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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40-마지막회>
조명희 평전 / 불꽃으로 타오른 민족혼<40-마지막회>
  • 김명기 기자
  • 승인 2016.05.15 1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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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총살형… 그의 정신은 우리 가슴에 남다
▲ 하바로프스크 KGB본부 건물. 1937년 9월 18일 KGB요원들에 의해 체포된 포석은 이 곳에 수감돼 8개월 뒤인 1938년 5월 11일 총살형을 당했다.
▲ 하바로프스크 시내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위치한 공동묘지. 이 곳에는 스탈린 정권에 의해 희생 당한 수천 명의 억울한 영혼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김명기 동양일보 기자) 1928년 8월 21일 러시아로 망명한 포석은 블라디보스토크(해삼) 신한촌에 거주하게 된다.

이후 륙성촌과 우스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지에서 러시아 한인문학의 태조(太祖)로 활발하게 활동한 그의 업적은 지난 2014년 10월 12일부터 2015년 3월 15일까지 동양일보에 연재한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를 찾아서’를 참조하면 될 듯싶다.

2014년 9월 2일부터 11일까지 9박10일 동안 러시아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 선생의 족적을 찾아 다니며 기록했던 ‘조명희 답사기’에서 이미 많은 부분이 언급됐기 때문이다.

다만, 마포나루에서 러시아로 망명한 이후 포석의 행적을 간략하게 연대기적인 정리를 통해 되짚어 본다.

 

포석이 1928년 늦은 여름 정착하게 된 신한촌은 스탈린의 민족차별 정책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살던 한인들이 멀찍이 떨어진 교외로 강제 이주 당해 정착하여 살아가던 곳이었다.

이듬해인 1929년 포석은 륙성촌으로 간다. 륙성촌은 우스리스크에서도 꽤 멀리 떨어진 시골이었다. 1930년 9월 포석은 그곳에서 륙성농민청년학교 조선어 교사로 활동한다. 그리고 1931년 봄 황명희를 만난다. 포석이 러시아에서 황명희와 결혼하게 된 데에는 황명희의 남동생 황동민의 영향이 컸다. 륙성촌에서 포석을 본 황동민은 포석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자신의 손윗누이와의 만남을 주선했던 것이다. 포석과 황명희는 장녀 조선아, 장남 조선인, 차남 조블라디미르를 두었다.

그때 포석이 가르치던 제자 가운데 영민한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최 예까떼리나였다. 황동민은 최 예까떼리나와 결혼하고 장남 황유리, 차남 미쨔 장녀 알라 등의 자녀를 두었다. 1931년 봄 황명희와 재혼한 포석은 우스리스크로 이사해 조선사범학교 조선어문학 교사를 맡는다. 1932년 1월 20일에 장녀 선아가, 1933년 2월 2일 장남 선인이 태어난다.

1934년 러시아의 문호 파제예프의 추전으로 포석은 소련작가동맹 맹원으로 가입한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신문인 ‘선봉’의 문학편집자로 일하게 된다.

1935년 봄 하바로프스크로 이사한 포석은 명망있는 문사들에게 제공됐던 ‘작가의 집’에서 거주하게 된다. 이 당시 포석이 조선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연해주 지역을 돌아본 ‘조명희 답사단’은 이 대학의 정확한 소재와 포석의 근무 여부 등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지는 못했다.

1936년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에서 간사로 활동한 포석은 ‘선봉’ 신문에 작품집 ‘노력자의 조국’의 주필로 고려문학 건설에 힘쓴다.

1937년 8월 12일 차남 조 블라디미르가 태어나고, 한 달여 뒤인 9월 18일 포석은 KGB 요원들에 체포된다.

하바로프스크 KGB 본부에 수감돼 있던 포석은 이듬해인 4월 15일 사형선고를 받고, 5월 11일 총살형을 당한다.

