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시인)

▲ 이석우(시인)

대마도 이즈하라에 국분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나라에서 관리하며 민간포교가 아닌 국가번영을 기원하는 관승(官僧)들이 활동하던 곳이다. 관청에서 관리하였으므로 자연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있게 마련이다. 이 절 뒤편에 조성된 묘지의 상단부에는‘종3위훈1등국분상태랑지묘’이라는 묘비가 서 있다.
고쿠분쇼타로(國分象太郞)는 이완용과 함께 한일병합을 주도하여 우리민족의 가슴에 통한의 씨앗을 뿌렸다. 대마도 출신인 상태랑은 조선어에 능통하여 을사보호조약과 한일병합 조약문 초안을 만들고 통역하였던 자이다. 상태랑은 한 때 이토우히로부미의 통역비서 역할도 하였다. 그는 대마도 광청사에 있던 한어학소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부산의‘초량관어학소’를 거쳐 동경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였다.
대마도에서는 한국어가 인기가 많았다. 한국어는 출세와 부를 잡을 기회를 가져오기 때문이었다. 부산의‘초량관어학소’로 유학 온 왜인들은 경북궁을 드나들더니 나중에는 한일합병의 통역관과 정보원 노릇도 하기에 이르렀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 때의 통역자 2명도 바로 대마도인으로 이 어학소 출신이었다. 상태랑은 바로 이 일련의 한국어 교육과정을 거쳐 조선총독부 인사국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이완용과 손잡고 조선인들에게 칼을 휘둘러대다가 1917년에서 1921년까지 이왕직 차관을 지내던 중 62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왕직은 일본황실령으로 만들어진 고종황제를 일본의 일개 왕공적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직제였다. 대부분 장관은 한국인으로 차관은 일본인으로 정하여 궁중에 관련된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물론 전에 근무하던 궁내부 직원 326명과 고용직 340명은 즉시 해고해버렸다.
1920년 4월 28일 상태랑은 이은왕자와 일본 황실의 이방자여사의 정략결혼을 추진하였다. 그 이튿날 이완용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이 결혼식이 어떻고 저떻고 하고 사족을 달았다. 1925년 덕혜옹주의 정략결혼 역시 이왕직에서 추진한 것이었다. 이 때 이왕직 장관은 민영기였으니 요즘 상영중인 덕혜옹주에서의 한창수보다는 민영기의 설정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완용은 즉시 후작으로 승작 되었다. 3·1 운동 때 동포를 협박하는 경고문을 3차례나 발표한 공적이 인정되었다. 이완용은 상태랑이 죽자 몹시 슬퍼하였다. 그래서 묘비문을 직접 써 주었다. 비석 왼쪽의 ‘후작 이완용 서(侯爵 李完用 書),라는 글자는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보아 나중에 누군가 적어 넣은 것이다. 
이완용은 1858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했으며 24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29세에는 외교관의 신분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 그는 고종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처음에 이완용을 비롯한 미국유학파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이 점점 강해지자 어느새 이완용은 일본의 세력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명성왕후가 일본인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아관파천이 있자 곧바로 그는 러시아의 수족이 되고자 하였다.
1904년 2월8일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제국 해군의 연합함대가 중국 요동 반도의 뤼순항에 주둔하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한다. 러·일전쟁이 터진 것이다. 1905년 5월27일 대마도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는 대마도 포대의 공격을 받은 38척의 함대 중 35척이 침몰하고 겨우 3척만이 살아남는다. 일본이 승리하면서 우리나라는 제국주의들의 묵인 하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만다. 이 와중에 독도도 일본 영토라고 하였다.
이완용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곧바로 일본의 권력자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하였다. 총리대신이 된 그는 고종의 권한을 끌어내리고 1905년 소위 한국과 일본을 하나로 만들자는 한일병합을 이루게 하였다. 그는 일본정부로부터 매국수당을 받아 조선인 가운데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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