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지난 21일 교육부와 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는 전국 197개 4년제 대학의 수시모집 비율을 70.5%로 발표했다. 2015학년도의 65.2%, 2016학년도의 67.4%에 이어 그 상승세를 유지함으로서 2017학년도 대학응시생 246,891명 중에서 211,762명의 입학이 수시로 결정되게 되었다. 이제 대학진학의 방법에 있어서 단순히 수능을 준비하는 것은 응시자 스스로가 공부이외에는 별다른 특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인(自認)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대학입시에 있어서 수시의 비중은 앞으로도 점점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수시란 무엇인가? 왜 교육부와 각 대학들은 수시의 비중을 높이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수시비중의 확대가 대입제도의 근본적 보완책으로서의 역할을 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수시전형이란 수능점수와 면접에 의존하는 일반전형이외의 모든 학생모집방법을 통합하여 부르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또다시 논술전형, 학생부교과전형, 학생부종합전형, 특기자전형 등으로 나누어진다. 논술전형이란 논술시험 점수를 가장 커다란 전형요소로 삼는 것이며 학생부교과전형이란 교과활동과 비교과활동, 즉 학교활동 전체를 기준으로 전형하는 것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은 서류심사와 면접만으로 학생의 학업수행능력을 평가한다. 전형의 기준은 탐구력에서부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 매우 다양하다. 입시생들의 입학전략이 가장 크게 대두되는 부분이 학생부종합전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7년도 수시에서는 논술의 비중이 지난해의 6.3%보다 더 떨어진 5.9%로 결정되었다. 반면 학생부 위주 전형은 학생부교과가 56.3%, 학생부종합이 29.5%로서 총 85.8%에 이르게 되었다.
교육부와 각 대학이 수시의 비중을 높이려고 하는 의도와 그것이 갖는 의미는 여러 가지 방향성을 갖는다. 그러나 크게 보면 다양해진 사회를 이끌어 나갈 통합형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와 진정한 탐구력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고자 하는 각 대학의 개별적 욕구를 동시에 채워주는 것이 수시의 가장 큰 기능이다. 모든 체계가 의미상 급변하는 시대에 이에 맞는 우수학생을 선발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가 수시전형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육의 목적은 취직이나 돈을 벌기위한 수단확보라는 물리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교육의 질을 떨어트리고 개인의 행복한 삶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그러더니 결국 학습자체를 방해하여 원래 의도했던 취직이나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의 학문의 기능마저도 퇴화시키고 말았다. 사람의 탐구욕과 그 성과는 학습에 관한 개개인의 성향에 근거하는 것이지 어떤 규정 하에 정해진 과정을 수행하는 능력을 계량화하는 것에 있지 않다. 이를 깨닫는 것이 바로 실질적 발전의 근본조건이다. 각 대학이 신입생 선발에서부터 자율성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시모집은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발굴의 기준모델이 되지 못한다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정부와 대교협뿐만 아니라 수험생들도 선호하는 학생부관련 전형의 확대를 학부모들은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논술이 대학입학전형의 한 방법으로 등장했을 때 우리나라는 논술과외로 시끄러웠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독서를 통해 감성을 논리화시켰을 때 좋은 글이 나온다. 따라서 ‘논술’시험은 ‘독서’의 정도를 가늠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그런데 논술에서 고득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글쓰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는 명목 을 앞세워 학생들을 독서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했고 학부모들에게는 커다란 경제적 부담을 부과했다.
학생부위주 전형은 실질적 선진화를 위해 확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사회구성원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자신의 역할을 했는가를 평가하기 위해 비교과과목을 두었더니 봉사는 하지 않으나 봉사점수는 최고로 얻는 비정상적 방법이 먼저 등장했다. 순수한 탐구심을 전형의 기준으로 삼았더니 순수한 탐구심을 가진 아이로 보이는 방법을 거래하는 시장이 생겼다. 이 괴상한 것들은 모두 이 땅의 어른들에 의해서 신속하게 진화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행복은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재산의 액수와 등수 등에 인생의 본질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은 종교적 신앙을 넘어선지 오래다. 아이들은 이 구조 속에서 순수성을 빨리 잃어버릴수록 똑똑한 아이로 분류된다. 이 아이들이 커서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이 들추어져 돈으로 치장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 상태를 사회의 최종진화단계로 인식한다.
사람의 일은 그 일에 관련된 사람의 수준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교육의 본질은 사람의 내면적 가치를 심화시킴으로써 추상적으로 존재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서 다른 것은 부수적으로 해결될 뿐이다. 교육의 본질화를 위해 우리 사회가 같이 노력해야 함을 수시전형이 설득하지 못한다면 역사는 교육의 왜곡이 사회전체의 퇴화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우리에게 경험시킬 것이다. 우리 모두가 책임을 지고 같이 노력해야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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