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엄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말하다

▲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지난 6월 10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주제로 한 콜로키엄을 개최했다.

동양포럼 운영위원회는 지난 6월 10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주제로 한 콜로키엄을 개최했다. 이날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한·중·일이 함께 공공하는 철학대화모임 대표)을 좌장으로 열린 행사에서는 진익송 충북대 교수가 ‘한·중·일 문화공동체’을 주제로 발제했으며 김용환 충북대 교수, 임승빈 청주대 교수, 신동의 청주교대 강사가 참석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이날 콜로키엄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주>

 

저는 북미지역에서도 뉴욕에서 30년 가까운 기간을 이어오면서 학업과 함께 예술가로 작품 활동을 해왔기에 어떤 면에서 동아시아의 문화에 대해 논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타산지석’ 이라는 말도 있듯이, 문화는 ‘타자(他者)’라는 상대편에서 비추어진 거울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이 조명되는 법이어서 제가 존재하는 안과 밖의 고른 시각적 편린(片鱗)을 유추해보는 것도 가속한 지역문화를 조명하는데 유용할 수도 있으리라 여겨 짧은 논리를 제시해보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기의 시대적 환경을 배경으로 형성되어져가는 한·중·일 문화공동체는 문화적 세계화와 병행해 형성되어져가고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이것은 경제와 마찬가지로 한·중·일 문화공동체가 문화적 세계화와 배치되는 다른 개념으로 이해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중·일 문화공동체는 세계화의 문(門)을 향해 열린 개념으로 그 사고의 범위를 확장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이 세계화의 문 앞에 서있는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은 동양인으로서 관습과 기술, 이념 신앙의 영역들로 규정되어지는 정체성인데, 이것은 오늘의 이 시대를 향해 보여주고 세계화를 위해 협력해야할 기본적 자산이며 서구사회에 의해 주도적으로 형성되어져가고 있는 어떤 스타일과 룰을 비판하고 동등한 입장에 서서 그 오류와 독선을 고발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공동체에 관한 개념은 전통적인 혈연과 지연에 의한 것에서 더 나아가 구성원간의 공통된 이념과 안보 및 경제적 이익에 의한 상호작용으로 그 공동체의식의 패러다임은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특별히 뉴욕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미처 형성되기도 전에 세계 곳곳의 전통이 운집하여 어떤 종합적인, 그러면서도 지극히 세분화된(개별적인) 정체성이 존재하는 모순의 현장입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아르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원래 근원과 중심이 없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근원과 중심의 부재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미국에서 가장 번창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사회의 구성은 다양한 민족, 인종, 종교, 관습의 혼합체로 어느 한 민족과 국가의 신화적 근원이나 절대적 중심이 없이 시작되었기에 이로 인해 유럽에 비해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문화기반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전통과 근원, 개별적 정체성과 포스트모더니즘정신이 공존하는, 인류가 이전에 경험해보지 않은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일종의 거울이며 이 거울은 인종과 문명과 지역을 초월한 새로운 정체성을 자각케 해주는 거울로써 새로운 인류의 스타일, 가치관, 생활양식을 급속도로 생산해내어 세계로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국력과 함께 새로운 문화제국주의 이론을 등장시켜 문화충돌과 함께 반 세계화 운동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세계 각지의 지역문화를 끊임없이 뒤섞어 새로운 혼성문화를 생산해내며 세계화에 그 속도를 더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화는 문화적 차원에서 각 지역의 균등한 발전보다는 초강대국인 미국적 양식이 과학기술과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전 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통일시켜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한·중·일 문화공동체의 궁극적 지향점은 세계화를 통해 앞에서 언급한대로 서구사회에 의해 형성 되어져가고 있는 어떤 스타일과 형식을 비판하고 그 오류와 독선을 고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과 같이 혹시 인류가 직면하게 될지 모를 독선적 진리의 횡포에 의한 절망적 미래를 대신할 수 있는 훌륭한 대안으로 함께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인류의 미래를 향한 설계에 3국이 함께 노력하여 한·중·일의 협력에 의한 ‘아시아적 가치와 그 역할’을 세계에 인지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론은 근대이후 형성되어 지금까지 동북아시아 문화공동체를 형성하는데 큰 장애가 되어온 3국간의 역사적인 원한, 동북아의 불평등한 경제와 정치구조, 자기 민족만을 중심으로 보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나 한·중·일 문화 공동체형성을 위한 거시적 동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오늘날 동·서양의 철학과 문화, 예술교류는 과거의 호기심과 선입관의 단계를 벗어나 이미 체험적인 단계로 진전되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류의 문화가 인종과 이념 종교 그리고 지역적 관습에 의해 정의되었던 상황에서 이제는 ‘포스트 휴먼’으로서 새로운 ‘동질성’과 그 정체성을 찾아내는 과정이 되어 질 것이라 여겨지며 이런 의미에서 한·중·일 문화공동체와 그 세계화는, 각 국가의 현실적 관념 속에 존재하는 역사와 경제, 문화적 편견과 그 오류의 벽을 먼저 허물어뜨리는 노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함은 자명한 일인 것입니다.