 

포석이 1928년 8월 21일 러시아로 망명한 후 처음 발표한 작품은 ‘짓밟힌 고려’이다. 포석은 그해 장편소설 ‘붉은 깃발 아래서’를 집필했는데, 현재 이 작품은 실종된 상태다.

1930년 9월 포석은 일련의 동요 작품들을 발표한다. ‘전봇대’, ‘다라나기’, ‘연필침’, ‘소금쟁이’, ‘눈싸움’, ‘샘물’, ‘새들의 회의’, ‘어린 두 나무꾼’ 등이 그것이다.

1931년 3월에는 시 ‘볼쉐비키의 봄’과 ‘녀자 돌격대’를, 9월에는 ‘10월의 노래’를 발표한다.

1933년 10월 조선문학에 시 ‘무제(無題)’를, 1934년 4월 ‘맹서하고 나서자’, 6월 3일 ‘5월 1일 시위운동장에서’를 발표하고, 1935년 3월 8일 선봉에 산문시 ‘아우 채옥에게’를 발표한다.

3월 18일에는 선봉 21호에 평론 ‘아동문예를 낳자’를, 6월 30일 선봉에 산문시 ‘까드르여, 너의 짐이 크다’를, 7월 30일 선봉에 평론 ‘조선의 노래를 개혁하자’를 발표한다.

1937년 로력자의 조국2호에 평론 ‘로력자의 고향에 실린 시들에 대하여’와 ‘시 씨비리아 철도행에 대하여’를 발표한다.

5월 15일 로력자의 조국2호에 서간문 ‘젊은 작가들에게 준 포석의 서한문 중에서’와 시 ‘아무르를 보고서’, ‘공장’을 발표한다.

그리고 그해 포석의 역작 ‘만주 빨치산’을 집필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실종되고 말았다.

1938년 5월 11일 포석이 스탈린 정권으로부터 ‘일본 스파이 앞잡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총살형을 당한 이후 러시아 한인사회는 포석의 신원 회복을 위한 많은 노력이 진행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56년 7월 20일 소련 극동군 관구 군법회의는 ‘1938. 4.15 결정’(포석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을 파기하고 무혐의로 처리한 뒤 복권시켰다.

이에 앞서 5월 3일 포석의 조카 조벽암과 조중협이 운영하던 건설출판사에서 ‘조명희 선집’을 발간했다.

러시아에서도 포석의 신원회복에 힘입어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가 1959년 12월 10일 ‘조명희 선집’을 소련과학원 동방도서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87년 9월 15일 슬기출판사에서 ‘낙동강’을 출간했고, 1988년 11월 15일 풀빛출판사에서 ‘조명희 선집/낙동강’를 출판했으며, 1994년 동양일보에서 ‘포석 조명희 전집’을 펴냈다.

러시아 한인문학의 태조로 추앙받고 있는 포석의 업적과 뜻을 기리기 위한 현지 한인들의 노력도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1988년 12월 10일 ‘조명희 기념실’이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알리세르나워이 문학박물관에 설립됐으며, 1992년 5월 21일 ‘조명희 거리’ 명명식이 타슈켄트 벡쩨미르 지역에서 열렸다.

한국에서도 1994년 9월 10일 ‘탄생 100주년 기념 포석 조명희 문학제’가 진천에서 열렸고, 포석이 태어난 곳에 표지비가 세워졌다.

 

▲ 하바로프스크 공동묘지에 있었던 조명희 비문. 1990년대 초까지 있었으나 2014년 9월 답사단이 방문했을 때 분실된 상태였다. 그 곳 한인회장의 협조로 소재 파악을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에필로그

이야기를 ‘포석 평전’의 첫머리로 돌려, 다시 1938년 5월 10일 하바로프스크 KGB 본부 지하 감옥.

