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희 소설가

내 어릴 적 고향집 뒤란에는 밤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마당 앞 울타리 옆에는 대추나무 두 그루가 있었고 대추나무 옆 양지 바른 둔덕에는 복숭아, 자두, 호두, 감, 배나무 등 숱한 과일나무가 있었다.

말하자면 과목의 군락대였다. 그래서 집 근처에는 한겨울 삼동을 빼고는 언제나 과꽃의 방향과 과일의 과향으로 진동했다.

봄이면 복사꽃, 살구꽃이 무더기무더기 흐드러져 눈이 부셨고 여름이면 다람쥐꼬리 같은 밤꽃이 싸아한 방향으로 코를 찔렀다.

가을이면 마당가의 대추나무에 오복조복 가지가 휘게 달린 대추가 진홍빛으로 영글었고 밤이 길어 우우 바람이라도 불면 뒤란의 밤나무에선 의좋게 들어앉은 알밤이 투욱 툭 떨어지는 소리가 꿈결인 양 들렸다.

어디 또 이뿐인가?

달이라도 휘영청 밝아 보라지. 밤나무 그림자는 문살에 일렁이고 알밤은 양철 지붕 위에 간단없이 떨어졌다. 이때 내 만일 글재주 있어 시라도 지을 줄 알았다면 ‘양철 지붕에, 밤 떨어지는 소리 밤이 새도록…….’ 하는 5, 7, 5, 17음의 단시 배구(排句=하이꾸)라도 지었으련만…. 그러나 그때는 영도 철도 모르던 어린 시절이었다.

겨울이 돼 일손 한가할 때면 어머니는 앞마당의 대추와 뒤란의 밤을 넣어 대추 찰떡을 해 주셨고 그러면 나는 그것을 두고두고 질화로 잉걸불에 석쇠를 올려놓고 냠냠 구워먹었다.

이런 날 밤이면 대개 소록소록 눈이 내렸고 그러면 또 개 짖는 소리와 다듬이질 소리가 영락없이 들려왔다. 그러다 밤이 더 이슥해지면 눈은 멎고 바람이 우우 불며 바르르 바르르 문풍지 소리가 들려 왔다.

밤은 하염없이 깊어가고, 개는 멍멍 짖어대고, 다듬이 소리는 또드락또드락 전설처럼 들려오고, 문풍지 소리는 정한을 토하듯 안타까이 울어대고…….

이런 날 밤이면 나는 잠을 못 이룬 채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서린 한 맺힌 설움을 토해내는 문풍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호소하듯 애원하듯 울어대는 문풍지 소리가 애달파서였다. 그러다 어느 날은 문풍지 소리가 자장가 되어 새록 새록 잠을 재워주곤 했다. 이렇게 잠이 든 밤이면 대개는 또 꿈을 꾸었다.

천야만야한 낭떠러지에서 뚝 떨어지는 꿈, 천사처럼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를 단 채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꿈, 거대한 무슨 괴물이나 그슨대(캄캄한 밤에 갑자기 나타나 쳐다보면 쳐다볼수록 한없이 커지는 귀신)에 쫓겨 죽어라고 달아나는 꿈. 이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꿈은 괴물이나 그슨대에게 쫓겨 달아나는 꿈이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달아나도 발은 한사코 땅에서 떨어지지 않고 제자리에 있었으니까. 뒤에는 괴물과 그슨대가 따라오지, 발은 땅에서 안 떨어지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초미지급이었다. 그래 사생결단 기를 쓰다 “으악!”하는 비명과 함께 눈을 뜨면 아아. 옷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것은 내 어릴 적, 그러니까 밥상머리에서 밥투정할 때의 여남은 살 적 이야기다. 한데도 나는 나이답지 않게 사물에 대한 직관이 빠른 편이어서 꽤는 조숙해 있었다. 그래서 일까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슬펐고 낙엽 지는 소리에 가슴이 서늘했다. 하늘이 높아지면 까닭 없이 서글퍼 어디론가 가고 싶었고 눈이 펑펑 내리면 산매들린 사람처럼 작정 없이 쏘다녔다. 그러니 어찌 문풍지 소리에 잊으랴. 이는 지금 생각해도 참 잔망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를 결코 잘못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잘못 됐다니. 오히려 어떤 향수마저 불러 일으켜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리워지는 것이다. 집 떠난 이의 향수처럼. 고향 떠난 이의 회향처럼…….

그러고 보니 아아, 문풍지 소리를 못들은 지도 어언 50여년. 뽕나무 밭이 변해 바다가 된 지도 다섯 차례.

이래도 되는 건가? 이대로 괜찮은가?

만들어 보리라. 만들어 보리라. 그래서 바르르 바르르 울어대는 정한의 문풍지 소리를 들어보리라.

이렇게 생각한 나는 어느 바람 부는 겨울날, 마침내 문풍지를 달아 붙이기에 이르렀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풀을 쑤어 놓고 지물포에 가서 문종이를 사다가 가위로 오려 문 가장자리에다 공들여 붙였다.

그런데 웬일일까. 근사하게 달아 붙인 문풍지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무엇 때문 일까. 나는 몸이 달고 애가 타서 입으로 불고 부채로 부쳤지만 소용없었다. 겹겹이 처닫아둔 문틀 때문일까? 아니면 아무 데서나 함부로 울 수 없는 지조 때문일까. 문풍지 소리는 끝내 나질 않았다.

아! 문풍지 소리! 잊을 수 없는 그 소리!

언제 다시 문풍지 소리를 들어볼거나?

바르르 바르르 정한을 토하던 그 문풍지 소리!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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