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정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동양일보) <12> ‘ 동양포럼 ’을 위한 특별기고

‘동아시아의 공통 가치를 찾아서’라는 주제 아래 다양한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동양포럼은 이번 회에서 한국과 일본 지식인들이 보내온 특별기고문을 소개한다. 김태정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와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는 각각의 글을 통해 과거 부정적인 한·일 관계를 돌아보고 두 나라 간 역사인식을 둘러싼 마찰이 동아시아를 불안정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진단한 뒤 관계 개선을 위해 두 나라가 꾸준히 노력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편집자 주>

● 나와 일본

저는 가끔 내가 살아 온 개인사를 되돌아 볼 때가 있습니다. 이 나이가 되고 보면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들은 자서전을 남기기도 합니다.
제 평생은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대학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본정부 장학생으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대학에서 정년을 맞을 때까지 일본사, 한·일관계사, 일본문화 등을 강의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992년부터 일본인들과 함께 일본의 단시(短詩)인 하이쿠(排句)를 짓고, 격년으로 일본에서 국제 하이쿠 심포지움 패널리스트로서 활동해 왔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일본 여성과 결혼을 했고 외아들마저 일본 여성과 결혼해 일본의 대학에서 일본인 학생을 대상으로 일본의 중·고시대 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고 짓궂게 “당신은 친일이지”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얼마 전, 현대중국정치 전공인 친구가 “당신은 친일파지”라면서 자기도 사실은 친일파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일본에 가서 일본 도시락을 먹으면서 일본 씨름인 ‘스모’를 보는 것이 꿈이라고도 했습니다. 사석이고 친구지간이니까 스스럼없이 ‘친일’ 운운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친일’이라는 말은 쉽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친일파’라는 말은 원래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을 청산하기 위해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면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법은 1년 가까이 시행되다가 마침내 흐지부지 되고 말았으나 그 후에도 친일문학론, ‘친일인명사전’ 출간 등을 계기로 친일논쟁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친일’은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협조하면서 국권을 상실케 하거나 일제를 등에 업고 동족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한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친미나 친중과는 전혀 뜻을 달리 합니다. 
친구가 한 말은 일본의 ‘스모’ 등 문화를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후 상당 기간 일본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겠지만, 반일분위기가 강한 상황에서 부분적으로라도 일본에 대한 호감 표현을 하기가 어려던 거지요. 지금은 나이 먹은 사람 중에 ‘스모’나 온천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젊은 사람 중에는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등 대중문화에 열광하기도 합니다. 적어도 일본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자기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정도가 된 것만 해도 상당한 진전입니다. 제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70년대는 물론, 80년대까지만 해도 반일 감정은 강했습니다. 제가 재직했던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는 매년 교내에서 모든 학과가 참여하는 모의 올림픽이라는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여기에 각 학과는 자기 전공별로 국기를 들고 참여했지만 일본어과만은 일장기를 들고 입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1962년은 한·일 국교도 맺어지기 전이라서 반일감정은 더욱 거셌습니다. 당시 외국어대학은 외국어 전공학과만 있어서 교내에서는 자기 전공 언어로만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또 외대로 오는 버스는 거의 외대생들이 이용했기 때문에 외대에서 시내에 들어갈 때까지는 각자 자기 전공언어로 같은 과 친구와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경우에도 일본어 전공자만은 학내에서건, 버스 안에서건 일본어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반일감정은 그 뿌리가 너무나 깊습니다. 비단 지난 36년간의 식민지지배에 대한 나쁜 기억 때문만은 아닙니다. 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왜구로 인한 피해에까지 미칩니다. 이와 같은 반일 감정은 일본에 대한 호칭에서 잘 나타납니다. 왜(倭)라고 하는 호칭입니다. 일제시대를 왜정시대라 하고, 일본인을 왜놈이라 했습니다. 물론 이는 공식 명칭이 아니고 일반 대중이 썼던 용어입니다. 일반 생활 용어에서도 왜간장, 왜오이, 왜낫 등 다양했습니다. 또한 일본의 문화, 특히 영화, 음악, 만화 등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이를 왜색문화라 하여 오랫동안 이를 배척했습니다. 