이에 한·중·일 문화 공동체는 아시아적 가치를 정립하고 그 아시아적 가치가 전 세계적 가치로 표방될 프로젝트로서의 문화공동체 사업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인데, 그 프로젝트는 3국이 새로운 지적(知的) 연대와 혁신으로 그 궁극적 지향점이 지역적 유산으로서의 문화공동체 개념을 넘어 인류 공통의 유산으로 그 정의를 넓혀야 할 것입니다.

한·중·일 문화공동체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문화 환경과 그 효용성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지는 숙고되어져야 하는데, 과거의 역사와 문화는 3국이 문화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한 중요한 시발점이며 가치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한·중·일 문화공동체가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확립한 국제규범을 초월해서 노정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중·일 문화 공동체 환경조성이 인류 문명과 세계체계에 미래지향적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추구하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동서양이 대립과 갈등의 시대를 넘어 인류의 미래를 함께 설계해 나가는 동반자적 공동체로서의 개념입니다.

인류의 미래는 과학의 진보를 바탕으로 인공지능과 함께 포스트 휴먼 시대를 열어갈 것이며 인류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인류의 정체성을 재정립시킬 것이 분명합니다. 전 세계가 일일 생활권이 될 날도 머지 않았고, 인터넷의 발달로 뉴스와 문화 소비가 이미 동서양의 대륙 간 지역을 초월하여 국지적 이슈와 함께 실시간 취급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중·일 문화 공동체는 그 지향점이 과거와 현재에서 미래지향적인 가치로 그 방향을 조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문화는 평등하며 인류가 함께 향유하는 것으로, 차별을 만들고 타자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여야 하는데, 한 중 일 3국이 가장 먼저 다루어야 될 것으로 먼저 새로운 공동체개념의 확장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한·중·일 3국은 각국의 전통적 생활방식에 따라 사회제도에 있어서 의식의 차이가 존재함과 동시에 그 가치 개념과 사유방식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자칫 문화 자기중심주의를 불러 일으켜 자기 민족문화를 가장 우수한 문화로만 인정하고 타 민족의 문화를 멸시하거나 차별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비판해오던 서구 문화제국주의적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오류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포스트 휴먼시대를 앞두고 있는 미래에 한·중·일 문화공동체가 서구의 동반자로서 인류문명의 미래를 함께 설계하고 참여해 나가야하는데도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의 문화예술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는 뉴욕의 상황은 한·중·일 문화공동체의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하겠는데, 뉴욕은 200여 국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이룬 하나의 도시로서 모든 국가의 전통적 관습과 인종, 종교, 이념, 정치적 성향이 혼재해 있어 어떤 한 면모로만 설명되어지기 어려운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본의든 아니든 다양한 국가의 정체성과 그 문화를 섞어 만든 이 ‘뉴욕잡탕?’이라는 요리(문화)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맛이 있어서, 뉴욕을 벗어난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도 그 문화적 가치를 거부감 없이 전달하고 또한 그 가치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중심으로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북미를 향한 대규모 이민의 역사에서부터 시작된, 이전에 없던 역사적 현상으로 온갖 문화가 섞여 만들어진 이 새로운 문명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정체성도 어디엔가 담겨있는 문화로 느끼게 만들고 또한 그것을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독특한 현상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한 중 일 삼국이 쉽게 빠져들었던 자기중심적 민족주의와는 다른, 모든 인종과 각 국가의 문화가 동등한 가치로서 인류를 향해 소중한 자산으로 받아들여진 문화 민주주의적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미국도 지금까지 이르게 되기까지 인류에게 빚진 시대착오적인 오류가 적지 않았지만, 점점 좁아져가는 지구촌에서 국가의 힘을 바탕으로 저질러졌던 과거의 일방적 문화 우월주의는, 오늘날 과학의 진보와 함께 전 세계인의 민주적감성에 의존하는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되었음은 부정 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한·중·일 문화공동체의 궁극적 목표는 한·중·일 의 문화 가치가 지엽적 경계를 넘어 인류의 삶과 그 행복한 미래에 기여하는 동반자적 역할로 그 목표를 노정시켜야 하리라고 봅니다. 