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주의 100년을 준비하는 문화콘텐츠 ‘젓가락’ <2>

(동양일보 김재옥 기자)● 김성호 칠장 ‘나전칠기 젓가락’

청주시가 지난해 11월 11일 개최한 젓가락페스티벌에서 1m 크기 옻칠나전 젓가락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김성호(60·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81-4) 충북도무형문화재 칠장.

40여 년 간 칠장이로 살아온 그도 한 벌의 옻칠나전 젓가락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꼬박 한 달여 시간이 걸린다.

구강건강에 좋아 껌의 원료로도 사용되는 자작나무에 옻칠을 하고 닦고 가는 작업을 7차례 반복한다. 그 옻칠과정에서 5번째는 아름다운 젓가락을 만들기 위해 자개를 붙이거나 나전문양 시문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한 번의 나전칠기 젓가락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

김 작가는 문화상품으로써 ‘옻칠나전 젓가락’을 높이 평가한다. 오롯이 사람의 수작업으로 완성하기 때문에 같은 모양의 젓가락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만으로도 문화상품으로써 나전칠기 젓가락의 가치는 충분하다. 또 하나, 옻칠은 방향(芳香)과 방습, 방열, 방충에 뛰어난 효과가 있고 본초강목과 동의보감에 위벽을 보호하고 몸을 따뜻하게 한다는 이로운 칠 기법이다. 여기에 대한민국 고유의 문화인 나전칠기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문양을 더하면 젓가락으로써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는 것이 김 칠장의 생각이다.

김 칠장은 “옻칠은 5000년 전 이집트 초기 왕조부터 썼고, 대한민국에서는 2500년 전부터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면서 “수천 년이 지나도 썩지 않았다는 것은 옻칠이 얼마나 습에 강하고 방충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 김우찬 강원도무형문화재 14호 방짜수저장 전수조교 ‘방짜수저’

‘방짜수저’를 인생의 또 다른 반려자라고 생각한다는 김우찬(40·강릉시 입암로 강중길 34) 강원도무형문화재 방짜수저장 전수조교는 강릉에서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젊은 장인이다. 16세 때 강원도무형문화재 14호인 아버지 고 김영락 방짜수저장으로부터 방짜수저 만드는 일을 배운 뒤 지금까지 방짜수저장 외길만을 걸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방짜수저는 장인의 땀과 비례한다.

방짜수저 한 벌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사흘 동안 두드리고 펴고 다시 두드리는 전통적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강릉의 참방짜수저는 ‘참쇠로 만들고, 참빛을 띠고, 참소리가 나고, 참요양을 이루고, 참뜻을 얻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정교하고 까다로운 제작과정을 통해서만이 황금빛 윤이 나는 명품 방짜수저를 만날 수 있다.

방짜는 구리 1근에 주석 4.5냥을 더한 것으로 대한민국에서만 전해져 오는 고유의 합금방법이다. 구리와 주석을 정확한 비율로 녹여 한 개의 숟가락이 될 10cm 정도의 무디가락을 만든다. 숯불에 달군 무디가락을 모루에 올려놓고 뒤집어가며 망치질을 해 수저의 기본 모양을 잡는다. 무디가락을 숯불에 15차례 이상 담금질 해 두드리면 쇠의 조직이 치밀해져 강도가 높아지고 광택이 나는 수저를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숟가락을 나무틀에 고정하고 호비칼로 거뭇한 때를 벗기면 황금빛 방짜수저가 된다. 여기에 숟가락을 줄질로 다듬은 뒤 날카롭고 뾰족한 칼로 머리와 손잡이에 문양을 새긴 후 쇠기름으로 광을 내면 비로소 금빛 방짜수저 한 벌이 탄생된다. 황금빛 방짜수저는 농약 성분과 만나면 까맣게 변색할 뿐 아니라 식중독균을 죽이는 효과도 있어 문화상품으로써의 가치도 높다.

