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시인)

▲ 나기황(시인)

‘새로운 세상(A New World)'을 슬로건으로 열렸던 브라질 ‘리우올림픽’이 지난 22일, 17일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무더위 속에서도 시원한 메달소식과 지구촌 스타들이 전해주는 감동스토리가 있었기에 극심한 열대야를 견딜 수 있었다.
아직도 승리의 환호성이 귓가에 맴도는 듯 하고 몇몇 경기의 장면은 봄날 아지랑이처럼 잔상(殘像)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리며 심판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감독의 ‘챌린지 요청(challenge request)’장면이다.
비디오판독을 하는 동안, 공중에 매달린 전광판의 화면을 초조하게 지켜보는 선수들의 간절한 눈빛이 클로즈업 되고, 거친 호흡과 흐르는 땀방울과 격정의 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리플레이 되는 영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요, 극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활어처럼 튀어 올라 스파이크를 하는 공격수의 표정과 블로킹하는 선수의 손가락 끝을 배구공이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터치아웃’의 느린 화면은 별책부록 같은 색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배드민턴 셔틀콕의 둥근 머리 부분이 라인과 맞물리면서 튀어 오르는 인-아웃(IN-OUT)판정의 순간, 일시에 터져 나오는 탄식과 환호성이 만들어 내는 ‘롤백 사운드믹싱(roll-back sound mixing)’은 스포츠에서만 맛 볼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돌려차기로 헤드기어를 가격하는 태권도의 장면도, 상대의 가슴을 찌를 때 휘어지는 펜싱 칼의 짜릿한 득점의 순간도, 홈 플레이트를 밟으려 쇄도하는 주자의 발끝과 긴 송구를 받아 터치하려는 포수와의 숨 막히는 조우(遭遇)도 ‘비디오판독’이 보여주는 행위예술이다.
생애 첫 비행을 시작하는 나비의 몽환적인 날개 짓 같은 탁구공의 궤적은 그야말로 ‘비디오아트(video-art)'를 보는 듯 환상적이다. 

허나 여기 까지다. ‘챌린지요청’은 당연히 심판의 오심을 막고 판정시비를 줄이고자 도입된 제도다. 스포츠에서 성역(聖域)으로 인식되던 심판의 영역이 비디오기술에 눌려 조금씩 영토를 빼앗기고 있는 모양새다.
방법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펜싱선수가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리든, 태권도코치가 심판에게 카드를 건네든, 레슬링에서 인형을 코트에 던지든, ‘챌린지요청’으로 인해 벌어지는 애환의 파노라마를 이제는 좀 더 심도 있게 받아들여야 할 때다.
비디오판독의 역사가 그리 짧은 것도 아니다. 1986년 미 프로풋볼(NFL)에서 처음 도입하였으니 30년 역사다. ‘챌린지(challenge)’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의미, 즉, ‘도전하다’와 ‘설명을 요구하다’가 녹아 들 충분한 세월이다. 
“오심(誤審)도 경기의 일부다.”라는 낭만적 수사(修辭)만으로 버티기엔 대세가 기울었다.
한 자료에 의하면 비디오판독을 신청한 전체 181건 중에서 오심으로 밝혀져 판정이 번복된 경우가 48.4%(88건)나 됐다고 한다.
‘비디오판독’제도가 심판의 권위를 손상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설득력이 없다.
오심 없는 판정이야말로 앞만 보며 달려 온 선수들에게 그들이 흘린 땀의 무게와 그들이 가꿔 온 꿈의 부피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이며 배려다.
비디오판독만이 최선일까. 그렇지는 않다.
의도적으로 경기의 맥을 끊는다든지 비디오판독에만 의존하려는 맹신적 자세도 문제고 ‘판독의 오류’같은 치명적인 문제점도 남아있다.
총론엔 찬성하지만 각론에 들어가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네모’가 상징하는 ‘챌린지요청’이 오심을 단죄하는 수술대가 될 것인가, 아름다운 승부를 담보하는 멋진 ‘비디오아트’가 될 것인가는 좀 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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