일본이라는 공식 국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을 왜라고 칭했던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일제의 식민지지배, 더 소급해서는 임진왜란, 왜구에 대한 반일감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라는 칭호는 조선시대 일본을 왕래했던 조선통신사들도 사용했습니다. 1719년의 통신사 일행에 제술관으로 수행했던 신유한은 그의 일본기행문 ‘해유록(海游錄)’에서 일본을 왜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1764년 11회 통신사에 수행했던 김인겸도 그의 기행문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에서 일본을 왜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일본을 일본이라고 하지 않고 왜라고 칭하는 의식 속에는 반일감정과 함께 강한 문화우월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태도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에 대한 인식, 태도, 자세, 입장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이 있습니다. 방일(防日), 항일(抗日), 반일, 친일 등이 그것입니다.
방일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정부 수립 후 국민 통합을 위해 반공과 함께 내세웠던 정치 슬로건이었습니다.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다시 침략해 온다면 이를 단호하게 막겠다는 뜻입니다. 그 이후 방일이라는 말 자체는 별로 쓰이지 않지만 ‘일본 제국주의 부활론’이나 ‘군국주의 부활론’의 형태로, 또는 일본의 경제 침략이나 문화침략에 대한 경계의식으로 작용했습니다. 
항일은 ‘항일독립운동’, ‘항일투쟁’처럼 단순한 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일제의 식민지지배에 항거해서 독립운동이나 투쟁을 하는 하나의 실천이고 애국행동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일제 식민지지배에 적극 협력하여 동족을 배반한 소위 ‘친일’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반일은 글자 그대로 일본에 반대하는 것으로, 앞에서 말한 방일과 항일이 모두 이에 포함됩니다. 다만 반일은 ‘반일감정’처럼 일본에 대한 비우호적인 정서나 심리를 말합니다. 양자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반일감정이 바탕이 되어 방일과 항일이라는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친일은 글자의 뜻으로는 반일의 반대어입니다. 그러나 반일이 일본에 비우호적인 정서나 심리를 폭넓게 의미하는 것과는 달리 그 의미를 나름대로 한정짓고 있습니다. 친일은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면서 그 개념과 범위가 정해졌습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하여 민족에게 해를 끼친 반민족행위가 친일입니다. 이 법은 1년간 시행되다가 그 이후 남북 대립이 심화되고, 6.25 전쟁이 발발하는 등의 정세변화로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법에 의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사람은 10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민간 차원의 친일 논쟁은 계속되었고, 2005년 5월에는 대통령 소속기관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기도 했습니다. 문학평론가 임종국씨에 의해 ‘친일문학론’이 출간된 것이 1966년입니다. 이 책은 1940년대를 전후한 일제말기 10년 간의 우리 문학계가 주체성을 상실하고 일제를 예찬, 추종하는 문학 활동을 한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이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3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일제식민지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4389명의 친일행각과 광복 이후의 행적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1994년부터 진행해 온 것이었습니다. 
이 인명사전에는 4389명이라는 방대한 인원이 친일인사로 수록되어 있는데다가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장면 전 국무총리, 김성수 전 부통령, 무용가 최승희, 음악가 안익태·홍난파, 시인 서정주·모윤숙, 소설가 이광수·김동인, 극작가 유치진, 문학평론가 백철, 언론인 장지연 등이 포함돼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교과서를 통해 배우고 작품을 읽으면서 존경하고 좋아했던 문학가들이 모두 친일작가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정부 레벨에서는 2005년 5월 31일 대통령 소속기관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2004년 3월 22일에 공포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 위원회는 일제 강점기를 3기로 나누어 친일반민족행위 대상자를 조사 발표했습니다. 
1기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1919년 3·1운동까지로 잡았는데, 이 기간 중 친일반민족행위자로는 이완용을 필두로 한 106명이었습니다.(2006년 12월 6일 명단 공개) 2기는 3·1운동에서부터 1937년 중일전쟁까지로 민영휘와 송병준 등 195명이 포함되었습니다. (2007년 12월 6일 명단 공개) 3기는 중일전쟁에서 1945년 해방까지인데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명단이 공개된 사람은 704명이었습니다.(2009년 11월 27일 명단 공개) 
3기에서는 논란이 됐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지연 ‘황성신문’ 주필, 음악가 홍난파와 안익태 등은 포함되지 않고,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주,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주,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 시인 최남선·노천명·주요한, 소설가 김동인·이광수, 화가 김기창, 작곡가 현제명 등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사는 모두 1005명으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389명 보다는 훨씬 적었습니다. 일제에 협력한 친일인사의 숫자는 친일의 기준과 입증의 구체성, 정확성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된 시기와 정부 레벨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에 협력한 친일인사를 최종 발표한 시기가 거의 비슷합니다. 다 같이 노무현 정권 때의 일입니다.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위원회 발표 숫자가 민족문제연구소 발표의 숫자 보다 적어진 것에 대해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지도층 인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공허하고 절망감이 들기 때문입니다. 