또한 3국의 학자들은 지적연대와 혁신으로 한·중·일 문화공동체에 대한 미래의 정체성을 담을 창의적 구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문화는 ‘거북이와 토끼’ 우화와 같아서 세월이라는 칼날에 의해 정제되어 정의되어지는 실체인데 이는 거북이와 같이, 그 속도와 성취에 도취되었던 인간의 오만을 걸러내고 인류의 정체성을 가감 없이 반추하는 거울과 같을 것입니다. 오늘날 포스트 휴먼을 향한 과학의 속도나 성취가 인류의 행복한 미래를 보장할지는 예측할 수 없고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반문명적이고 파괴적인 역사적 현상이 되풀이될지도 모를 불안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에 한·중·일 문화공동체는 혹시 인류가 또다시 직면하게 될지 모를 절망적 상황의 훌륭한 대안으로써 서구과학문명과 함께 바람직한 인류의 미래를 이끄는 혜안(慧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진익송 교수님의 발제를 잘 들었습니다. 다른 분들에게 발제에 대한 소감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오늘 진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문화의 다양성과 통일성이 권력 지향으로 가면 차이가 차별로 되는데 뉴욕의 문화적 풍토의 특징에서 차별화되지 않는 감수성이 있다는 점을 발견하셨다는 것이 상당히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문명이라는 것은 늘 물질 중심이어서 결국 차별화, 권력화 됐죠. 그런데 동아시아 문화 공동체는 문명과 다른 문화의 가치인데 문화의 가치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는 시민공동체와 달리 문화 공동체라고 할 때는 정서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시민공동체에서는 주체적 자각이 중요하다면 한·중·일 문화공동체를 지향한다고 할 때는 공통의 정서가 있어야 하고 우수문화 또는 고급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 사이의 베풂이 있어야 하고, 우호적인 정서가 공유될 때 그것이 한·중·일 문화 공동체로서 성장할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앞으로 물질문명과 구별되는 정신문화로서의 지향점을 찾기 위해서는 어떤 점이 필요할 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동의 청주교대 강사 “과거에는 문화가 철학, 예술, 문학 등의 방면에서 국한돼 거론됐지만 오늘에 와서는 문화가 사회, 정치, 종교까지 거론될 수 있는 다원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김태창 박사님께서 늘 주장하시는 활사개공-개인의 삶에서 공을 열어간다는 말씀과도 통하는, 나와 타자간의 균등한 상호 존중의 기반을 바탕으로 상생을 펼치는 것이 문화의 참된 목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청주라는 도시에서 이 토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청주의 문화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2015년 청주와 일본 니가타, 중국 칭다오 세 도시가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선정됐습니다. 이처럼 삼국의 문화 도시가 새롭게 형성되는데 일회성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구축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청주의 문명으로 대표적인 것이라면 직지를 들 수 있는데 이 직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임승빈 청주대 교수 “한·중·일 문화공동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과연 지금 한국이나 일본, 중국에 비교문화학이 성립돼 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문학 쪽에서는 비교문화는 성립돼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진 교수님께서는 미국 문화가 모든 문화를 수용하고 차별을 차이로 인식한다고 하셨는데 저는 차이를 강조하기보다 모든 것의 개성을 지워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한·중·일은 정신문화적으로는 같은 기반을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같은 정신을 기반으로 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함께 파트너로 향상돼 가는 어떤 운동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전부터 저는 충북의 본바탕이 되는 정신은 화해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충북은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의 주변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함께 하는 지방이고 영호남의 중심에 있으며 정치적 캐스팅보트로서 국가의 중심을 지켜왔기에 단순히 화(和)가 아니라 ‘창조적 화’의 개념으로,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면서 서로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죠. 그렇다면 동아시아 3국의 문화의 향상도 공동체적 개념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 창성화의의 정신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동아시아의 한·중·일 3국의 문화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려면 한국, 일본, 중국의 개성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두드러지게 해서 서로가 동반 성장하는 구조를 지향해야 할 것 입니다.”

