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일보는 이충호 일본 후쿠오카 국제대 부이사장의 시리즈 ‘일본에 전래된 한국문화’를 매월 1·3주 월요일 특집면에 게재한다. 선조들이 일본에 남긴 문화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이 올바른 역사를 알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다. 첫 순서로 한국과 가장 가까운 규슈지역의 문화유산들을 살펴본다. <편집자>

 

“독자들이 선조들의 흔적을 바로 알 수 있었으면” (인터뷰)

▲ 이충호씨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어떤 문화유산을 남겼는지 바로 알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 글을 통해 후손들이 선조들이 남긴 족적을 되새겨보고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동양일보 지면을 통해 우리 선조들에 의해 일본에 전래된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맡은 이충호(64·일본 후쿠오카 국제대학교 부이사장)씨의 바람이다.

이 부이사장은 주후쿠오카 대한민국총영사관에서 교육영사를 지내고 옥천상고 교장으로 근무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 2014년 충북청명학생교육원장의 자리에서 정년퇴임했다. 충북 제천중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교육부 학교정책실 심의관, 국제교육진흥원, 국사편찬위원회 교육연구관 등으로 근무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주후쿠오카 대한민국총영사관 이외에 동경한국학교, 주일대사관 등에서 교육을 위해 공헌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문화정치의 실상을 담은 ‘조선통치 비화’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일제 암흑기 의사교육사’, ‘재일조선인 교육역사’ 등 일본 전문가와 역사가로서의 시선이 돋보이는 다수의 저서를 세상에 내놨다.

긴 세월 일본과 특별한 인연을 맺어온 이 부이사장이 일본에 전래된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8년전 그가 일본에 위치한 동경한국학교에 재직할 때다. 당시 학생들의 소풍을 위해 답사 자료를 수집하던 중 일본에 남겨진 한국 문화의 흔적을 찾게 됐다. 이 부이사장은 그 이후 일본 전역에 전래된 한국 문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자료들은 ‘한래문화유적지답사’란 제목의 보고서로 남아 아직도 보관중이다.

그는 “일본에 있으면서 한국의 흔적을 일본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아직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 아쉽다”면서 “명성황후를 관음상으로 모시고 있던 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일본 규슈지방 후쿠오카에 있는 절신사(節信寺)는 명성황후를 관음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가슴 한켠에선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혼을 기리기 위해 불상을 바치기로 한 것.

이 부이사장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게된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동시에 역사의 비극을 느낄 수 있었던 체험”이라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 절에 대한 자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는 동양일보 지면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그는 “동양일보 독자들이 이 글을 통해 우리 선조들이 남긴 문화를 아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독자들의 역사의식 확장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 시리즈를 통해 일본을 왕래하며 직접 답사한 자료를 더해 역사이야기를 재미있게, 생생히 들려줄 생각이다.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장 가까운 쿠슈지방부터 시작해 일본 전역에 남아 있는 선조들의 흔적을 찾아갈 예정이다.

 

 

일본에 전래된 한국문화 -규슈 속의 한국사<1>

●규슈 개관

규슈(九州)는 일본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약 4만 4000㎡로서 일본열도를 구성하는 큰 네 개의 섬 가운데 혼슈(本州)와 홋카이도(北海道) 다음 가는 크기이다. 규슈는 쓰시마(對馬), 고토(五島) 열도 등을 포함해 약 1400여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1883년 이후 현재의 후쿠오카(福岡), 사가(佐賀), 나가사키(長崎), 오이타(大分), 구마모토(熊本), 미야자키(宮崎), 가고시마(鹿兒島), 오키나와(沖繩)의 9개 현으로 개편됐다. 현재의 후쿠오카는 막부체제의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와 부젠(豊前)의 일부에 해당하고 사가와 나가사키는 히젠(肥前) 및 쓰시마(對馬)와 이키(壹岐)를 포괄하고 있다. 또 오이타는 부젠의 일부와 분고(豊後)를, 구마모토는 히고(肥後)를, 미야자키는 휴가(日向)를 그대로 이었다. 한편 가고시마는 사츠마(薩摩)와 오스미(大隅)를 합한 것이며 오키나와는 류큐(琉球)국이었다. 지형적 특성으로 볼 때는 3개의 권역으로 나뉜다. 즉 기후가 혼슈와 큰 차이가 없는 중화학 공업지대인 북부와 활화산인 아소(阿蘇)산이 있는 중부, 아열대 식물이 자라는 남부로 구별이 되며 각각 다른 기후와 지형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규슈는 현재 다리와 간몬(關門)터널에 의해 혼슈와 연결돼 있다.