음전한 미소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푸근히 감쌌던 포석의 모습은 깡마르고 형형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무던히 되짚어 보곤 했지만 도무지 그럴만한 일이 없었다. 애초부터 스탈린 정권은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기 위해 불만 세력의 잠재적 지도자일 수밖에 없었던 포석을 제거하려 했었다.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삶이란 것이, 정의란 것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희생 당해야만 하는 약소 민족의 후예라는 것이 너무나 서글펐다.

한편으론 가족들 걱정이 됐다. 거친 삶의 복판에서 언제나 조용히 자신을 따르던 아내의 얼굴과 맑고 곱게 커가고 있는 선아, 선인, 그리고 태어난 지 한 달 남짓밖에 안됐던 블라디미르. 들려오는 풍문으론 거칠고 험한 저 황무지, 중앙아시아로 쫓겨났다고 하는데 가장없는 가족들이 사람 살아가기 힘든 그 척박한 땅에서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 마음이 아팠다.

조선에 두고 온 가족도 생각났다. 조선의 가족을 떠올릴 때마다 포석은 늘 ‘부채의식’에 시달렸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됐든 그들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아내 민식(閔植)은 남편이 하는 일은 늘 하늘처럼 여겼었다. 쥐꼬리만한 돈으로 가정을 꾸려 나갔던 그녀의 고생을 누구보다 포석이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스물 넷의 어엿한 아가씨가 돼 있을 큰딸 중숙과 열 아홉 소녀가 되었을 중남, 조선을 떠날 때 다섯살이었던 장남 중락은 이제 고보에 들어갈 만한 나이 열 다섯일 것이고, 차남 중윤은 열 두살일 것이었다. 자신이 조선을 탈출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조선에 있는 가족들이 일제로부터 겪었을 엄청난 고초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포석에게 조선의 가족이나 러시아의 가족이나 미안하고 안타까운 이들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햇빛 한 줌 들어오기 힘든 지하감옥에서 그래도 근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가진 신념에 대한 확신과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당당함과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 여기는 가족과의 해후였다. 해서 쌓아놓은 모래성을 파도의 흰 포말이 부수고 또 부수어도 다시 쌓고 또 쌓고 하는 것처럼, 삶에 대한 애착을 쌓았다 부수었다를 여덟달 동안 계속 하면서도 그것이 허망한 것이 결단코 아니라는 자기 암시를 늘 주곤하던 포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4월 15일 자신에게 내려졌던 사형 선고는 번복될 것이었다. 거짓이 참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로망으로 여겼던 사회주의 국가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정의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때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쇠창살 너머로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더 포석이 갇혀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끼이익, 문이 열렸다. 포석은 직감했다. 아직 상념에 젖어있는 자신에게 그것은 현실에서의 마지막 소리라는 것을. 포석은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끝이구나!’

그러나 포석은 머리를 거세게 가로저으며 다시금 생각했다.

‘그래, 성운의 뒤를 로사가 잇듯, 이건 이제 시작일 뿐이야.’

그들은 포석의 눈에 검은 천을 씌웠다. 검은 천을 씌우는 만큼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고, 탕! 날카롭고 비정한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암전(暗轉)이었다.

 

포석의 시신은 하바로프스크 교외에 있는 한적한 계곡에 버려졌다. 그 곳엔 포석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억울한 희생을 당한 수천명의 영혼들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누구인지도 모를 이의 입에서 입으로 애절한 노래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멈춰라.

불법적인 스탈린 시대에

아무런 죄없이 조사받다

돌아가신 주검에 인사를 하라

수 천명의 죽은 마음이

여기에 있다

하느님을 믿는 자

기도를 하라

아무 이유없이 죽은 자의 마음을

고요하게 해달라

죄들은 당신을 욕한다

당신의 이름들이 역사에

다시

되살아난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 시대에 죄없이 희생 당한, 그러고도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되지 못해 구천을 떠돌, 수 천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슬픈 헌시(獻詩)였다.

 

그동안 ‘포석 조명희 평전’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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