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선 시인

오늘 아침에는 늦잠을 잤다.

새벽 네 시쯤 잠이 깼다. 밖을 내다보니 아직 어두웠다.

골목에는 가로등만이 지난밤을 지새우느라고 피곤한지 혼자서 깜박거렸다. 책을 읽으려다 말고 딱 한 시간만 더 자기로 했다. 그리고 일어나 들깨 밭에 비료를 하러가기로 한 것이 두 시간이나 더 잔 것이다. 늦게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두 손을 높이 쳐들고 나만의 구호를 외쳐 보았다. ‘열심히 살자.’ ‘착하게 살자.’ ‘당당하게 살자.’ ‘조용히 살자.’ ‘즐겁게 살자.’

물론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내 몰래 속으로 매일 아침 다짐해 보는 것이다.

밖으로 나와서 주방에서 찬물을 한 컵 마시면서 뱃속에다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면도를 하고 맨손체조를 끝낸 다음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가 푸른 대문을 열었다.

아침을 먹었다. 처마 밑에 잠자는 늙은 오토바이를 흔들어 깨웠다. 오토바이도 이젠 너무 늙었다. 나와 근 25년이나 동거를 했는데 고개를 올라가자면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요새와선 그나 나나 가련한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다.

집에서 밭에까지는 가까운 5리다. 오토바이로 천천히 가도 오 분이면 닿는 곳이다.

지금부터 10여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의 산소를 찾다가 이 밭을 마련했다. 평수로 800 평이 넘는다. 내게는 너무 큰 땅이었다. 이곳에다 아버님을 모셔놓고 나는 아침이면 출근 아닌 출근을 하는 것이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에만 올라오면 답답한 가슴이 탁 트이고 정신이 맑아왔다. 향기로운 솔바람으로 지난밤의 어지러운 꿈을 씻고 나를 반겨주는 산새들과의 아침인사로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산소에 아침문안을 드려야한다. 아버님 산소 앞으로 가기 전에 생전에 뵙지 못한 두 분의 산소가 먼저 나란히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매일 아침이면 인사를 올린다.

오늘 아침에는 들깨 밭에다 복합비료를 뿌려주었다. 그동안 오랜 가뭄으로 자라지 못한 것을 빨리 키우고 싶었다. 농사 중에서 제일 짓기가 쉽다는 들깨 농사라지만 가뭄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농사를 짓는 데는 좋은 연장과 농기계가 있어야 한다. 나는 경운기는 고사하고 밭고랑 타는 관리기 한 대 없다. 몇 가락의 낫과 몇 자루의 삽괭이와 쇠스랑 그리고 등에 짊어지는 분무기가 두 대 있을 뿐이다. 아직 전근대적인 농업을 그대로 영위하는 셈이다. 작목도 몇 그루의 감나무와 벼농사와 콩과 팥, 고추, 마늘, 채소 정도이다. 그래도 나를 위로해 주고 달래주는 산새들과 하루를 사는 기쁨이 있다. 키 큰 소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밭고랑에 아무렇게나 피었다 지는 야생화 친구들이 있어 즐겁다. 아무리 작은 꽃이라도 깊은 애정으로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도 이승 어디엔가 꼭 필요해서 하느님이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니 함부로 밟을 수도, 낫으로 벨 수가 없었다. 사진도 한 장씩 찍어주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막내가 명함보다 조금 더 큰 핸드폰 하나를 장만해 주었다. 그 안에는 카메라 기능이 내장되어 있어 작은 꽃들이나 나무들을 이곳에 잡아 가두는 재미를 붙였다. 복숭아· 감나무에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열매가 열리는 사진들도 저장해 두었다. 이 그림들을 올 겨울 눈 내리는 날 다시 펼쳐보면서 기나긴 삼동을 따뜻하게 보내고 싶다. 지난달부터는 논에서 자주 만나는 백로를 카메라에 잡아두고 싶어 노력을 해도 뜻대로 잡히지 않는다. 그녀의 날개를 빌려 하늘 나르는 법을 배워보고 싶은 것이다. 엄동설한을 함께 살고 싶은데 나는 아직도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다. 내 몸에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같이 시골에 살면서 일상으로 대하는 모든 것들이 내 생애엔 모두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임에 나는 기쁘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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