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용 <주예수그리스도복음선교회 재단 이사장>

 

칠십대에 들어선 내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어디 한두명이겠냐만 유독 깊게 각인돼 있는 세 분께 입은 은혜로움은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동서남북으로 10리 이상을 가야 신작로를 볼 수 있었던 두메산골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나는 먹성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배짱도 두둑해 온 동네사람들의 신임과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하며 정서적으로 풍족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서당에서 글을 배우고 동기들 보다 2년 늦게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가난한 농부의 소득으로는 그 많은 식구가 끼니를 챙겨먹기도 어려운 시기였기에 중학교로의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보은 이식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신 권순보(權純甫) 선생님은 학부모 면담을 통해 내게 지게를 지워선 안 된다고 설득하셔서 학업을 잇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셨다. 그 옛날 깨어있는 의식으로 실질적인 산교육을 시키신 분이었다.

문학책을 접할 길이 없던 시골뜨기들에게 감동적인 목소리로 로빈슨 크루소의 얘기를 들려주셨고 엿을 만들어 먹고, 비누를 만들어 각 집에 나눠 사용하는 등의 체험학습을 진행하셨던 앞선 분이셨다. 청주사람이 일부러 벽지를 택해 부임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제자들의 미래를 일치감치 설계해주셔서 내게는 “너는 수학에 뛰어나니 청주고 이과를 택해 서울대 공대에 들어가서 공학박사가 되어 이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라” 는 꿈도 심어주셨다.

전교 어린이회장과 1등을 놓지 않았던 시절, 도시락을 못 싸오던 날은 사택으로 데려가서 같이 식사를 하게 했고 때때로 날이 궂은 날은 10리도 넘는 길을 홀로 걸어가야 했던 내게 신혼초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과 사모님 사이에서 잠도 재워주시던 분이셨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선생님은 졸업 후에도 1년에 한두번씩 엽서를 주셔서 열심히 공부하여 나라의 기둥이 될 것과 예수 믿고 천국 가라는 뜻을 전하셨다. 그 분이 바라셨던 공학박사는 되지 못했지만 주예수를 따르는 동방박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정성이 한몫했으리라 짐작한다.

반드시 중학교에 진학해야한다는 일념 하에 나 홀로 산외면 사무소에 가서 호적초본을 떼고, 창리가서 사진 찍고, 구티 면사무소 앞에 가서 도장을 파 스스로 서류를 준비한 후, 한복 바지, 저고리를 입고서 (그때는 평상복, 외출복 구분도 없이 1년 365일을 바지, 저고리 단벌로 버텼던 시절이었다) 40리 길을 걸어 보은중학교에 원서를 접수했다. 중학교 입학시험 보러 갈 때는 권 선생님께서 다른 학생의 정장을 빌려주셨고, 필기구도 변변히 없던 내게 연필과 지우개를 채운 필통도 다른 학생의 것을 빌려 챙겨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대화를 밤새 엿들은 내게 중학교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해방직전, 정감록 피난지지를 찾아 평양에서 내려오신 강흥보(康興寶), 수양아버지가 쌀한가마(그 시절, 쌀 한가마니는 1년을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이었다.)를 내주셨고, 장에 가서 팔아 1만5000환(화페개혁 전)으로 바꿔 입학식이 지난 한달 후 등교하게 되었다.

강흥보 수양아버지는 북에서 같이 왔던 아들이 얼마안가 죽고, 재산은 넉넉한 편이었으나 다시 아들 얻을 길이 없어 친구 사이였던 나의 아버지에게 부탁하여 나를 수양아들 삼아 해마다 옷을 해주셨고 그 집에 놀러 가면 맛난 것을 두둑히 챙겨주시던 분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상투 틀고, 갓 쓰고, 정좌하시던 됨됨이가 바른 분이셨다.

중학교때부터 집을 떠나 유학을 하게 된 나는 보은읍 북실(외뿔)에 위치한 외종조부인 김영창(金永昌) 할아버지 댁에서 숙식하게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의 아랫동생이셨던 김영창 외종조부는 친손주까지 10 식구가 넘는 대가족을 보듬고 계셨는데 내게 단 한번도 눈치나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

아침밥이 늦어 도시락을 못 챙긴 채 학교를 가게 될 때면 며느리를 혼내지 않고 도시락을 싸게 한 후,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갓을 쓰신 후, 10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학교에 도시락을 갖다 주셨다. 친외손자도 아닌 형님 외손자를 사랑함에 있어 며느리를 무안하지 않게 다독이시던 속 넓고 따뜻하시던 분, 몸소 행동으로 교훈을 주셨기에 그 많은 외가 식구들과 어울리면서 눈칫밥을 먹지 않고 마음에 상처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농가월령가를 붓글씨로 써서 두면 할아버지께서 거주하는 사랑방에 붙여놓고 대용이가 쓴 거라고 자랑하시던 분, 지금 생각하면 수학 응용문제를 수수께끼로 내주시던 분,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경받는 선비들을 두루 꿸 정도로 박식하여 선비들의 됨됨이를 말씀하시던 분, 친 손주들이 시기할 정도로 3년 동안 진한 사랑을 받으며 할아버지의 성품을 저절로 익힐 수 있었던 나는 비록 부모로부터 풍족한 지원을 받지 못했으나 천하에 가장 복 받은 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 추운 겨울 어둡고 눈이 쌓여 힘든 길, 어린 제자의 언 손과 발을 어루만지던 스승의 사랑.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주저 없이 손을 내밀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수양아버지. 순간적인 감정을 드러내 상처주지 않고 폭넓게 사랑하는 법과 삶의 여유를 알게 하신 할아버지. 이 세 분들이 내 삶의 표상이 되어 힘든 세상을 제법 잘 헤쳐 나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 또한 내 힘이 미치는 한, 도움닫기가 필요한 이들에게 마음의 큰 자산을 전해주고자 늘 다짐하게 한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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