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옥천서 10월 업적 재조명 위한 대규모 학술대회 열려

▲ 범재 김규흥 선생

(옥천=동양일보 임재업 기자) 충북 옥천 출신으로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1872∼1936) 선생의 업적이 광복 71주년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고종의 밀사 정도로만 알려졌지만 실상은 중국 내 항일 무장투쟁의 선봉이었던 사실이 속속 확인되면서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김규흥 선생은 1872년 6월 13일 충북 옥천에서 부유한 지역 유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와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면서 20살 무렵에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암울했던 조선의 시대적 상황을 걱정하며 청년기를 보낸다.

애국계몽운동을 이끌던 민영환(1861∼1905) 선생과 교류하며 교육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왕조가 망국의 위험에 내몰리게 되면서 이런 신념을 곧 실천에 옮겼다.

교육을 통한 자강운동에 힘 쏟은 그는 창명학교(지금의 옥천 죽향초등학교)를 세우는 데 앞장섰다.

그러던 그는 1908년 중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고종 황제의 특명을 받아 왕실 비자금으로 한인 무관 양성을 도모하려 했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기초가 되는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조선인으로는 최초이자 거의 유일할 정도로 중국 신해혁명에 가담해 도독부총잠의 겸 육군소장이라는 혁명정부의 요직에 올랐다.

그가 신해혁명에 적극 참여한 배경으로 조선 독립운동을 위한 중국 내 지지기반 마련이 꼽힌다.

김규흥 선생은 중국에서 확보한 기반을 바탕으로 조선 독립을 위한 다양한 외교·무장활동을 펼쳐나갔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임시정부 파견원 자격으로 참석,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무장투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1922년 흥화실업은행을 설립했다. 군자금을 모집해 무관학교를 세워 항일운동가들을 양성하던 선생은 1936년 중국 톈진에서 65세 나이로 생을 마쳤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규흥 선생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잠들어있다.

최근 선생의 중국 내 활동이 학계와 언론을 중심으로 새롭게 주목받으면서 옥천문화원과 김규흥 선생 기념사업회, 옥천군이 공동으로 선생의 삶을 재조명하는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오는 10월 15일 충북도립대 미래관에서 김규흥 선생의 업적을 분석하는 제1회 범재 김규흥 선생 학술대회가 열린다.

충북대 박걸순 교수, 충남대 김상기 교수, 배경한 신라대 교수, 독립기념관 김형목 연구원,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참석해 선생의 발자취를 조명한다.

옥천에서 김규흥 선생과 관련된 학술대회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옥천이 고향이었지만 사실상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던 김규흥 선생의 기념사업회 역시 최근 옥천으로 주소를 옮겼다.

김규흥 선생 증손자인 김상승(69) 기념사업회 이사는 "옥천과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벌이셨던 선생의 발자취를 고려하면 옥천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게 바르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김승룡 옥천문화원장은 "10월 학술대회를 계기로 옥천에서 김규흥 선생을 기리는 세미나와 포럼을 정기적으로 열고, 평전 발간과 중국의 활동 근거지인 연변지역 사학자들과의 교류도 활발히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옥천 임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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