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룡관 <시인·중국 길림성 연길시>

 

2004년이 기울어져 가는 때, 정확히 말하면 그 해 11월 11일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벌어진 색다른 일들 하나하나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잊을 수 없는 일들이다.(한국에서는 매년 11월 11일을 ‘빼빼로 데이’라 하여 젊은이들에겐 꽤나 의미 있는 날이라고 들었다.)

오랫동안 기획을 하여 중국대륙을 동쪽에서 서쪽까지 횡단하기로 한 한국의 시인이자 언론인인 C회장의 놀라운 제안으로 나는 꿈도 못 꾸던 중국을 횡단하는 별난 여행길에 올랐다.

제일 마지막 도착지점을 중국 서역 제일 끝에 있는 신강성의 카스카르시로 정한 기나긴 여정의 첫날이다.

겨울 새벽안개가 낀 연길시의 버스정류장에 수많은 버스들은 다 잠들어 있는데 우리를 태운 버스만 요란한 소리로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40인승 버스인데도 승객은 우리 둘 뿐인 새벽 5시에 떠나는 첫차였다. 한국에서 온 C회장과 깊은 우정을 나누던 연변의 이임원·김영춘 두 시인이 달려 나와 길 떠나는 우리에게 간식으로 먹으라며 빵과 과일, 그리고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며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고구려성지였던 집안시에 도착한 시간은 고샅길에 가로등이 반짝이는 때였다. 우리는 처음 와보는 생뜨기들인지라 잠자리부터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여관간판은 줄느런히 서있는데 메고 끌고 다니는 적지 않은 짐을 안전하게 보관하며 잠을 잘 수 있는 숙박업소는 여간해선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버스 역 초대소 간판이 눈으로 날려들어 왔다.

등기부에 가서 “제일 좋은 방이 어느 방이냐”고 물었다. 봉사원의 눈에 반짝 기쁨이 찰찰 넘쳤다. 여행객이 없는 계절에 비싼 방을 찾는 손님이 생겼으니 얼싸 좋다고 나를 2층으로 안내했다. 위생실이 딸렸고 쌍침대(더블베드)가 하나 놓여있었지만 한국의 여관에 비하면 어림도 없는 낡고 침침하고 퀴퀴한 냄새가 심한 방이었다. 그나마도 이만한 방은 하나뿐이란다. C회장은 다른 곳을 찾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주위를 보십시오. 죄다 개인여관인데 어디 가서 좋은 곳을 찾겠습니까? 황차 여기는 호텔이 없는 고장이랍니다.” 나의 난감해하는 말에 우리는 한 방에 짐을 풀었다. 남자 둘이서 쓰기엔 좁은 침대 하나에 함께 누우며 우린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C회장은 한국에서 살아온 지체 높은 사람인데 첫날 숙박부터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일이였다. 그렇다고 자기만 좋은 방에 들고 나를 여러 명이 자는(중국 일반적인 숙박업소는 대부분이 그렇다.) 다른 방에 들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룻밤 쯤 한 침대에서 동성연애를 하면 될 거 아닙니까.” 나의 넉살스러운 말에 먼 하늘을 눈빛질 하던 그도 밝게 웃었다.

한 침상에서 자고 난 나는 C회장을 얼결에 “C 형-”이라고 불렀다. 서로가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다가 쏟은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듯이 흘린 말도 다시 거둬들일 수 없었다. 나이로 말하면 C회장은 한살 아래고, 직급으로 말하면 나보다 하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이는 한국의 지역 종합일간신문(여기로 말하면 성급)에서 사장과 회장 일을 본 사람이요. 나는 그보다도 작은 지구급 신문사의 일개 편집국 문화주임이었다.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이라 하지만 그것은 헌 막대 같은 명의만 있는 칭호여서 주석단회의에 가서 손이나 드는 허수아비였다. 그런데 별수가 있는가. ‘하루 밤을 같이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데 우리도 하룻밤을 한 침상에서 자지 않았는가. 카스까지 가자면 멀고도 먼 여행길인데 그냥 C회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2004년 11월11일. 이후 우리는 서로가 ‘-형’이라 부른다. 이 친근한 호칭으로 긴 여행을 무사히 했듯 사는 날 까지 계속될 우정을 각인한 날이어서 나는 이 날을 잊을 수 없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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