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예란 <시인·중국길림성 연길시>

 

단풍이 시를 만드는 시월의 청주거리.

10년 전 나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 선생님의 종손분으로부터 ‘직지열쇠고리’를 선물 받았다. 중국 돈 오전짜리 동전만한 정방형 납덩이였는데 얼핏 보면 김치움뚜껑 같았다. 무거운 김치돌에 짓눌려서야 깊은 맛을 내게 하는 김치움뚜껑. 빛없는 어둠에 홀로 갇힌 시린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는 그 뚜껑이 왠지 아픔 묻힌 나의 가슴속 무덤뚜껑이라고 생각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악성 댓글 때문에, 시 때문에 울고 싶었던 나날. 나는 제인에어의 ‘붉은 지하방’에 갇힌 적이 있다. 어두운 방에는 길이 없었다. 바깥세상과 다른 세상이 흐르는 곳. 나의 심장은 밀실. 그 밀실에서 당신을 매만지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의 도드라진 글 뼈는 나의 손바닥에 추위를 몰고 다니는 겨울바람 같았다. 때로는 당신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초가집 흰 벽 같기도 하고 돌려 돌려 또 다시 보면 초모자형, 팔간집형, 새둥지형, 프랑스국립도서관형, 또 어떻게 보면 감옥형 아무튼 보는 시각에 따라 같지 않은 물체들이 꿈틀거렸다.

감옥형. 문득 조명희님의 얼굴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그렇다면 이 ‘직지열쇠고리’가 하바로프스크 지하 감옥이란 말인가? 한국 땅에 반세기가 넘게 파묻혔던 하바로프스크 지하감옥. 해 빛살보다 쇠창살이 익숙한 지하 감방에서 조명희님은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을까.

나는‘짓밟힌 고려’를, 우시는 조선의 혼을 보았다. 그 소리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의 령혼과 그의 령혼을 이어주었다. 나는 나를 뒤흔드는 눈물향기에 압도 되였다. 지금까지 거대한 슬픔과 억울함이 목을 조였지만 그 향기 때문에 오히려 그 고통이 반가웠다. 향기는 나의 령혼에 색깔을 올렸고, 향기의 빛이 가슴에 흘러들었다. 향과 빛이 춤을 추며 숨결이 있는 모든 아픔을 축축한 바닥에 떨어뜨렸다. 감방 안에서 혹독했던 8개월, 조명희님은 속절없이 죽음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봄 하나 둘 곳 없는’산비탈을 에돌아 시의 한숨을 지으며 아무르 강변을 산책하셨다.

“아무르 강아, 내 참뜻 외면한 채 흐르고 또 흐르다 어디에 다다를꼬” 때로는 이렇게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하셨다. 그의 눈물이 아무르 강으로 변한 것을 나는 분명 보았다. 순간 쇠창살 사이로 하늘이 가득 감방 안에 흘러들었다. 차츰 봄 잔디밭이 일면서‘새 아리랑’이‘땅속으로’들어가 다시‘봄길’을 떠밀어 올리더니‘기를 쓰고 피여 나는 이 땅의 풀들’이 가득 돋아나지 않겠는가. 이들은 조선 땅의 푸른 깃발이다. 그 펄럭임 따라 가보면 16세기 초 유럽에 퍼졌던‘문예부흥기’를 청주시의 노래방에 끌어들여‘명사시랑송방’으로 되는 것을 볼 수 있고, ‘포석조명희문학제’란 따비가 척박한 연변문단의 땅을 걸우어 시향이 만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동양신인문학상’, ‘거북이 마라톤’, ‘지용신인문학상’, ‘충북도순회명사시낭송회’, ‘올해의인물시상식’, ‘만물박사선발대회’…. 이 모든 알알의 열매들은 근 반세기 동안 파묻혔던 눈물로 움튼 한글문학의 황금씨앗이 아닐까. 문학상에 당선된 그 누군가의 아픔을 열어주고, 삶을 열어주고, 력사를 열어주는 금빛열쇠가 아닐까….

외로울 때 어두운 곳에서 늘 대기하고 있는 그 따스함을 만지면 내 안의 문이 열린다. 문학 혼이 살아난다. 오랜 세월 나를 숙성시켜 준 알른알른 빛의 뚜껑. 때로는 나의 시 줄의 땀방울 이였고 때로는 고독을 달래주는 활자 숲이었다.

이제 또 10월이 오면‘명사 시랑송’이 이 가을을 물들이겠지. 시를 사랑하는 청주의 모든 기관 단체장님들과 문인,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은 한국을 깨우고 세계를 깨우는 거대한‘직지열쇠고리’로 되겠지.

별빛 찬란한 무대 위 나는 조명희님의 시‘성숙의 축복 ’을 랑송한다. 청중석에 앉으신 조명희님께서 눈물을 환하게 웃으신다. 락동강과 두만강과 대동강과 아무르강이 어머니의 흰 옷고름으로 당신의 고운 허리에 칭-칭 휘감긴다.

<이 글은 원문대로 실었음.-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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