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쿄시(일본 미래공창신문 사장)

▲ 야마모토 쿄시(일본 미래공창신문 사장)

서양근대는 과학의 힘으로 ‘세계문명’의 지평을 열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서 단번에 고착된 실상을 드러냈다. 2001년 9월 11일의 뉴욕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테러공격’과, 이라크의 ‘대량파괴무기보유’를 구실로 한 부시의 전쟁을 기점으로 서양적 글로벌질서는 균열과 자괴(自壞)의 회로에 들어섰다.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은 서양적 글로벌질서의 충복(忠僕)으로 미국에 기특하게 봉사해 왔지만, 군산복합체의 자기 파산 기운과 AIIB(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의 시작은 미국주도의 세계화에 적신호를 깜빡이고 있고, 충복 일본은 마치 방향타를 잃은 배처럼 표류하고 있다. 서양은 과학적 진보를 무기로 인류의 생활향상에 커다란 성과를 가져왔지만, 정치와 경제의 혼미는 시시각각 심각함을 더하고 있다. 이제는 동양적 예지가 나설 차례이다.  
서양에는 과거의 기세는 더 이상 없다. 기세 좋게 치고 올라오는 것은 동양이다. 메이지유신 이래의 서양근대의 모방자인 일본은 나날이 그림자가 희미해지고 있고, 정치가와 지식인의 사상철학은 제로에 가깝다. 21세기를 리드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21세기에 세계의 나침반이 되는 사상철학을 공창(共創)하는 그룹이다. 나침반이 되는 철학은 과학기술과 폭력의 결탁에 의한 패자의 철학이 아니다. 반도리(反道理)에 뒤범벅이 된 ‘세계문명’은 조만간 자가당착에 빠져 파탄할 것이다.
핵무기를 만들어 자신의 안태(安泰)를 도모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낡았다. 동아시아는 장차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시대에 들어갈 것이다. 살육문명에서 생명소생문명으로의 대전환이 지금 시작되었다. 이 조류는 동아시아의 그 어떤 나라도 어떤 민족도 멈추게 할 수 없다.
‘동양적 생명관의 재조명’을 테마로 한 1회 동양포럼이 청주에 본거지를 둔 동양일보(조철호 회장)에 의해 지난 5월 3일에 개최되었다. 권일찬 전 충북대 교수는 ‘주역’의 입장에서 동양적 생명관을 발표하였고, 김연숙 충북대 교수는 자신의 딸인 21살의 신진화가 김선우씨의 작품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한국적 생명관을 소개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에 그려진 출산이 가까워진 여성. 김연숙 교수가 지적 활동으로 추구해 온 포스트모던철학의 정수가 모녀의 혼의 묘합에 의해 천명되었다. 출산이 임박한 생명체는 상극·상생·상화(相和)·개신(開新)으로 이어지는 근원적 생명력의 화신이다. 한편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마더 테레사의 분노의 눈빛은 소리 없는 연약한 생명의 존엄을 무시하는 인류의 죄를 고발하고 있었다.
생명력 넘치는 세계는 단순히 살육이 없는 평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생명과 생명이 공명하는 환희가 없으면 안 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이것만큼 어려운 물음은 없다. 육체를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 생명체는 반드시 종언을 맞이한다. 그럼 육체적 생명의 종언은 나의 무화(無化)일까? 불교는 과거세·현재세·미래세의 삼세관 위에 서 있다. 삼세의 인과응보는 부정할 수 없다. 인과응보[因果異時]는 생명의 영원성을 말하지만, 동시에 ‘영원’은 순간적 생명에 깃든다. 이것을 인과구시(因果俱時)라고 한다. 우리는 불가역적인 현세의 삶에서 탐진치의 미혹에 빠져있는 범부의 삶으로부터 각성하여, 상락아정(常樂我?)의 본원적 환희의 삶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동양적 생명관에 서양적 생명관을 능가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삼세의 인과의 업고(業苦)에서 인류를 해방시키는 철학이지, 신앙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동양의 생명관을 재조명하는, 한국과 일본의 민중에 의한 첫 시도가 1회 동양포럼이었다. ‘동양일보’라고 하는 일반 신문이 이것을 기획했다는 사실에 나는 한인(韓人)의 걸출한 철학적 공진성(共振性)과 연대적 능동성을 발견했다. 시인이기도 한 조철호 회장의 결단과 인간애는 한국 미디어계의 쾌거이다. 25년 전에 동양세계의 개신(開新)을 꿈꾸며 ‘동양일보’를 창간하고, 충청북도의 생활자에게 일관적으로 지식의 빛을 비춰 오신 조철호 회장의 숭고한 뜻과 끈질긴 싸움에 공감한다.
희망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 희망은 곧 미래이다. 미래공창(未來共創)이란 희망의 공동창발(共?創發)이다. 종래의 설계사고는 미래를 계획적으로 독창할 수 있다고, 오만하게도 생각해 왔다. ‘미래’는 자의적으로 탐욕적인 인간의 독창적 설계도로 수렴될 수 없다. ‘미래’를 폐쇄인간의 명예욕이나 공리주의를 가장한 위선의 옷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미래공창신문’은 역사는 짧고 실적도 없다. 그러나 동양적 생명의 21세기를 공창하는 벗으로 삼아준다면, 우리는 단호하게 ‘동양일보’와 공동궐기의 깃발을 올릴 것이다. 한중일 동아시아의 해원(解寃)과 상해(相解)와 상생·개신은 ‘미래공창신문’의 첫 번째 간절한 바람이다. 우리는 동양적 생명의 봉화를 들고 ‘동양일보’ 동인과 함께 미래공창으로 일보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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