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충주서 세미나 열고 탄생 11주년 기념 업적 재조명

(충주=동양일보 윤규상 기자)한국인 최초로 올림픽에 출전한 고 권태하(19061971) 선생을 기리기 위한 세미나가 다음달 2일 충주에서 열린다.

이날 세미나는 한국 마라톤의 개척자로 불리는 권태하 선생 탄생 110주년을 맞아 그의 일생과 체육계에 남긴 업적을 집중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고 권태하 선생은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1936년 베를린 올림픽보다 4년 앞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김은배 선수와 함께 출전해 9위를 차지했다.

그는 손기정의 우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육상 지도자로 평가받지만, 현재까지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충주의 지주집안 출신인 권태하는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한 뒤 휘문고보에 진학했으나 일제 통치를 거스르는 불온서적을 읽는다는 이유로 종로경찰서 사찰 대상에 올라 퇴학당했다.

어릴 때부터 운동에 소질이 많았던 그는 일본 리츠메이칸 중학교로 진학해 중거리 육상과 럭비, 축수선수로 활약했으며. 이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3학년 재학 중 당시 양정고보에 다니던 김은배 선수가 세계 최고 수준의 마라톤 기록을 달성한 것에 자극받아 스물여섯 나이에 마라톤 세계 제패의 꿈을 꾸게 됐다.

도쿄에서 약 100떨어진 하코네산에 캠프를 차린 그는 맹훈련을 거듭해 기록을 2시간 28분대까지 끌어올렸다.

1932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해 올림픽 선발 예선전인 조선 제1예선 육상경기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대회를 이틀 앞두고 당시 일본 순사에게 폭행당한 상태에서 일궈낸 기적 같은 성적이었으며. 이후 도쿄 본선에서도 1위에 올라 당당히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같은 해 8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올림픽에 일본 마라톤 대표로 출전했으나 2시간 4252초의 기록으로 동료 김은배(6) 선수에 이어 9위에 그쳤다.

김은배 선수와 함께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하라는 선수 겸 코치 쓰다 세이이치로의 지시를 거부하고 선두그룹에서 달리다 오퍼 페이스를 해 체력저하로 결국 9위로 골인했다.

당시 권태하 선수는 결승선 10를 앞두고 쓰러진 뒤 기다시피 골인하자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는 일화도 있다.

권태하 선수는 올림픽이 끝난 뒤 미국에 남아 남캘리포니아대학(UCLA)에서 1년간 유학한 뒤 귀국해 한국 마라톤과 체육계를 위해 헌신했다.

해방 이후 김은배, 손기정, 남승룡 등과 함께 조선마라손보급회를 조직했으며 9대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고집스러운 성격에 직언을 마다않아 외로운 육상인의 길을 걸었던 그는 1971년 마라톤에 대한 열정과 투혼을 뒤로하고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날 세미나는 권오륜 부산대 교수와 박귀순 영산대 교수, 김희찬 아이들의 하늘 간사, 김형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원, 이종세 전 동아일보 국장이 각각 주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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