을 보여 주었다. 그는 민족주의적 극작가요, 현실비판적 시인이요, 선구적 프로소설가라는 다양한 마스크를 지닌 문학가였다.

그의 문학사적 위상을 밝히기 위해서 이 세 국면의 활동이 종합적으로 연구되어야 마땅하다. 그의 문학세계를 폭넓게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생애와 문단활동을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 민병기, 망명작가 조명희론, 1990년 4월 30일 뒷목 제19집.

 

포석은 1928년 1월 1일 소설 ‘춘선이(春先伊)’를 조선지광 75호에 발표한다.

1월 24∼28일에는 동아일보에 ‘단상 수필(斷想 隨筆) 1’부터 ‘단상 수필(斷想 隨筆) 4’까지 잇따라 발표하고, 2월 7∼15일까지 소설 ‘이쁜이와 룡이’를 동아일보에 연재한다.

4월 20일에는 소설집 ‘낙동강’을 백악출판사에서 발간한다.

그해 6월에는 동아일보에 여러 편의 수필을 집중적으로 발표하는데, 이 즈음 포석은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인 그를 압박해 들어오는 일본 경찰을 피해 ‘새로운 공간’에서의 독립운동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정에서 살펴 보면 이 시기에 발표한 여러 편의 수필은 그가 늘 이상향으로 꿈꾸었던 러시아로의 북행(北行)에 앞서 조선인들에게 마지막으로 안겨준 선물이었던 셈이다.

6월 6일 수필 ‘녹음(綠陰)이로구나’를 시작으로 10일 ‘서푼짜리 원고상폐업(原稿商廢業) 1’, 11일 ‘서푼짜리 원고상폐업(原稿商廢業) 2’, 12일 ‘서푼짜리 원고상폐업(原稿商廢業) 3’을 발표하고 13일 ‘발표(發表)된 습작작품(習作作品)’, 14일 ‘잠못 이루든 밤’, 15일에도 ‘잠못 이루든 밤’을 연이어 발표한다.

그리고 25일에는 ‘잡문수제일문단괴몰 (雜文數題一文壇壞沒)’을 발표한다.

9월 1일 조선지광 80호에 발표된 소설 ‘아들의 마음’은 포석 자신이 미리 조선지광에 발표해달라는 언질을 주었거나, 지인이 포석이 쓴 작품을 대신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포석은 이미 이 소설이 발표되기 열흘 전 조선을 영영 떠났기 때문이다.

 

(53) 배따라기

 

김동인(金東仁·사진)이 1921년 6월 ‘창조’ 9호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1948년 간행된 단편집 ‘발가락이 닮았다’에 수록됐다.

김동인의 본격적인 단편소설로서 낭만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다.

‘그’는 19년 전 고향 영유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동생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아내가 늘 아우에게 보이는 호의 때문에 질투와 시기로 잦은 싸움을 일으켰고 어느 날 아내와 동생이 쥐잡는 장면을 오해하여 아내를 내쫓게 됐다는 이야기를 화자(話者)에게 들려준다.

그것이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내가 물에 빠져 죽은 뒤였고, 이로 인해 아우도 집을 나가 바다로 떠나자 ‘그’도 바다를 유랑하는 뱃사공이 되어 아우를 찾아 헤맨다. 10년이 지나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여 정신을 잃은 ‘그’는 정신을 차린 뒤 자기를 간호하는 아우를 발견했으나 곧 잠에 빠져버렸고, 깨어보니 아우는 간 곳이 없었다.

그 뒤 아우를 찾아 유랑한 지 6년 만에 ‘그’는 배가 강화도를 지날 때 멀리서 들려오는 아우의 ‘배따라기’를 들었을 뿐 아직도 생사를 확인 못한 채 방랑 중이라 했다. ‘그’는 화자에게 그 비통한 ‘배따라기’의 사연을 들려주고는 떠나버린다.

이 소설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나’의 이야기와, 오해와 질투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은 ‘그’의 이야기를 ‘배따라기’라는 노래로 접합시킨 액자소설이다.

김동인이 원용한 ‘배따라기’는 원래 평안도 민요 가운데 앉아서 부르는 잡가에 드는 노래이다. 해안 지방마다 있었던 노래로 보이지만 지금은 평안도의 ‘배따라기’만 널리 퍼져 있다. 이 노래는 사설의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에 지화자자 좋다”라는 후렴구가 붙으며, 뱃사람의 고달픈 생활이 서사체로 엮어져 있다.

박지원(1737∼1805)의 ‘한북 행정록’에 배를 떠나 보낸다는 뜻의 ‘배따라기’라는 노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미뤄볼 때 우리 민요에서도 기원이 꽤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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