김 전수조교는 “방짜수저는 몸에 이상이 생기면 수저가 변색되는 성질 때문에 문화상품으로써의 가치가 충분하다”면서 “이 때문에 옛말에 거지가 깡통을 차도 방짜는 꼭 쥐고 다녔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 박갑술 충북도무형문화재 유기장 ‘유기 반상기’

전통주물유기 제작 60년 외길 인생을 걸어온 박갑술(83·충북도무형문화재 24호·충주시 충인동 73) 유기장에게 유기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또 다른 자신이다. 한국전쟁 직후 유기는 가난한 생활에 가족들의 생계였고, 자식들의 학비였기 때문이다. 그가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유기 만드는 일을 놓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경북 김천 출생으로 18세부터 부친이 운영하는 유기점 일을 돕기 시작해 1962년부터 55년간 충주에서 유기장으로 쇳물과 평생을 함께했다. 한국전쟁 직후 기물이 부족해 호황을 누리던 때도, 1970년대 양은그릇과 스테인리스의 보급으로 유기가 사양길로 접어들었을 때도 그는 오롯이 전통방식의 유기제작방법만을 고집하며 최고 품질의 유기제작에 매달렸다.

금빛 윤기가 도는 최고 품질의 유기는 유기장의 인내와 땀으로 탄생한다. 구리(78%)와 주석(22%)을 합금해 향남틀에 본기(원본기 되는 그릇)을 넣고 암틀(거푸집)과 수틀을 만든다. 이어 암틀수를 분리해 본이 되는 그릇을 들어내면 공간이 생기는데 그곳에 합금한 쇳물을 들어가 그릇의 형태가 된다.

이후 흙의 수분을 제거해 온도차를 없애고 흙을 단단하게 굳혀 쇳물이 잘 흘러들어가게 하기 위해 암틀과 수틀에 그름질 한 후 다시 이것을 결합시켜 1200~1300도의 쇳물을 부어 식힌 후 열처리 과정인 담금질을 한다. 담금질은 소금물에 담갔던 것을 다시 불에, 다시 찬물에 넣는 과정으로 쇠를 더 단단하고 깨지지 않게 한다. 이후 그릇의 산화피막을 벗겨내 황금색의 빛깔로 만드는 가질작업을 하면 비로소 황금빛의 명품 충주유기가 만들어진다.

박 유기장은 이 모든 과정을 전통방식 그대로 고집하고 있다. 특히 유기가 광이 나도록 깎는 가질 틀을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전통 방식대로 제작, 사용하고 있어 보존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박 유기장은 최근 유기가 피브리오균 등 각종 유해세균을 없애고 독성물질에 반응한다는 사실이 주목받으면서 문화상품으로써의 가치도 크다고 전했다.

또한 △영양소를 파괴시키지 않고 장시간 유지 △뛰어난 보온·보냉 △입병 예방 △무독·무공해 식기라는 것을 강조하면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박 유기장의 생각이다.

 

● 이소라 규방공예작가 ‘조각보 수저집’

규방공예작가인 이소라씨의 손끝에서 형형색색의 조각보 수저집이 탄생했다. 명인의 젓가락을 돋보이게 하는 수저집과 명주 등 조각보를 이용한 식탁매트는 밥상의 품위를 더한다.

이 작가는 수저집을 청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을 만들기 위한 고민으로 수날 밤을 지새웠다. 단순한 바느질이었다면 수월했겠지만 실용성과 조각보의 아름다움을 모두 담은 수저집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각보 수저집을 만들기 위해 이 작가는 천연염색한 명주천, 면천, 한복천 등 각기 다른 여러 천을 모았다가 떠오른 구상에 가장 알맞은 소재와 색을 선택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 조각 한 조각 이어 붙이고 거기에 박쥐매듭, 상침, 누빔, 잣씨 장식 등 전통기법이 더해지면 고운 수저집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이 작가는 휴대용 수저집을 만들기 보다는 선물 포장용이나 테이블 세팅용 수저집이 문화상품으로써의 가치가 더 크다는 생각이다.

보편적으로 수저집을 휴대하고 다니는 한국인은 드물고 정서와도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수저집은 품위를 더해주고 격식을 갖춰 상대방으로 하여금 대접받는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며 “수저집을 고급화 시키고 이러한 장점을 잘 살려 선물포장용 수저집으로 개발한다면 좋은 문화상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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