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선(시인)

▲ 노창선(시인)

봄비가 소리도 없이 가만가만 내린다. 댓돌 아래 내려서니 그제야 빗물이 이마를 적셔 작은 빗방울들의 자취를 느낀다. 윤물세무성(潤物細無聲)이라더니 봄비가 정말 소리도 없이 만물을 적셔 산천은 환호작약 하며 피어난다. 어제는 꽃이 지더니 오늘은 천하가 연두빛으로 곱게 덧칠해 지면서 새 세상이 왔다. 작은 바람에도 살랑살랑 춤을 추는 언덕과 낮은 산들을 보자면 배가 고파도 나는 괜찮다. 살맛난다.

얼마 전에는 새로운 나라의 일꾼들을 뽑았는데 그들이 정말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저 봄비처럼 소리도 없이 윤택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두보는 오죽하면 봄밤에 내린 비를 기쁜 비(春夜喜雨)라 표현했겠는가. 시인은 이 시를 지을 당시 전원생활을 하며 농사를 지었는데, 씨 뿌리고 생명이 새싹 돋우는 계절에 하늘에서 내려주는 비는 그야말로 단비였던 것이다.

80년대 초 사상 보다 생명이 더 우위에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역사의 전환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생명운동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중심으로 먹거리 도농직거래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후 한살림운동으로 전개 되면서 유기농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 사업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 사업의 핵심은 생명사상이기 때문에 장일순 선생을 일러 생명사상가라 칭하는 이유이다. 봄이 되어 반가운 단비의 손길을 느끼니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간다. 지금은 유기농 무농약이라는 말들이 보편화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참 희소한 개념이자 도발적인 생각이었다. 농약을 마구 뿌려대어 반지르르한 농산물들이 시장에서 인기리에 판매되는데 나는 이리저리 뒤적이며 잎이 벌레 먹은 열무단을 찾고 있거나 벌레가 파먹어 구멍 뜷린 배춧잎을 들고 안심하는 거였다. 한동안 나의 친족들에게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 말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이 누구보다도 무농약 유기농의 애호가들이 되어 있다.

그 후 생태문학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쳐 누구도 생태시인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생명사상을 주된 철학사상으로 삶을 논하는 『녹색평론』이 등장하면서 생명운동은 다시 체계적으로 정리 발전 되었다. 그 뒤로 십여 년간 생태문학은 신물이 날 정도로 넘쳐나게 되었는데 실제로 ‘모든 시인은 생태문학적 특성을 갖고 있다’라는 정의가 통하게 되었다. 그래서 『녹색평론』에서는 매번 2편 이상의 시를 수록하였다.

봄날이 무르익으면서 밭에서는 잡풀들도 대단한 생식력을 가지고 도발적으로 솟구쳐난다. 등골이 뻐근할 정도로 잡풀들과 씨름을 하다보면 해가 저물어 온다. 초봄에는 봄나물로 최고의 대접을 받는 쑥도 사월 말이 되니 내 일상의 최대 적이 되어 하루 종일 땀을 흘리게 한다. 비를 머금은 흙은 순하고 부드러워 잡풀제거 작업을 수월하게 해준다. 순순하게 딸려 나오는 쑥의 뿌리는 어찌나 질기고도 무성한 지 아직도 새싹의 눈을 허옇게 발아 시킨 채 쌩뚱 맞은 표정으로 수북이 쌓인다.

잠시 일손을 놓고 신문기사들을 뒤적거리자니 눈에 들어오는 사진과 글이 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비극 딛고 미 대표로 우뚝 선 옥사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기사이다. 옥사나의 성공스토리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악몽을 다시 상기 시켜준다. 지금으로부터 꼭 사십 년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제4호 원자로에서 발생한 20세기 최대 · 최악의 대사고이다. 당시 31명이 죽고 피폭(被曝) 등의 원인으로 1991년 4월까지 5년 동안에 7,000여명이 사망했고 70여 만 명이 치료를 받았다 한다. 이 사고로 방출된 방사능은 수많은 인명적 재해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생태파괴적인 사건은 불과 오년 전 일본 후쿠시마에서도 발생했다. 이 사고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은 편서풍을 타고 전 세계로 확산되어 미국, 유럽,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 까지도 위협적인 영향을 주었다. 방사성 물질의 폐해는 하루 이틀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너무도 불행한 생태파괴적 현상을 가져다준다.

봄비는 소리없이 산야를 적시며 생명의 싹을 키워준다. 조용하고 소박하고 작은 곳에서 우주가 주는 큰 생명의 비밀을 읽는다. 그것은 도시도 문명도 그 어떤 인공의 힘으로도 이길 수 없는 기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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