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 김 주 희(논설위원/침례신학대 교수)

목월 시인이 그랬다. 돈 빚보다 글 빚이 더 몸 달더라고. 돈은 융통할 수 있지만 글은 빌릴 수도 없으니 그랬나보다. 써지지 않을 때는 참 이상하게도 안되는 글. 표출될 분량의 정서가 차올라야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게 참 어려웠을 것이다. 붙잡고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으셨을 시인은.
 지난여름 목월시인의 글 빚 생각을 가끔 했다. 독서지도 책을 하나 공저로 엮기로 했는데 저자들이 모두 지지부진이었다. 집중을 못하겠다고 괴로워들 했다. 맡은 부분 잘 감당하려 책상 앞을 지키고는 있다고. 짧은 글이야 재기가 필요할 테고, 긴 글이니 성실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하필 맡은 부분이 주로 문학부분보다는 교육과 심리에 걸친 부분이어서 품을 좀 더 들여야 했다. 회장이라는 이름까지 단 처지이니 마무리를 썩썩 시원하게 져야했건만. 오래된 회원들이 돌아가며 하는 자리라 이럭저럭 완장을 찼고, 개정판을 내기보다 새로 쓰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는데, 그 일들이 하필 내가 완장찬 시기에 일어났다. 슬며시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되었다. 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들 모임으로 일 년에 두어 차례 씩 숙박을 하며 토론하고 여행도 하면서 이십여 년을 지속해온 사이였다. 어느 때는 밤잠을 안자고 토론한 적도 있고, 어느 때는 헐렁하게 외국까지 여행 삼아 놀이를 가기도 했다. 공저한 책의 인세를 함께 모아두고 만날 적마다 맛난 것들을 먹기도 하면서 동창들보다도 훨씬 오래, 많이 만나고 사귄 셈이다. 그 사이에 누구는 이쁜 건물 주인이 되고, 누구는 정년을 했으며, 누구는 출판사를 차렸다. 자식 성례 소식도 듣고 부모님 상 소식도 있었다. 소식이 끊겼다 이어지는 이들도 몇 있고.  
 원고 쓰는 거야 하던 일이고 다들 전공한 박사들이니 하기로만 하면 훌륭히 해낼 거였는데 문제는 각자의 사정이 겹쳐있었다. 누구는 외국 여행이 길게 잡혀있고, 누구는 갑자기 손자를 보아야 할 사태가 생기고, 누구는 원고를 쓰다가 대상포진에 걸려 앓기도 한다는 얘기들이 돌고, 아플까봐 미리 수액 맞아가며 쓰고 있다고도 했다. 이 모임은 성실하기는 해도 모든 조건 물리치고 일을 해내는 야무진 능력자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날은 또 낯설도록 더웠으니. 
 한 여름에도 솜이불을 덥던 한 시절이 있었는데, 더위보다 추위가 문제여서 십일월부터 사월까지 일년 절반을 내복과 함께 살면서. 에어컨은 언감생심, 누가 켜 둔 곳에 양말 바람으로 들어서면 시원하다기 보다 발부터 시리기 일쑤여서 친한 사이에 대접으로 켜둔 것일 때면 꺼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는데, 그 때가 나은 걸까, 한 여름 햇볕 아래 놓여 달궈진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앉으면서 이 따끈한 동남아 분위기 좋다고 던지던 농담 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새삼 더위를 타기 시작한 건지 이 땅이 더워지는 건지 둘 다인지 여튼.
 시인 이상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수염이 자라나는 게 보인다고 하더니 팔에서 땀이 솟아올라 방울방울 모여 주르르 흘러내리는 게 하루에도 몇 번씩 보였다. 반평생 해온 일이니 더위에 원고 쓴다고 뭔 보람찬 일하듯 성취감 느낄 젊은 청춘도 아니고 보면 같이 원고 담당하는 이들 아프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심란했다. 우리가 이 책을 왜 다시 쓰기로 했는지를 다시 묻고 점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적어도 원고가 잘 안되면서 그 부분은 각자 확실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했을 것이다. 모두가 개별적으로는 속으로 수없이 속으로 되뇌었을 그만두면 어쩔까 하는 말들은 어쩌면 순전히 다시 상의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묻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급박한 일정을 다행삼아 마무리들을 짓고 책을 만들어 끝내놓고 보니 어찌나 훌륭한 여름이었는지. 기회 닿을 적마다 병 나면 안된다고 서로 독려하던 시간들이 훌륭해졌다. 늘 그렇기도 했다. 수월하게 넘어가지 않는 일 허위허위 마치고 보면 과정의 어려움들이 감사나 보람같은 정서들과 연계가 되더라는 그런. 목월 시인이 쓴 ‘구월의 노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하는.
  청춘의 한 낮 같은 여름을 기진하며 넘고 있으니 새삼 저물 사랑 따위 없고 보면 새로운 계절에 새로이 기대를 품어보는 일을 해보아야 하려나, 어떤 신기한 일들이 펼쳐질는지. 여기저기서 열리는 축제 소식처럼 기쁘고 멋진 일들이 휘황하게 일어날지 모른다는 기대를 또 모락모락 길러봐야 하려나 싶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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