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준식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장

충북 제천시 덕산면의 월악산 남록에 신륵사라는 작은 고찰이 자리한다. 이 사찰엔 보물 제1296호인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있으나 외진 곳에 위치한 탓에 스님한분이 주석할 뿐 신도와 방문객이 적은 고즈넉한 사찰이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 위치한 신륵사와 절 이름이 동일하다.

이 사찰의 극락전 외벽에 사명대사관련 벽화가 유존되고 있다. 임진왜란당시에 사명당을 비롯한 의승군의 활동은 많이 알려져 있으나 그의 행적과 관련된 벽화는 신륵사의 벽화가 유일하다. 월악산 남록의 작은 사찰에 왜 사명당의 벽화가 그려지고 존재할까? 그동안 학계에서는 사명당의 주요활동지역과 연고를 강원도 일대라고 주장하여 왔으나 근래에 충북지역에서 조사된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토대로 충북지역에서 사명당의 행장을 더듬어 보자.

사적 제445호인 충주시 신니면에 위치한 숭선사지는 고려 광종 5년인 945년에 그의 어머니 신명순성왕후를 위해 모후의 고향인 충주에 세운 왕실발원의 국찰이다.

숭선사지는 모두 6차례 발굴조사 되었는데 조선 선조대에 사용된 만력명의 기와들과 함께 ‘유정감진(惟政監眞)’이라는 명문기와가 다수출토 되었다. 선조대에 유정이라는 법명을 사용한 고승은 사명당 한 분이였으므로 1579년을 전후로 사명당은 충주 숭선사의 주지였거나 숭선사의 중수를 총괄했음을 알 수 있다.

국보 제55호인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은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이다. 1968년 팔상전을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목탑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큰 기둥 아래의 심초석에서 금동판에 새겨진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1596년에 왜군들에 의해 팔상전이 소실되었고 그 후 선조35년인 1602년 10월에 재건하였는데 이 불사를 ‘조선국승병대장 유정비구’가 하였다고 기록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법주사 팔상전의 위용은 휴정대사에 이어 2대 팔도도총섭의 직을 가진 조선국승병대장 사명당이 중창한 것이다.

한편 사명당이 1604년 왕명을 받아 탐적사로 일본을 향하는 노정에서 단양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지은 ‘단양전사야회’와 ‘유죽령’이라는 시를 볼 때 사명당의 남행이 고대에 개척된 단양의 죽령로, 즉 조선시대에 크게 활용된 영남대로를 택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륵사는 충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신륵사벽화에 그려진 성곽은 단양성곽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벽화상단에 ‘사명대사행일본지도’라는 제목과 단양전사야회에 ‘단양의 높은 성벽에 기대서서’라고 운운하고 있음을 볼 때 이 벽화는 사명당이 탐적사로 포로송환의 협상을 위해 일본을 향하는 여정을 그린 것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사명당은 왜란을 전후하여 충주 숭선사의 중창불사와 보은 법주사 팔상전의 중창을 주도하였으며 탐적사로 일본에 가면서 제천 신륵사에서 그의 행장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또 그의 시문에서도 단양이 언급되고 있음을 볼 때 사명당이 충북지역에서도 여러 행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사명당은 일본에서는 송운이라는 법명으로 활동하였으며 그가 남긴 서찰 등 관련문서가 가등청정의 원찰인 큐슈의 웅본시에 소재한 본묘사에 상당수가 남아있다. 사명당은 고승으로 훌륭한 외교가로 우리 지역에서도 그 존재감이 커지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임진왜란의 발발은 동북아시아 삼국이 모두 전쟁에 휘말림으로서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는데 왜란 후 일본에서의 사명당에 대한 평은 다음과 같다.

“이 전쟁에서 일본의 잘못을 말한 사람도 한분의 승려이며, 일본군을 욕보인 사람도 한분의 승려이며, 일본과 300여년간 평화를 누리게 한 사람도 한분의 승려였다“

사명당, 송운대사……. 그와 관련한 벽화를 보던 그 때의 감동을 어찌 잊을 것인가.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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