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종 <수필가·동양포럼 운영위원장>

■유성종 <수필가·동양포럼 운영위원장>

1990년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에 유네스코(UNESCO)의 ‘여성 문해(文解)에 관한 세미나’ 한국대표로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즈공화국(Kirghiz Soviet Socialist Republic) 지금의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프룬제(Frunze)에 간 일이 있었다.

망하는 나라의 비참함이 어떠한 것이라는 사례를 모스크바의 호텔에서부터 곡진하게 겸함한 것은 계란 한 알, 우유 한 팩, 빵 한 조각을 사먹을 수가 없다는 데서였고, 프룬제로 가는 비행기의 기내식에 딸린 사과가 살구만한 크기에 딱딱하고 검은 흠투성이어서 또 한 번 놀랐다.

소련의 이런 암담한 현실을 딱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비행기 옆 좌석에 앉은 젊은 승객이 나에게 ‘일본사람이냐?’고 영어로 물었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이내 반가운 표정으로 자기는 프룬제에 사는 ‘고려족 4세’라고 혈통을 밝혔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용무를 마치면 자기 집에 오라고 하면서 오시면 ‘국시’를 대접하겠다고 말했다.

‘뭐, 국시!?’

순간 나는 눈물을 감추는 데 마음 썼다. 여기 와서 ‘국시’를 만나다니! 더구나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고려족 4세의 입에서 말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손님을 맞는 잔치음식이 ‘국수’이고 ‘국시’라는 사투리는 지금도 경상도에 살아있는 말이다. 아아, 고려족이 아직도 국수를 가지고 있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것은 겨레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기야 고려족의 대부분은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후예인 것이다.

그런데 프룬제 공항에서는 또 다른 이변을 만났다. 고려족 키르기즈 공화국 대표단장 일행 5명이 85세의 박 모 옹을 통역자로 정해 나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촉박한 일정을 아는 듯 회의를 마치고 여기를 떠나기 전에 꼭 자기들을 만나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공직자이다. 공무로 출장 나온 사람이라 아무나 만날 수 없고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더구나 그 나라는 소련의 한 공화국으로 북한과 통하고 그들의 눈길이 거기에도 와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이냐고 미심쩍게 물었다. 그들이 ‘우리는 모국어인 조선말을 젊은이에게 가르치고자 그 원조를 청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기에 닿은 것처럼 이내 수긍했다. ‘만나자’고 한마디를 남기고 그 자리를 떴지만 나의 가슴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국시’의 충격 몇 갑절로 살아있는 핏줄의 맥박과 겨레의 끈을 본 기쁨이었다.

국제회의를 마친 날 그들 대표단은 약속대로 찾아와서 나를 고려족의 유지 집으로 안내해 격식을 갖춰 식사를 차리고 ‘국시’를 내놓았다. 그 국수는 그들 북방민족들의 오랜 관습에 따라 치즈로 범벅이 된 것이라 담백한 음식밖에 못 먹는 나로서는 힘들었지만 국수임에 틀림없는 그것을 감동으로 삼켰다.

식사 후에 그들은 후손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고자 하는데 교본과 교사가 없으니, 교과서를 보내주고 선생을 파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글 타자기와 역사교육 자료도 보내 달라고 청했다.

그들의 청은 어느 하나도 거절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감동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을 보내는 일은 우리 정부(교육부)와 협의하겠고, 물자는 나의 권한 안에서 최대한 지원하겠다. 그리고 지금 박 옹이 한글을 가르치고 계시다니 노트와 연필, 그리고 종이와 분필을 사서 쓰게 내가 가지고 있는 현금(미국 달러)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 돈은 자기들의 화폐가치로서는 엄청나게 큰돈이라 받을 수 없다. 염치가 없다는 것과 법에 저촉된다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는 종이도, 노트도, 연필도, 분필도 전혀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린이 교육용 노트와 연필을 구할 수 없는 나라, 기막힌 현실 아닌가? 모스크바에서 소련 최고의 영재학교를 방문했을 때 종이가 없어서 손님에게 교육과정표 한 장 내놓지 못하고 교실에서는 찢어진 칠판에 분필 대신 수제비 뜬 석회로 판서하며 지우개가 없어서 물걸레를 짜서 칠판을 닦고 어린이의 교과서는 5~6년씩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음을 보아온 터라 그들의 말을 이내 사실로 믿었다. 그리고 나의 그 돈은 오히려 내가 간곡히 부탁해서 그들이 받게 했다.

나는 귀국하면서 해외동포의 모국어 교육문제를 숙고했다. 교육부와 문광부에 가서 내가 겪은 사례를 이실직고해 정책화하도록 촉구하고 타자기와 교과서와 노트와 연필과 종이, 그리고 역사교육 자료를 모아서 프룬제로 보냈다. 박 옹의 백씨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이듬해에는 박 옹 일행을 초청해 그 명예를 안고 여러 가지 역사자료를 모아서 돌아가게 했다. 그 지원은 내가 현직을 떠날 때까지 계속했고 교육부에 가서는 소련의 모든 고려족에게 서울시 학생을 움직여 ‘연필 한 자루 노트 한 권 보내기’를 하려고 했는데 국립교육평가원장으로 가게 되면서 그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들 키르기즈 고려족은 모국어를 배운 수준이 어느 정도일까? 소련의 여러 공화국에 있던 동포들의 모국어 열망이 얼마나 번졌을까?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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