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1532년 스페인의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잉카제국에 들어섰을 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금이 아니라 코카나무 잎을 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자유분방한 연애로 애인의 질투를 받던 한 여인이 살해당한 후 코카마마(Cocamama)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자 고대 페루사람들은 그녀를 행복과 건강의 여신으로 섬겼다. 그리고 그녀의 환생으로 여겨지는 코카나무잎을 환각과 국부마취효과를 얻기 위해 씹었다. 몇 세기 후에 이 세상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마약인 코카인의 원료로 인식될 잉카의 여신은 남아메리카 지역의 나라들을 마약의 원조국가로 만들었다. 콜럼비아의 마약 카르텔은 오랫동안 코코아 생산에 경제기반을 두고 여러 방향으로 커넥션을 만들면서 탄탄한 조직을 유지해 왔다.
귈레르모 까노(Guillermo Cano Isaza)가 마약 카르텔의 정관계(政官界)와의 관련성을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기자로서의 의무감이었다. 1986년 그가 자신의 언론사인 에스펙타도르(El Espectador) 앞에서 두 괴한으로부터 저격당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그의 안전에 대해 염려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었다. 그의 죽음은 불의(不義)에 대한 언론의 역할을 세상에 다시금 일깨워 준 일이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국제연합(UN)은 산하단체인 유네스코(UNESCO)를 통해 5월 3일을 세계언론자유의 날로 선포하고 까노의 이름으로 용기 있는 언론인들에게 언론자유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최근 전 세계는 새로운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시달리고 있다. 종교, 민족, 정치, 그리고 영토 등은 테러의 원인으로서 인류의 역사를 통해 등장해온 단골 메뉴이다. 중세까지의 신본주의(神本主義)가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문화적 혁명에 무릎을 꿇은 것은 단순히 인간이 자신의 존재가치에 관한 일에 대해서 신의 간섭을 배제하겠다는 의도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는 신앙의 내용자체에 대해 신의 인간에 대한 계획과 의도를 재해석하게 했다. 철학이 종교의 시녀인 시대가 스스로 막을 내린 것은 신이 징계의 대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의 오류에서 온 당연한 결과였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가치를 절대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판단이 종교라는 미명(美名)하에 폭력과 살인을 악(惡)이 아닌 선(善)으로 바꾸어 왔었다. 역사는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근대로의 발전을 이루었다.
인간중심의 사고는 근대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근저(根?)에 있던 것이 바로 ‘경제’이다. 산업혁명이 준 물리적 자유의 달콤함에 빠져 있는 동안 그 이면(裏面)에서 덩치를 키우고 있던 경쟁본능이란 괴물의 그림자를 인류는 눈치 채지 못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인간은 원초적 폭력성을 가졌다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한 것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었다. 그렇게 역사는 아픔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현대를 맞으면서 국제사회는 국제적인 협력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 판단이 옳았다면 새로운 시대는 평화를 위한 노력이 평화를 저해하는 요소들보다 우위에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역사는 폭력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었다. 종교와 국가 그리고 경제지역간의 갈등은 새로운 모습으로 겉모습만 바꾸어 가며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폭력을 목표로 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언론의 자유가 선량한 사회를 위한 마지막 보루로 인식되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였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에 관한 중요성이 부각되자 이는 곧바로 언론의 의무에 대한 개념을 사회의 발전과 유지이냐 아니면 언론사 자신이 속한 집단의 발전과 유지이냐를 기준으로 새로운 세력편성시대를 갖게 했다. 평화의 유지가 아니라 평화를 저해하기 위한 수단 역시 언론을 이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론이라는 용어자체의 의미가 새롭게 정의될 필요가 있게 된 것이었다. 언론의 자유가 언론의 왜곡을 부추겨온 측면이 그 힘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제사회가 건강한 양심에 바탕을 둔 자유의 개념에 대해 어떤 카테고리의 성립도 불허하게 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식인이라면 자유를 위한 사회의 발전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 근본적 개념에서의 자유의 진보는 어떤 철학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야 마땅한가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싶어 할 것이다. 생명의 종류보다 더 다양한 인간의 생각들이 한 가지 정의로 개념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생각과 사상(思想)들이 인간임으로서 원인된 것이라면 그 공통부분을 찾기 위한 노력 또한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5월 3일 오늘, 2016년 세계언론자유상 시상지인 핀란드(Finland)에서는 아제르바이젠(Azerbaijan)의 카디자 이스마일로바(Khadija Ismayilova)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보여준 언론인의 용기로 올 해의 세계언론상을 수상한다. 인류가 현재 가진 모든 한계로부터의 자유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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