 

▷김 주간 “저는 진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잘 음미해 볼 만한 재밌는 말씀을 하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 중국, 한국을 몇 십번씩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각각 그 나라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이 새삼 일깨워지는가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보통 때는 공동체 의식의 표면에까지 나타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거든요. 그저 자기 관심의 범위 내에서 자기 생활을 계속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각자의 공동체 의식-특히 국민공동체 또는 국가공동체-이 뚜렷하게 각성되는 것은 언제일까? 그것은 전쟁, 그리고 전쟁에 버금가는 대재난에 처할 때입니다. 한번 붙었다 하면 끝장을 내야 하는 전쟁문화를 놀이문화로 바꿀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중·일의 관계가 전쟁처럼 꼭 이겨야 하고 지면 죽는 거라는 강퍅한 생각에서 조금 여유로운 생각으로 바뀔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포괄적인 의미에서 ‘전쟁문화공동체에서 놀이문화공동체로 바뀌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라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여러 경기를 해도 한일전이면 죽고 살기로 해요. 지면 천지가 끝난 것처럼 의기소침하고 이기면 새 천지가 개벽한 것처럼 환희 작약하는 데서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전쟁문화공동체에서 놀이문화공동체로 바뀌면 무엇이 어떻게 변할까요? 저는 안보공동체나 경제공동체를 생각하는 이상으로, 아니 그것들보다 더 우선적으로 더 심층적으로 문화공동체와 교육공동체를 생각해 볼 필요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 교수님에게 질문이 있습니다. 진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포스트 휴먼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동아시아 문화공동체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진 교수 “저는 굳이 여기서 정의를 내리지 않고 화두만 던지려 했는데요. 많은 중국 사람들이 한국의 가요, 드라마 등을 좋아하잖아요. 문화는 이념이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서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시킵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자기 문화만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국제적 이슈에도 불구하고 한·중·일의 젊은 작가들은 공동 전시회를 열기도 합니다. 아주 무거운 주제도 뒤로 당겨서 보면 거리가 보이지 않습니까. ‘유엔미래보고서’를 읽어 보니 인간의 수명이 130년이 되고 육체의 반 이상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 인간도 DNA를 복제해 대량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정도 선에 이르면 그 때도 과연 우리가 사소한 지역성이나 역사적 앙금으로 다툴 것이냐 하는 의문이 듭니다. 더 큰 우리의 공동의 선을 목표를 갖고 지향해야 한다는 거죠. 더 크게 얘기하면 앞으로 30년 후에 외계인이 침입하면 우리 인류가 전쟁 앞에서 인류 공동체 의식이 일깨워지지 않겠습니까?”