● 한·일 양국의 벽
지난해(2015년)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원과 일본의 언론NPO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일 양국의 관계발전에 최대의 장애요인은 독도영유권 문제이고, 그 다음이 종군위안부 문제입니다. 
독도(일본에서는 竹島)영유권 문제를 일본인은 62.0%, 한국인은 88.3%가 양국관계 발전의 장애요인으로 뽑았습니다. 두 번째 장애요인인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인 58.0%, 한국인 63.5%가 이를 선택했습니다. (복수회답) 이에 이어서 양국의 관계 발전에 장애요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서, 일본인은 ‘한국국민의 반일감정(33.0%)’, ‘한국의 역사인식과 역사교육(32.5%)’을 지적했고, 한국인은 ‘일본의 역사인식과 역사교육(42.1%)’을 들었습니다. 
독도 영유권 문제는 1905년 일본이 일방적으로 독도를 시마네(島根)현 소속으로 편입시키는 행정고시를 발표함으로써 생겼습니다. 독도는 1900년 일본보다 대한제국이 먼저 칙령 41호의 반포로 한국 땅임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또한 1905년은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과 한국 사이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해로,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독도 영유권 문제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교섭과정에서도 늘 일본이 제기한 외교현안이었으나 해결하지 못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독도는 한국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에서 영유권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본도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 독도(일본에서는 竹島)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입장으로, 현재의 독도에 대한 한국의 실효적 지배에 대해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2005년 고이즈미(小泉) 내각 때 2월 22일을 ‘다케시마(竹島)날’로 제정함으로써 독도 영유권 문제를 다시 한 번 부각시켰습니다. 2005년은 일본제국이 독도를 일본의 시마네(島根)현 소속으로 편입시키는 조치를 취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후 2006년 제 1차 아베정부는 영토주권의 교육을 강화했고 그 다음 정권인 민주당 정부 하에서도 사회과 교과서 등에 독도(일본에서는 竹島)가 일본 고유 영토라고 기술하도록 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기술 내용은 일본의 ‘외교청서’나 ‘국방백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한·일 간에 독도문제를 결정적으로 부각시킨 것은 2012년 8월 11일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전격적인 독도 방문이었습니다. 일본 언론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케시마(竹島)에 상륙했다고 보도했고, 일본 정부는 이에 항의하여 주한대사를 일시 소환하고,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한국 정부에 요구해 왔습니다. 국제사법재판소에의 제소는 양국이 합의 했을 때에만 가능하므로 현재 실효지배하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이에 응할 필요는 없지만, 독도가 명백한 한국영토임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의 축적과 논리 개발에 부단히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일본의 도발에 말려들지 않도록 하고 이쪽에서도 불필요하게 일본을 자극하는 일은 자제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 동안 종군위안부 문제는 종군위안부 운용에 일본군이 간여했는지의 여부와 종군위안부 모집과정에 강제연행이 있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1993년 8월 일본 미야자와(宮    ) 내각의 관방(官房)장관 담화인 ‘고노(河野)담화’를 통해서 구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간여하고 강제성이 있었음을 전제로 사죄하고, 그 피해보상으로 ‘아시아여성을 위한 기금’을 만드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 했습니다. 
