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로 생계를 이어가는 아르헨티나 일가족 범죄 실화

(연합뉴스)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 때 한가지 이점이 있다. 관객들에게 이야기의 개연성을 설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허무맹랑한 일이라도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해버리면 논란은 종결된다.

남는 문제는 실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다. 지난 일을 굳이 들춰내는 것은 그 과거 사실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서다.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볼 때 감독이 실화를 어떤 맥락에 놓고서 어떻게 빚어내는지를 유심히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영화 ‘클랜’의 푸치오 가족은 겉으로 봤을 때 평범한 가족이다. 전직 공무원인 아버지 아르키메데스(길예르모 프란셀라), 교직에 몸담고 있는 어머니 에피파냐 사이에 스타 럭비 선수이자 수상 스포츠 용품점을 운영하는 장남 알렉스(피터 란자니)를 비롯한 3남 2녀가 있다.

이들에게는 남들에게 밝힐 수 없는 끔찍한 비밀이 있다. 이들의 생계수단이 ‘납치’라는 점. 부유한 사람들을 납치·감금한 뒤 가족에게 몸값을 받고서는 증거를 없애려고 납치 피해자를 죽인다.

모든 범행의 기획은 아버지 아르키메데스가 세우고 그와 그의 동료, 알렉스가 함께 실행에 옮기지만 나머지 가족 구성원도 범죄의 동조자라 할 수 있다.

납치 피해자가 자신의 집에 감금돼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아르키메데스를 두고 ‘가족을 위해 애쓰는 아버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갈등은 알렉스가 ‘가업’을 잇지 않으려고 하면서 불거진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중요한 존재이지만 납치살인이라는 범죄에 가담하라고 설득하기는 쉽지 않은 일.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을 계기로 푸치오 가족은 파국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클랜’은 198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졌던 희대의 일가족 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영화는 이 실화를 영화적 재미를 위한 선정적인 소재로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1980년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정권이 저질렀던 이른바 ‘더러운 전쟁’이라는 맥락을 이어간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1976년 집권한 군부독재정권은 1983년 민주정부에 정권을 이양할 때까지 정권에 반대하는 3만여 명을 납치·살해·고문했다.

영화에서 푸치오 가족은 군부독재에서 민주정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인 1983년에 놓여 있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아르키메데스는 과거 반체제 인사를 납치·살해하는 일을 담당했던 아르헨티나 비밀정보부의 일원으로 그려진다.

영화의 내용에서 유추해보건대 그는 민주정부가 들어서 ‘국가전복세력의 소탕’을 더는 하지 못하자 납치 기술을 호구지책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아르키메데스는 지극히 선량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그는 자상하게 딸의 공부를 도와주고 아침마다 집 앞을 청소하는 ‘모범시민’이다.

그런 그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것은 군부독재 정권 시절 광기의 역사를 제외하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1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1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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