 

▷임 교수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금 동아시아 문화 공동체를 생각해보는 경우에 먼저 다루어야 할 과제는 서양이 가진 인간성에 대한 개념과 동양 3국이 가진 인간성의 개념의 차이를 인식하고, 갈수록 기계화되어가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포스트 휴먼이라기보다는 리턴 휴먼을 되새겨 보는 것이 더 긴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김 주간 “진 교수님은 지금 현재 인간의 모습을 넘어서는 반인반기가 도래하는 때를 대비해 문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고, 임 교수님은 거꾸로 원래 인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깊이 성찰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씀하셨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임 교수 =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포스트 휴먼이라는 말에 위화감을 느끼는 데는 그것이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기계화, 자동화되고 그 속에서 인간마저 정신과 기계의 합성체처럼 되어가는 것이 걱정스러워서입니다. 저는 인간이란 신과 대비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데서만 올바른 인간 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기계와 대비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 ‘포스트 휴먼’이기 전에 ‘리턴 휴먼’을 먼저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김 주간 “근대화-더 솔직히 얘기하면 서구화-라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느 단계에 와보니 많은 문제가 있고 피해가 만만치 않아요. 근대화의 길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원점 회기를 감행해서 현대의 문제들의 연원을 철저하게 점검하고 앞으로 나가야하기 때문에 포스트 휴먼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프로토휴먼 쪽으로 우리의 인간성찰을 방향 잡는 것도 필요하지 않느냐는 문제를 임 교수가 제기하신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단군설화 가운데 아주 재밌는 것이 있어요. ‘원화위인(변화를 바라되 사람이 되는 것을 바란다)’이라는 것입니다. 천웅이 하늘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고 인간 세상에 가서 좋은 세상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요. 천웅은 환인에게 허락을 받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지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지상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인간 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쑥과 마늘을 먹던 중에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곰은 견뎌내 여인이 됐습니다. 천웅과 곰, 즉 천상의 신과 자연은 결합해 인간 세상을 개벽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여러 창조 신화를 봐도 인간이 신이 되기를 바랐지 신이 인간이 되기를 바랐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신이 인간이 돼서 인간과 더불어 인간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간다는 얘기는 우리 겨레 특유의 민간 설화입니다. 시대는 바야흐로 반인반기의 시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이라는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리고 인간관을 고정화시키려는 것은 다분히 서양적인 생각입니다. 인간이란 항상 고정화를 거부하는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되묻고 다시 물어야 하고 끝도 없이 계속해서 물어야 하는데 그 물음이 끝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종말입니다. 진 교수님과 임 교수님의 문제 제기는 양쪽 모두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생각하는데 아주 긴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앞으로 함께 청주에서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내실 있게 다듬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는 것이 좋을지 말씀해 주십시오.”

 