종군위안부 문제가 다시 쟁점화된 것은 2012년 12월 아베 총리가 취임하면서부터입니다. 아베 정부가 출범과 더불어 고노(河野)담화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왔기 때문인데, 그 배경에는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종군위안부 보도 일부 취소 사실이 있습니다. 일본 국내의 일부 우익단체와 국회의원들은 이 사실을 근거로 구 일본군의 책임을 입증할 공문서가 없고 피해자의 증언이 애매하고 부정확하다고 주장하면서 고노(河野)담화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한·일관계는 2012년 8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의 갑작스런 독도 방문과 천황사과요구발언으로 급냉각 상태에 빠졌고 이 같은 상태는 그 이후 아베 내각의 출범과 박근혜 정부의 출범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해 연말(2015년 12월 28일)에 한·일양국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협상 타결하여 최종적 종결을 약속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아베 총리는 고노(河野)담화와 동일한 내용으로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반성을 표한다고 서면으로 밝혔습니다. 한·일 양국은 이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에 의해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모든 전(前) 위안부 분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이 재단은 일본 정부 예산에 의해 설립되고 한국 정부에 의해 운영된다는 의미에서 1995년 무라야마(村山)총리 때 민간기구로 발족한 아시아여성기금(정식명칭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기금’) 보다는 크게 진전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1996년 8월 14일 피해자의 저항이 가장 적고, 피해자의 경제상황이 가장 나쁜 필리핀 피해자 4명에게 200만엔의 보상금이 지급되었고, 우리나라 피해자 5명에게도 같은 금액이 지급되었습니다. 이 재단은 일반 일본국민들로부터 모금해서 만든 것으로, 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배상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편법이라는 한국 측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강한 반발을 사, 위로금 지급이 사실상 중단되고, 2007년 3월 해체되었습니다. 
한·일양국 발전의 저해요인으로 세 번째에 해당하는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의 문제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작년(2015년) 아사히(朝日)신문사와 동아일보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일 양국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인은 과반수에 가까운 49%가 이미 해결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는 42% 보다 많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인의 경우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95%로 지배적입니다. 한국병합과 식민지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죄에 대해서도 일본국민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5%가 충분히 했다고 보아, 아직 불충분하다는 20%를 훨씬 앞서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인은 96%가 불충분하다고 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일양국의 과거사에 대한 역사인식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피해를 입은 측의 역사인식과 가해자의 역사인식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가해자인 일본인들은 지난 과거사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겠지만 오랜 한·일 간의 역사를 통해 피해를 받아온 한국인 입장에서는 쉽게 지난날의 역사를 청산하고 일본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 한·일 양국의 미래를 향해
한·일 양국이 언제까지나 현재와 같은 비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해(2015년) 요미우리 신문사와 한국일보사가 공동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에 친근감을 느낀다고 답한 일본인은 32%이고, 일본에 친근감을 느낀다고 답한 한국인은 20%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반해 상대국에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국민은 일본인이 64%, 한국인이 78%나 됩니다. 
한·일양국의 이 같은 심리적 거리감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양국이 과거사에 대한 어두운 기억과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5년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원과 일본의 언론NPO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일 양 국민이 상대방 국가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갖고 있는 이유에 대해 일본국민은 74.6%가 ‘역사문제로 한국인이 일본을 계속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국민의 76.8%는 ‘한국을 침략한 역사에 대해 일본이 제대로 반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렇게 한·일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고 상호불신과 불만이 쌓여 있어도 양 국민은 이런 현상이 지속되기를 바라지는 않고 있습니다.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원과 일본의 언론NPO가 공동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본인 64%, 한국인 87%가 양국관계의 호전을 바라고 있습니다. 또 아사히(朝日)신문사와 동아일보사의 2015년 조사에 의하면, 일본인은 65.3%가, 한국인은 87.4%가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한·일관계가 과거사 문제로 현재는 악화되어 있으나, 한·일관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개선되기를 원하는 국민이 일본인은 국민 전체의 3분의 2가, 한국인은 9할 가까이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일 양국은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지난해 연말(2015년 12월 28일) 어렵게 성사된 구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을 계기로 미래를 향해 우호관계를 증진시켜 가야 합니다. 한·일 양국은 양국이 간신히 쌓아 올린 1993년의 고노(河野)담화와 1995년 식민지지배와 침략을 인정하고 사과한 무라야마(村山)담화의 정신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조선시대인 1443년 세종 25년 서장관으로 통신사 일행에 참여하고 돌아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쓴 신숙주는 1475년 죽기 전, 성종왕에게 일본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 것과 일본과의 화평을 해치지 말 것을 주청했다고 합니다. 이 시점에서 일본에 대한 경계는 필요하지만 결코 양국의 화평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신숙주의 말을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이 글에서 쓰인 여론조사 수치는 成蹊大奧學野昌宏명예교수의 논문 ‘日韓民の相互意識とメディア’에 의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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