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자 <수필가>

▲ 김애자<수필가>

유년의 기억들은 대체적으로 단편적이다. 하지만 뇌에 충격을 심하게 받았던 나쁜 기억들은 원형 그대로 저장돼 있다. 나는 이를 두고 ‘폭력성 기억’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나타나면 좋은 생각과 좋은 기억들은 일순에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곱 살 적에 오빠 등에 업혀 면사무소 유리창으로 넘겨다본 장면들은 어제의 일처럼 또렷하다. 강제로 목을 뒤로 젖히고 고춧가루 물을 주전자에 담아 코에 들이붓던 거며,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던 장면과 단말마의 비명소리들은 66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어도 온전한 상태로 기억의 파일에 저장돼 있다.

1950년에 일어난 6.25 전란은 이렇게 일곱 살 아이에게 뼈에 사무치는 상처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의문을 남겼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집에 불을 지르고 죄 없는 사람들을 끌어다 인민재판에 넘긴 이들도, 판결을 내리고 몽둥이를 휘두르던 이들도 정작 인민군은 아니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그토록 과잉충성을 바쳤던 걸까. 친척들조차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삼고 서로를 감시하는 불온한 눈빛은 차가운 가늠쇠였다.

바느질삯으로 생계를 꾸려가시던 어머니가 인민재판에 넘겨졌다. 죄목은 여성동맹에 가입하지 않아서라고 했다. 저녁밥을 짓다가 청년들 손에 끌려간 어머니를 찾아 열네 살 소년은 동생을 업고 인민재판이 열리는 면사무소로 찾아갔다. 어둠속에서 몰래 창문으로 넘겨다 본 장면은 아이들이 보아선 안 되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아이는 울음도 못 터트리고 오라비등에 납작 엎드렸다.

어머니는 그 살육의 현장에서 어린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 여성동맹에 가입 동의서를 손수 써 제출하고 풀려났다고 했다. 한 밤중에 풀려나온 어머니는 미숫가루와 이불 보따리를 싸서 아들 등에 지우고 손에는 괭이와 삽을 들렸다. 당신은 간장과 솥단지를 머리에 이고 날이 밝기 전에 마을에서 십리 쯤 떨어진 산 속으로 들어갔다.

산으로 들어간 우린 사흘 동안 땅굴을 팠다. 그리곤 낮엔 굴 안에서 지내다가 어둠살이 내리면 밖으로 나와 찐 감자와 미숫가루로 끼니를 대신 했다. 그래도 잠깐씩 간주곡처럼 어린 남매에게 천진한 웃음을 안겨주는 일들도 있었다. 동작이 날랜 오빠는 가끔씩 어둠을 틈타 집으로 내려가선 엄마가 가꾸어 놓은 옥수수와 애호박을 따왔고, 된장과 고추장도 퍼왔다. 그런 날이면 우리는 굴 안에서 작은 축제를 열었다. 어머니가 접시에 들기름을 부어 만든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에 기대어 모처럼 만의 별식을 즐겼고, 아침이면 희뿌연 안개를 털며 일어서는 풀들과 풀잎에 맺힌 하얀 이슬에 입 맞추던 햇살의 눈부심에 설레었다. 또 잠들기 전 엄마 손을 잡고 풀숲에 앉아 소변을 보면서 듣던 밤새 울음소리와 하늘 가득히 떠 있던 별 떨기들은 지금도 내 문학의 뜰을 밝히는 시원의 불빛이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을 거두고서야 우리 세 식구는 25일간의 산 속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66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아직도 내 기억 안에선 겁에 질린 아이가 울고 서 있다.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사드배치를 놓고 두 패로 갈라져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다.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 사람만이 희망이라는데.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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