▷진 교수 “저의 생각을 요약해 말씀드리면 아시아 3국이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좀 더 상호 화합에 힘쓰는 가운데서 공동의 선을 화두로 해야 할 것입니다. 야구 경기를 예로 들면 이전에 없던 훌륭한 경기 내용을 만들기 위해서는 관중들이 한마음, 한 뜻이 돼야 하지 않습니까? 지역 간의 갈등이나 학연, 인맥, 개인적인 욕망들이 결부되기 시작하면 공통의 선이 깨지게 되겠지요. 지적 연대라는 것은 한·중·일 문화 공동체에서 어떤 형태가 있는지 발굴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김 주간 “저는 공동체(共同體)라는 말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왔습니다. 그 뜻하는 바가 억압적이기 때문입니다. 영어의 커뮤니티(community)의 본래 뜻에는 ‘모두 같아야 한다’는 심적 역학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하는 사이라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턴가 일본의 한자 번역어를 수입해서 공동체라고 하는데, 차이는 있되 차별은 하지 않고 다양한 것이 함께 어울리는 가운데 서로 통해서 공통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을 커뮤니티라고 합니다. 저는 공동태(共動態)라는 말을 대안으로 제시해 왔습니다. 각각 역사와 전통 그리고 입장과 주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함께 능력과 기회와 자원을 한껏 동원해서 더불어 공통의 선을 지향하는 몸과 마음과 얼의 동태적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임 교수 “동아시아의 공통선을 추구하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먼저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으로 옮길 문제는 먼저 삼국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함께 추구해 볼 수 있는 문화에 대해 비교하는 계기가 자주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동아시아의 공통선을 ‘화(和)’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종종 ‘동화(同和)’라는 뜻으로 왜곡돼 같지 않으면 화하지 못한다는 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이것을 지양하기 위해서 창조적 화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공동성(共同性)’이 아닌 ‘공통성(共通性)’에 친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청주가 지향하는 동아시아 문화도시 구상에도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신 강사 “저는 좀 더 문화개념을 구체화시켜서 어떤 문화가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이룩하는데 순기능적인가 라는 것을 생각할 때 고품질이면서 충분히 대중적인 예술이 한·중·일을 함께 엮어서 동아시아 공통의 선을 몸으로 감득케하는 기본조건의 형성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음악, 미술 등이 갖는 감화력을 키우는 것도 좋겠지요. 오늘 상당히 좋은 주제로 토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교수 “동아시아 문화공동체 구상은 파급 효과가 있지만 파산 효과도 있습니다. 자칫하면 파급 효과의 덫에 걸려 망가질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파산 효과를 막으려면 한·중·일의 역사 왜곡을 제대로 잡아야 합니다. 지금 중국은 고조선을 없애는 등 역사를 왜곡하고 일본은 독도를 자기 영토로 하기 위해 교과서 자체를 바꾸고 있습니다. 파산 효과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한·중·일이 역사 왜곡을 바로 잡고 진실로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분노와 상처는 더 가중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한·중·일의 심각한 문제는 환경문제입니다. 우리는 숨쉬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 한·중일·이 지속가능한 협정을 맺고 지역마다 운동을 전개해 공기를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국을 가든 중국을 가든 쾌적하다는 인식을 갖게 해야 합니다.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를 내실 있게 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환경공동체를 동시에 이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김 주간 “저는 진 교수가 제안한 문화공동체와 방금 김용환 교수가 제안한 환경공동체를 아우르는 입장에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문화를 놀이로 이해합니다. 아까 말씀하신 오염의 문제, 미세먼지 문제 등등 여러 문제가 많잖아요. 저는 새벽 세 시면 일어나 제 체력이 닿는 범위 내에서 청소를 합니다. 먼지가 안 나게 청소하기 위해 집게로 줍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과시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사람들이 왕래하기 전에 집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이것을 놀이로 하고 있습니다. 무슨 목적이나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기분도 좋고 상쾌해서 아침 밥맛도 좋고 결과적으로 건강에도 좋은 것 같아서 순수 자발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변화가 주위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집 앞에 봉투를 마련해 쓰레기를 모아서 거기에 담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입니다. 동아시아 문화공동체는 배후에 의도를 깔고 목적적으로 끌고 나가려 하면 잠시 요란한 구호와 행사가 성행하겠지만 조만간 식습니다. 좀 더 내실 있고 지속적인 것이 되려면 놀이의 마음으로 키우고 가꾸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저의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순수한 자발성에서 우러났을 때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감동을 주면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 적어도 자기 주변에서는 먼지가 나지 않게 한다는 생각을 하면 조금씩 좋아지는 겁니다. 오늘 진 교수님이 제안하신 말씀의 참뜻을 소중하게 생각해 놀이라는 것이 가진 긍정적인 특징을 우리 생활 속에 잘 융합시켰으면 합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칭찬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즐거워서 노는 것입니다. 아주 순수한 자발성에서 나올 때는 네거티브한 염원은 극소화할 수 있고 포지티브한 점은 알게 모르게 전파된다고 하는 것을 저는 5개월 정도 청주에서 일어난 조그만 변화를 통해 느꼈습니다. 될 수 있으면 간소화하고, 될 수 있으면 절약하고, 될 수 있으면 남들도 좋게 쓰도록 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하도록 하면 사람들이 거기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공자님이 그토록 염원하신 ‘리인위미(里仁爲美·인의 마음이 머무르는 곳이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곳이다)’가 될 것입니다. ‘리인위미’는 동아시아 3국의 훌륭하고 공감 가능한 문화 콘텐츠의 기본이 될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범위 내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동아시아 문화 의식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힘을 모아 동아시아 3국이 리인위미하는 방향으로 가는 문화진원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리인위미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하는 거지요. 그것이 저의 꿈이요 그 꿈이 빚어내는 설렘이요 두근거림입니다. 오늘 바쁘신 중에 시간 내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정리/조아라·사진/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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