규슈는 쓰시마를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맞닿아 있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대륙문화가 가장 빨리 들어온 선진 지역이었고, 문화적으로도 한반도와 가장 유사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한편으로는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고대의 규슈는 한반도로부터 건너 온 이주민들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곳이다. 청동기 시대의 대규모 유적인 요시노가리(吉野が里) 유적은 이 점을 반영하듯 한반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발굴품들이 나왔다. 또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은 출토유물 대부분이 한반도에 기원을 둔 것으로 피장자도 한국계 주민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한국계 이주민들과 관련해서 규슈에는 유적뿐 아니라 여러 전승들이 남아있는데, 이들의 전설과 관련돼 있다고 하는 히메코소라는 발음의 신사가 많은 것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한반도와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했던 고대의 일본은 규슈에 서쪽의 수도라고도 할 수 있는 타이자이후(太宰府)를 뒀는데 그 역할은 규슈를 관할하면서 외교관계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 곳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660년)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파견된 원군의 전진기지였고, 백강(白江) 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당과 신라 연합군의 일본 침공에 대비해 주위에 방어성을 쌓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때 백제 유민들이 그 지역의(大野城, 基肄城 등) 축성을 주도했다고 하며 남아있는 유적에서 고대 한국의 축성기술이 사용됐음이 확인된다. 현재 백제 마을이 있는 난고무라(南鄕村)에는 백제 멸망 후 일본에 온 백제왕족 정가왕(禎嘉王)을 모신 미카토(神門) 신사와 정가왕의 무덤, 그에 관한 마츠리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13세기 몽고가 세계제국인 원을 세워 일본정벌을 도모할 때 규슈는 다시 한번 일본 역사의 중심지가 됐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원과 고려의 연합군이 규슈의 히라토(平戶)와 하카다(博多) 연안에 상륙을 시도했지만, 일본측의 오랜 방어 준비와 악천후로 실패하고 돌아갔다. 왜구 문제도 있었지만 이후 규슈가 한·일관계에서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현재 사가현에 있는 나고야(名護屋)성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야망에 의해 조선으로 출병하는 일본군의 전초기지였다. 쓰시마를 거쳐 대한 해협을 건넌 일본군은 많은 문화재를 포함해 도공 등 기술자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왔다. 규슈에는 이 때 끌려온 조선도공들이 개창한 도자기 생산지가 됐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사가의 아리타(有田)와 가고시마의 사츠마(薩摩)야끼를 비롯해서 가라츠(唐津)와 히라토(平戶)야끼 등이 모두 조선도공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편 후쿠오카에는 조선왕실 출신으로 일본에 끌려와 승려로 한 평생을 마감한 일연(日延)의 자취가 남아있다.

전후 복구사업의 와중에 다시 여진족의 위협을 받던 조선이나 오랜 전란으로부터 벗어나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토쿠가와(德川) 막부는 정세의 안정이 필요했고, 그 결과 조선과의 국교가 다시 수립됐다. 조선과의 무역으로 생존이 가능했던 쓰시마번은 조선과의 전쟁과 우호 양면에 있어서 큰 활약을 했는데 1811년까지 이어진 통신사의 방일은 쓰시마번의 외교적 노력과 그 실무 담당을 통해 가능했다. 쓰시마는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첫 발을 내딛는 곳으로서 많은 관련자료들이 남아있다. 그 밖에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고려대장경판본 및 한국계 불상, 종 등도 다수 전래돼 있다. 에도시대에 들어와서는 가장 주목받은 곳으로 나가사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곳은 당시 외부세계로 향하는 유일한 공간으로써 네덜란드와 중국, 유구와의 직간접적 교류가 이뤄졌다.

근대에 들어 규슈는 불행한 한·일관계사의 막을 여는 곳이었다. 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면서 정한론이 기세를 부렸고,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도 규슈를 통해 전개됐다. 한편 최익현을 비롯한 의병들이 쓰시마에 유배돼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최익현은 그 곳에서 순국했다. 태평양 전쟁기에는 징용으로 끌려온 많은 한국인들이 불의의 객이 되기도 했다. 특히 후쿠오카에는 탄광에서 갱부로 혹사 당하다가 죽은 이들의 무덤과 위령비가 많이 남아 있다. 또 원폭이 투하된 나가사키에는 연행된 한국인 노동자들의 집단거주지였던 함바(飯場) 건물이 몇 군데 남아 있다. 전쟁의 막바지에 전투가 치열했던 오키나와에도 집단 자결한 한국인 위안부 위령탑과 전쟁에서 희생된 한국인을 위한 비가 세워져 있다.

규슈는 한국과 가장 가깝고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그것이 선린우호와 번영이었든, 불신과 전쟁이었든, 한·일의 관계사는 규슈를 통해 전개돼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향후의 역사적 전망도 규슈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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